새 시즌이 시작할 때마다 'LCK 프로 무대가 처음인 신예들이 몇 승이나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처음부터 완벽한 플레이를 펼치며 끝까지 기세를 이어가는 선수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2020 LCK는 느낌이 이전과 확실히 달라 보인다. 포지션 변경과 함께 주전 원거리 딜러로 활동하게 된 '비스타'부터 드래곤X(DRX)의 많은 선수들이 첫 주자부터 활약을 펼쳤기에 그렇다.

특히, '데프트' 김혁규를 제외하고 경력이 길지 않은 팀원들로 구성된 DRX의 행보는 더 놀랍다. '도란'과 '쵸비'는 LCK 경력 1년-2년을 향하고 있고, 나머지 주전 선수들은 모두 막 프로 무대에 데뷔한 상황이다. 이제막 연습생에서 1군으로 올라와 챌린저스 코리아의 무대 경험조차 없는 선수가 많다. KeSPA컵에서 경험을 쌓긴 했으나 여전히 헤드셋의 ‘화이트 노이즈’ 기능에 적응하기 쉽지 않다는 신예들이었다. 게다가, 첫 경기는 '도란'마저 징계로 빠지고 '쿼드' 송수형이 나오게 된 상황. 신인의 수가 경력 있는 선수들보다 더 많은 팀이 승리로 프로 무대를 시작했다는 것만으로 놀라운 출발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아직은 어색한 면도 보인다

첫 주차의 경기는 단순히 개인 기량만으로 가능하진 않았다. 분명, 매 경기 시작은 패배였고, 아쉬운 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역전의 빌미를 내주기도 하면서 확실히 안심하고 지켜볼 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약점을 다음 세트부터 보완해나가며 의외의 '패승승'의 저력을 발휘했다. 다전제 세트마다 달라진 경기력을 선보이는 것은 신인 위주의 팀이 해내기 쉽지 않은 능력일 텐데, DRX는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며 두 번이나 승리를 거뒀다.

DRX의 샌드박스와 9일 경기에서는 경력을 넘어선 이들의 능력이 잘 드러났다. 이날 샌드박스는 1세트부터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MVP에 선정된 '서밋' 박우태가 드래곤 타이밍을 비롯한 중요한 전투마다 내려와 DRX의 핵심 딜러를 끊어주는 맹활약을 펼쳤으니까. 탑 라이너 간 기량이 차이가 나지 않느냐는 말들이 자연스럽게 나오곤 했다.

하지만 2세트부터 '도란'에게 아쉬울 법한 상황을 극복할 기회를 만들어갔다. 양 탑 라이너 모두 순간이동으로 합류해 벌이는 교전에서 '도란'이 상대적으로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봇 라인에 이어 바로 탑 라인의 포탑 철거가 이어지면서 '서밋'의 힘을 서서히 빼놓기 시작한 것이다.



▲ 탑에서 내려와 또다시 탑으로 향하는 '케리아'


기세를 탄 DRX는 3세트에서 초반부터 확실한 탑 공략에 나섰다. 이번에는 '표식' 홍창현의 엘리스에 서포터인 '케리아' 류민석의 쓰레쉬가 탑 주변에 머무르며 기회를 노렸다. '케리아'는 탑 로밍 시도 후 봇 라인을 한 번 밀고, 바로 귀환 후 다시 탑으로 향하는 움직임을 쉬지 않고 이어갔다. 그렇게 DRX의 두 신예 '표식-케리아'가 '서밋'의 움직임을 완벽히 봉쇄하면서 '도란'이 충분히 성장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는 듯 '도란'은 한타 때마다 제 역할을 해줬다. 기습적으로 파고들어 상대 핵심 딜러를 물고 늘어졌고, 샌드박스의 딜러들이 딜을 할 수 없는 양상이 이어졌다. 어느새 경기 양상은 1세트와 정반대로 흐르고 있었다. 데뷔한지 1년이 안 된 신예 세 명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신예들의 활약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LCK 선배 '데프트-쵸비'의 역할이 뒷받침됐다. 예전부터 두 선수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캐리력'이다. '쵸비'는 미드-정글 싸움에서 승리한 뒤 맵 전반에 영향을 주고, '데프트'는 라인전부터 터뜨리며 스노우볼을 굴려왔다. 놀라운 피지컬과 딜을 바탕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그렇지만 2020 LCK 첫 주차에서 이들이 보여준 스타일은 확연히 달랐다. '케리아'의 쓰레쉬가 샌드박스전 3세트에서 쉬지 않고 탑으로 향하면서 '데프트'는 묵묵히 홀로 라인에 서 있었다. 자연스럽게 '데프트'가 있던 팀들의 전형적인 봇 캐리 양상은 나오기 힘들어졌다. '상체' 중심으로 메타가 바뀌어도 '데프트'가 있는 팀은 봇 캐리 공식은 통할 때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혼자 라인에서 묵묵히 버티면서 팀의 또다른 승리의 바탕이 된 것이다.

'쵸비' 역시 비슷한 역할을 맡았다. 첫 주차의 숨은 MVP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KT전에서 '도란'의 빈자리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채워냈다. 가끔 등장하는 미드-탑 라인 스왑 정도야 봐왔지만, 이렇게 세 세트를 연속으로 포지션을 변경해 승리한 경우는 LCK에서 극히 드물다. 라인마다 준비해야 하는 챔피언과 그 역할이 따로 있을텐데 모두 충분히 해줬다. 상대 탑 라이너를 상대로 라인전부터 압박까지 이어가면서 다른 라인에서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틀어막아 줬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덕분에 프로 무대에 처음 데뷔한 '쿼드' 송수형의 카시오페아 역시 패배에 묻히지 않고 빛날 수 있었다.




샌드박스전에서도 '쵸비'는 자신의 이름과 익숙하지 않은 빅토르-노틸러스-키아나를 플레이했다. 3세트에서 키아나는 '도브'의 조이를 상대로 서로 약 17분까지 KDA 0/0/0으로 버텨냈다. 갱 호응이 좋기로 유명한 키아나지만, 팀 전체가 탑에 힘을 줬기에 조이와 단순 라인전을 펼쳐야 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버텨내면서 다른 팀원들이 활약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렇듯 DRX는 '데프트'-'쵸비'라는 최고의 딜러들이 자신의 주특기를 내려놓으면서 2승을 달성했다. 동시에 신예들에게 중요한 임무를 주는 쉽지 않은 도전을 이어왔다. 하지만 그 결과로 경기 중심을 잡고 오더하는 '케리아', 매 경기 MVP를 받은 '표식', 첫 공식전에서 흔들리지 않는 '쿼드'까지 신예들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쵸비'는 승자 인터뷰에서 "오늘은 팀원들이 나를 이끌고 캐리해줬으니 다음 경기에서 내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쵸비-데프트'가 건재한 상태에서 신예들까지 가세한다면, 앞으로 더 다양한 스타일의 경기가 가능해진 DRX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완성형을 향해 가는 DRX의 행보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