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다른 이들의 보살핌을 받고 분통의 눈물을 흘리던 앳된 소년이, 다른 이들을 보살피고 슬픔을 속으로 삼켜야 하는 성숙한 청년으로 자라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2013년부터 2020년까지 더없이 빠르게 흐른 '데프트' 김혁규의 시간은 MVP 블루의 철부지 막내를 어느새 드래곤X(이하 DRX)의 주장이자 맏형으로 만들었다.

자타공인 괴짜 감독과 그를 믿고 따라온 미드-탑 라이너, 패기 넘치는 두 명의 신인 선수와 함께 2020 LCK 스프링 스플릿에 도전장을 던진 '데프트'는 최종 3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더 높은 곳을 바라봤던 그의 욕심을 채우기엔 부족했나 보다.

"3위라는 성적이 아쉬운 것보다 경기 내용이 완패여서 아쉬운 게 크다. 팽팽하게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졌다면 충분히 잘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사실상 T1도 리빌딩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신인 선수도 있었기에 조건은 비슷했다. 만약 우리가 더 높은 팀 완성도를 보였다면 결과가 다르지 않았을까.

경기가 끝나고 '케리아'가 눈물을 흘리지 않았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옛날의 내가 겹쳐 보이더라. 나도 데뷔 초에 패배가 너무 분해서 운 적 있으니까. 감정 이입이 제대로 되면서 다시는 팀원들이 우는 걸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패배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다음 시즌에 더 잘해야겠다는 각오만 남은 상태다."



2020년을 앞두고 드래곤X의 기존 주전들이 하나씩 팀을 떠나는 가운데 '데프트' 역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와중 DRX에 합류한 김대호 감독은 '데프트'를 붙잡기 위한 긴 대화를 나눴다. 자신감과 믿음, 진심을 바탕으로 한 설득은 끝내 결실을 맺었는데, 새로운 감독을 믿고 잔류를 택한 '데프트'의 근거는 다름 아닌 본인의 감이었다.

"감독님이 자기를 무조건 믿어달라고 했다. 한 번만 믿어보고 원하는 결과가 안 나오면 사기당했다고 생각하라고. 그런데 계속 이야기를 할수록 이 사람과 함께라면 잘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오더라. 당시의 내게 믿을 거라곤 감밖에 없었기에 그걸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적어도 올해가 끝날 때까지는 감독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를 생각이다.

감독님의 가장 신기한 부분은 스탠스 전환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종종 바보 같기도 하고, 정신 연령이 선수들보다 어리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런데 감독 역할을 할 때는 누구보다도 냉혹하고 철저한 사람이 되어 선수들을 지도한다. 감독님은 일상생활에서의 친근함이 인게임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듯한데, 그렇게 편하게 생활하면서도 선수들한테 신뢰를 얻는다는 게 참 신기하다.

따라서 선수들과의 트러블은 있을 수 없다. 연습 시간이 아니면 전혀 터치를 하지 않고, 피드백 때도 스스로 잘할 수 있는 선수에게는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감독님이 앞으로도 계속 LoL을 잘 했으면 좋겠다. LoL을 못 하게 되는 순간 신뢰도가 떨어질 것 같으니까(웃음).

또 나는 감독님과 대화하는 게 재밌다. 밤새도록 대화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저런 주제로 잠들기 직전까지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최근엔 워크샵에서 내가 갈비뼈를 다친 일이 있었다. 그래서 갈비뼈가 아프다고 하자 거기서 복싱 얘기가 나왔다. 거기서부터 복싱은 간을 공격해야 한다는 얘기, 레프트 훅과 라이트 훅 얘기, 좋은 복싱 선수란 무엇인가에 대한 얘기 등으로 2시간 정도 대화를 한 듯하다. 물론 나도 열심히 질문했다."



MVP 블루 시절엔 최연장자(1988년생)였던 '하트' 이관형을 포함해 '천주'-'이지훈'-'에프람'은 모두 '데프트'와 어느 정도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현재 드래곤X의 모든 팀원과도 당시와 비슷한 나이 차이가 난다. 한 가지 다른 건 이전엔 팀원들이 모두 형이었고, 현재는 팀원들이 모두 동생이라는 점이다.

"내가 고정된 스타일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동생들과 있을 땐 함께 놀 수 있도록 생각이 어려지고 혼자 있을 땐 사색에 잠기곤 한다. 이에 생활 면에서는 아무 불편함 없이 잘 어울려 지내고 있다. 또 동생들끼리도 나이 차이가 있는데, 그쪽은 아예 난장판이다. 서로 반말에 욕에, 형이라고 했다가 안 했다가... 도저히 서열을 알 수가 없다.

'도란'은 책임감이 굉장하다. 주입된 책임감인지는 모르겠지만...(웃음) 누구보다도 열심히 연습 중이다. '표식'은 우리 팀의 분위기 메이커인데, 힘들어도 티내지 않고 밝게 보이려 하는 모습이 대단하다. '쵸비'는 LoL을 정말 잘 한다. 많은 미드 라이너와 함께 해봤지만, 그중에서 가장 안정감 있다. '케리아'는 내가 더 많은 걸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친구다.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제2의 주장 역할을 하고 있다."



형들에게 어리광 부리던 시절을 넘어, '데프트'는 자신을 의지하는 동생들의 그늘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2020 LCK 스프링 스플릿을 앞둔 DRX에는 그 전 시즌에 갓 데뷔한 '도란' 최현준과 첫 LCK 무대를 앞둔 '표식'-'케리아'가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kt 롤스터 입단 전의 내가 지금 팀원들을 만났다면 불안감이 컸을 것 같다. 그런데 지난 경험들을 바탕으로 나도 어느 정도 코치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게다가 우리 팀엔 이미 능력 증명을 마친 감독님도 있지 않나. 팀에 신인 선수들이 있더라도 경험 부족이나 긴장으로 인한 실수, 앞으로 발전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함 따위는 전혀 없었다.

EDG에 있었을 때는 게임 방식이 매우 이기적이었다. 시야가 매우 좁았고, 내 입장에서만 게임을 봤었다. 내가 잘 하는 선수라는 인식이 있어서 별다른 터치를 하지 않기도 했다. 그런데 kt 롤스터로 이적하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피드백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모든 팀원의 네임 밸류가 높아서 패배할 때마다 내 잘못이 더 크게 느껴졌다. 덕분에 내 플레이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해볼 수 있었고, 시야가 넓어지면서 LoL 자체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이다."



MVP 블루의 슈퍼 루키로 데뷔해 EDG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kt 롤스터에서 내로라하는 베테랑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결코 짧지 않은 7년이란 세월은 '데프트'를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크게 변화시켰다.

"세 가지를 제외한 모든 게 달라졌다. 변하지 않은 세 가지는 'LoL이 재밌다', '이기고 싶다', '지면 화난다'다.

어릴 땐 내 감정에 충실했다. 화가 나면 특별히 말을 하진 않았지만, 행동으로 대놓고 티를 내서 주변 사람들이 내 눈치를 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감정을 조절하고, 적절하게 표현하거나 숨기는 방법을 배웠다. 그래서인지 지금 동생들이 화내는 모습을 보면 정말 귀엽다. 왜 화를 내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전부 보인다(웃음). 그럴 때면 옛날에 팀원 형들이 내게 해줬던 것과 '이렇게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해준다.

책임감은 늘 있었지만 지금은 방향이 달라졌다. 예전엔 의견을 많이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플레이에만 책임감이 있었다. 그런데 DRX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밴픽이나 플레이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 내 역할이 어느 정도 커진 상태다. 이에 경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크게 실망하기도 하고, 스스로 책임감을 많이 느낀다.

실력에 대한 태도도 변했다. 예전엔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EDG 2년 차부터 '어떻게 하면 우리 팀이 더 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생각은 경력이 쌓일수록 점점 확고해졌는데, 지금은 절대적으로 나보다 팀이 우선이다.

완전히 집중했을 때의 피지컬은 데뷔 초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런데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졌다는 건 확실히 체감된다. 그래서 연습 때 최대한 오랜 시간 집중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 중이다."



겉에서 보기에 마냥 즐거워 보이는 프로게이머의 삶이지만, 그 속에서는 매일같이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프로게이머로서 쉼 없이 달려온 7년, '데프트'에게는 어떤 고충이 있었을까.

"프로게이머 생활을 하며 '몸이 힘들어서 못 하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다. 다만 초기에는 심적으로 정말 힘들었다. 부모님의 반대를 꺾고 학교를 그만두며 시작한 건데, 월급 같은 고정 수입도 없고 내가 얼마나 잘 될지도 미지수였으니까.

더군다나 첫 목표인 우승은커녕 1년 동안 최하위권에 있다 보니 감정이 매우 복잡했다. 마음이 가장 아팠던 옛날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어느 날 햄버거가 정말 먹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부모님께 5천 원을 보내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하지만 너무 죄송한 마음에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었다.

프로게이머의 길을 포기할 생각도 없었지만, 포기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포기라는 단어는 뭐라도 이룬 게 있어야 쓸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제일 좋아하고 잘하는 걸 찾았는데, 여기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다면 앞으로는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언젠가 솔로 랭크 1위를 달성했을 때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재능은 있는 것 같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더 노력하면 프로게이머로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MVP 블루 시절 형제 팀이었던 오존 팀이 우승하는 모습을 보며 자극을 많이 받았다. 만약 MVP 오존도 하위권이었다면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다."



LCK, LPL, MSI 우승을 비롯해 꽤나 화려한 커리어를 쌓은 '데프트'다. 하지만, 지난 네 번의 LoL 월드 챔피언십(이하 롤드컵)에서 달성한 최고 성적은 4강이었다. 이에 여전히 '데프트'의 최종 목표는 롤드컵 우승이고, 전 동료들이 하나둘 선수 생활을 그만두는 와중에도 그 목표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작년 롤드컵 우승 욕심이 줄어들려는 찰나에 꿈을 하나 꿨다. 롤드컵 결승에서 경기를 치르는 꿈이었다. 결국 패배하고 잠에서 깼는데, 내가 울고 있더라. 아직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은 독기 가득한 팀원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동기부여가 더 잘 되고 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경기는 없지만, 기억에 남는 휴가는 있다. 2015 MSI에서 SKT T1을 꺾고 우승한 뒤 받은 휴가다. 프로게이머 특성 상 게임을 안 하면 본인 손해기 때문에 휴가를 받아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그런데 그때만큼은 프로게이머로서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에 마음이 정말 홀가분했다. 그러면 안 됐는데... 정말 편하게 쉬었다(웃음). 어쨌든 또다시 국제 대회에서 우승한다면 푹 쉴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론 지금처럼 못 할 테니, 올해 제대로 해보자'라는 생각을 갖고 2017년 LCK에 복귀했다. 폼이 떨어지기 전에 제대로 하고 싶어서 돌아온 거였다. 그런데 그 해에도,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꽤 잘 하지 않았나. 그렇게 1년씩 버티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내가 스스로 못한다고 판단될 때까지 선수 생활을 할 예정인데, 아직은 쓸만한 것 같다.

은퇴 후의 계획은 딱히 생각해본 적 없다. 그래도 지금까지 쉼 없이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기에, 선수로서 롤드컵에서 우승한다면 덜 치열한 일을 찾아 하지 않을까.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코치진으로 롤드컵 우승에 계속 도전할 듯하다."



"마지막으로 나와 동생들, 감독님, DRX에 많은 응원 보내주시는 팬분들께 항상 감사드린다. 가진 것에 비해 과분한 관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 때때로 부담스럽긴 하지만, 한편으론 좋은 기회라고 본다. 이렇게 주목받을 때 실력을 더 키우고 좋은 경기력을 보여드린다면 우리를 더 많이 알리고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실력에 대한 비판은 좋지만, 선을 넘는 비난은 자제해 주셨으면 한다. 선수단 전원이 커뮤니티를 모니터링하는데, 동생들이 상상 이상의 비난에 큰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다. 또 우리 팀에 정말 관심이 있는 팬분들이라면 팀 내 트러블이 일어날 일이 없다는 것도 잘 아실 거다.

하루빨리 현장에서 팬분들을 만나고 싶다. 그래도 '코로나19' 이슈가 한창이니 집에서 안전하게 지켜봐 주셨으면 한다. 2020 LCK 섬머 스플릿에선 스프링보다 훨씬 좋은 경기력으로 찾아뵙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