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 왜 재미있는가?'라는 물음에 게이머들은 수십가지 답을 내놓는다. 겹치는 답변도 많겠지만, 어쨌거나 하나로 통일될 일은 없을 거다. 각자 재미를 느끼는 포인트는 모두 다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어떤 게임이라도 도대체 어디서 재미가 오는지 파고들다보면 핵심은 비슷비슷하다.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 모든 게임의 재미는 결국 '선택'에서 온다.

먼 옛날, 게임 산업으로 치면 신석기 시대부터 존재하던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도 '선택과 결과'에 중점을 둔 게임 디자인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의 RTS처럼 번뜩이는 반응속도로 의사결정을 할 필요는 없지만, 매 턴 나의 전력과 상대의 전력을 고려하고, 피해를 계산하며 선택을 반복해야 하는 게임 시스템은 재미의 본질과 분명히 맞닿아 있다. 과거의 수많은 JRPG, 그리고 오늘날의 '엑스컴' 시리즈가 그렇듯 말이다.

'라이트벌브 크루(Lightbulb Crew)'가 개발했고, 스팀을 통해 판매중인 '아더사이드(Othercide)'는 '선택과 결과'라는 재미의 본질을 보다 극단적이면서도 노골적으로 강조했다. 보통 게임은 실패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게이머는 실수를 배우고, 다음 시도에서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성장해간다. 하지만 이 게임은 다르다.

시나리오는 난해하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인 어머니, 그리고 위대한 전사를 본따 만든 '딸'들만이 남아 역병과 악몽에 초연히 맞선다. 흑백의 세계에서 빛나는 건 오직 피와 검광의 붉은 빛이다. 게이머는 딸들을 적재적소에 투입하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악몽에 맞서 싸워야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아더사이드'는 실수를 되돌릴 수 없다. 딸들은 결국 처절히 죽음을 맞이하고, 세계는 끝을 맞이한다.

애초에 그렇게 설계된 게임이다.




어느 때보다 막중한 선택의 무게


게임을 쉽게 한 줄로 설명하고 시작하자면, '아더사이드'는 '엑스컴'식 게임 시스템에 기반한 다크 판타지 전략게임이다. 지정된 전장에서 한 번에 정해진 자원만큼만 행동할 수 있으며, 번갈아가며 다가오는 턴에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해당 장르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엑스컴과는 굉장히 다른 부분이 많은 게임이기도 하다.

▲ 게임 화면은 여느 턴제 전략과도 비슷

가장 먼저 다가오는 부분은 '중간 저장'이 없다는 것이다. 엑스컴에서는 원하는 게이머들이 난도 조절을 위해 취사 선택하는 '철인'모드가 이 게임은 기본 사양이다. 중간에 게임을 저장해 다시 불러오기는 불가능. 모든 행동을 할 때마다 자동으로 게임은 저장되며,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를 두번 다시 되돌릴 수 없다.


또한, 한 번의 실수도 굉장히 뼈아프게 다가온다. 동종 장르의 다른 게임들은 캐릭터가 즉사하지 않는 한 어떻게든 회복을 시킬 수 있고, 한 턴 정도 실수를 해 손해를 보더라도 해당 판에서 만회할 수 있지만, 아더사이드는 한 방이라도 정타를 허용하면 복구가 매우 힘든 타격을 입는다. 방어 특화형 딸이 아니라면, 적의 공격 두 세번이면 사망에 이를 정도. 말 그대로 수틀리면 죽는다. 그리고 당연히, 적들의 수는 많으며 턴은 공평하게 돌아온다.

피튀기는 싸움 끝에 빈사 상태로 승리를 거두어도, 그 다음이 또 문제다. 아더사이드에서 딸을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은 동레벨 이상의 딸을 희생하는 하나의 방법 뿐이다. 죽은 캐릭터를 완전히 부활시키는 부활 토큰은 매우 드물게 입수할 수 있으며, 가장 레벨이 높은 캐릭터는 사실상 회복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다.

▲ 회복 수단은 매우 제한적

결국, 매 선택이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한 번의 실수는 주력 딸의 피해가 되고, 피해가 누적된 딸은 살아남을 수 없다. 캐릭터의 기술 중에는 전체 체력을 퍼센트로 소모하는 기술도 꽤 많은데, 피해가 강요되는 고난도의 전투에서는 이를 아낄 수도 없다. 그렇게 피해가 누적되다 보면, 결국 실패가 눈 앞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더사이드에서 실패란 곧, 다음 시도를 위한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 지금은 이겨도 언젠가 지는 날이 오기 마련


실패와 죽음으로 쌓아가는 금자탑

여기서, 아더사이드의 가장 큰 특징이 드러난다. 게임 중 언제라도, 게이머는 '회상'을 통해 지금까지의 모든 진행 상황을 리셋하고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 물론, 세이브의 초기화와는 다르다. '회상'을 선택할 경우, 게이머는 이전에 쌓아올린 자산을 일부 승계한다. '추모'의 특전을 열 수 있는 회상 포인트, 회상과 무관하게 가질 수 있는 부활 토큰, 그리고 그간 죽은 '딸'들이 묻혀 있는 무덤이다.

▲ 게임을 할수록 딸들의 무덤도 높아진다.

한 번의 회상을 겪으면 이전에 겪었던 전투는 한결 쉬워진다. 전체 체력 상승이나 피해량 상승, 자원 소비 절감 등의 특전이 열리고, 또한 전에 쓰던 강력한 딸을 부활시켜 제한적이나마 즉각 전력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상은 전략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보다 높은 레벨의 캐릭터를 희생해 회복을 시킬 경우, 체력 회복 효과 외에도 딸의 직업에 따라 영구적인 버프를 얻게 되는데, 다음 회상에서 부활시킬 딸에게 버프를 밀어주고 주인공으로 삼을 수도 있다.

이렇듯, 불가능한 목표에 계속해서 도전하고, 실패할 경우 회상을 통해 클리어할 때까지 이어나가는 것이 아더사이드의 게임 흐름이다. 추모 특전 중에는 챕터 하나를 건너띄우는 특전도 있기 때문에 한 번이라도 클리어했다면 난감한 보스는 스킵하는 것도 가능하다. 당연히, 이전에 클리어한 경험이 있기에 다시 플레이해도 전처럼 어렵지는 않다.

▲ '추모'특전은 매우 직관적인 강화 효과

동시에, 플레이어의 실력도 늘어난다. 아더사이드의 턴 시스템은 기존의 다른 게임들이 보여준 교차형 턴 배분이 아닌, '타임라인'이라는 일종의 시스템에 의해 이뤄진다. 100으로 제한된 AP를 모두 사용하면 순서가 가장 뒤로 밀리지만, 절반만 사용할 경우 절반 만큼만 밀린다. 또한 상대의 타임라인을 뒤로 밀어버리거나, 아군의 타임라인을 당겨오는 기술도 있기 때문에 잘 활용한다면 적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전투도 만들어낼 수 있다.

▲ 하단 바가 타임라인

AP 시스템 또한 이동 한 번에 공격 한 번이라는 엑스컴의 공식을 벗어나 AP한도 내에서라면 어떤 식의 플레이든 가능하다. 다음 턴을 제물로 네 번의 공격을 퍼부을 수도 있고, AP소모가 없는 체력 소모기로 상대의 공격에 미리 대비할 수도 있다. 초회차엔 힘들지만, 게임에 조금만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쓰게 되는 테크닉이다. 아더사이드는 적들이 사용하는 기술이나 패턴을 위키 수준으로 상세히 구술해주고, 보스를 포함해 어떤 적이라 해도 공략 방법이 존재한다.

그렇게 게이머는 실패와 죽음을 통해 클리어로 향하는 금자탑을 쌓아 가게 된다. 아더사이드는 쉽지 않지만 쉬우며, 어렵지 않지만 어려운 묘한 난이도의 게임이다. '게임은 실패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라고 대놓고 기획 의도를 말하지만, 게임에 익숙해지는 순간 어떤 상황에도 대응할 만한 방책을 생각할 수 있다. 반면 적을 쉽게 보는 순간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 있고, 어느순간에 이르면 견디지 못하고 회상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

▲ 게임 진행에 따라 딸들도 성격이 생긴다


자잘한 단점을 씹어먹는 분위기의 매력

앞서 말했듯, 아더사이드의 시스템은 굉장히 짜임새가 높다. '선택과 결과'라는 게임의 본질적 재미를 노골적으로 강조했지만, 회상이라는 버팀목을 만들어 둬 게이머가 절망에 이를 정도로 어렵지는 않으며, 회상을 반복할수록 점진적으로 강해지는 딸을 보며 '성장'이라는 게임의 또다른 재미까지 손에 쥐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아더사이드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그리고, 아더사이드에는 이런 시스템을 넘어서는 매력이 있다.

게임의 장르를 넘어서는 감성적인 부분이다. 붉은색과 약간의 노란색을 제외한 유채색을 배제한 색채는 아더사이드의 주요 매력 포인트. 모노톤의 세계에서 강렬하게 뿜어지는 붉은 색 이펙트는 오랫동안 왼손에 감춰둔 흑염룡을 다시 자극한다. '오덕감성'이니 뭐니 하며 멸시하는 풍조가 없지는 않지만, 무채색과 붉은색의 조합은 누구라도 한 번은 시선을 잡아끄는 힘을 가지고 있다.


강력한 공격이나 회심의 반격이 이뤄질때 볼 수 있는 연출과 전장을 나른하게 두들기는 BGM또한 일품. 고딕과 심포닉 데스 사이를 넘나드는 메탈은 곡 자체로도 좋지만 게임의 분위기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게임에 몰입감을 더한다. 사운드트랙을 8,800원이나 받고 팔길래 뭐가 이리 비싸나 싶었는데, 메탈을 좋아한다면 충분히 지불할 만한 퀄리티다.

앞서 게임 시스템을 소개하면서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아더사이드는 좋은 면 만큼이나 부족한 면도 많다. 시나리오는 굉장히 짜임새 있지만 전달력이 강하지 못해 게이머가 직접 찾아봐야 알 수 있으며, 딸들의 클래스가 퍽 적다거나, 스테이지가 너무 획일적이라는 단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 게임이 가진 분위기, 음악과 아트, 색채가 주는 감각, 영문으로는 'Atmosphere'라고 표기하는 부분은 게임의 자잘한 단점쯤은 씹어먹을 충분한 매력을 갖고 있다.

▲ 모노톤과 레드의 감성. 눈길이 확 간다.

아더사이드는 그런 게임이다. 턴제 전략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충실히 따르지만, 다른 게임에서는 볼 수 없는 독자적인 시스템을 가미해 변수를 만들었으며, 간혹 드러나는 단점과 아쉬운 점들은 게임의 각 요소가 전달하는 압도적인 분위기로 쌈싸버리는 게임. 인디 게임이면서도 충분한 볼륨과 게임성을 가진 게임. 비오는 여름 날 에어컨 바람과 함께 밤을 보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