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언맨의 리펄서가 하늘을 수놓고, 캡틴 아메리카가 정제된 움직임으로 적들을 하나씩 제압합니다. 헐크는 직선으로 돌진하면서 걸리는 모든 것을 박살내고, 블랙 위도우는 이 난장판 한 가운데서 침착하게 목표를 수행합니다. 그리고 토르는 그냥 멋있습니다.

그간 다양한 마블 영웅들이 등장해온 MCU(Marvel Cinematic Universe)의 영화에서 흔히 등장한 클리셰같은 장면입니다. 영화 당 두 번 정도는 이렇게 우르르 몰려들어서 다 쥐어패는 장면이 나오기 마련이고, 보통 이 부분이 영화에서 가장 큰 카타르시스를 주는 장면이기 때문이죠. 코믹스만 존재하던 시절에는 머릿속으로 장면을 그려야 했기에 이렇다 할 레퍼런스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MCU가 가동되고 영상화가 본격화된 이후, 팬들의 머릿속에는 이 장면들이 마치 비디오처럼 남아 있습니다.

▲ 역시 어벤져스 하면 이 우르르 패싸움

크리스탈 다이나믹스가 개발해 지난주 출시된 '마블 어벤져스'가 노린 것도 이 '마블 영웅들의 떼거리 싸움 씬'을 게임 안으로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의 전장에서 네 명의 게이머가 각각 영웅이 되어 몰려오는 적을 상대로 장대한 싸움을 벌인다.' 생각만 해도 쿨하지 않습니까? 매 판 이런 패싸움을 벌일 수만 있다면, 이건 꼭 사야할 게임입니다.

코로나로 인한 신작 가뭄의 특수 속에서, '마블 어벤져스'는 그렇게 게이머들과 마블 팬들의 기대를 양 어깨에 얹은 채 출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절 포함한 많은 팬들은 3일 먼저 플레이해준다는 미끼에 걸려 디지털 디럭스 버전을 구매했죠. 게임을 구매하고, 사전 설치 후 기다리는 동안 행복에 젖었습니다. 개인적으로 MCU의 팬이면서, 동시에 그 전부터 마블 코믹스를 사랑해온 원작 팬이기도 하니까요.

9월 2일, 선행플레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하기로 했던 '어셈블'은 잠시 미뤘습니다. 어차피 캠페인을 깨면서 게임을 좀 배워야 하기도 했고, 정식 출시보다 3일 먼저 게임을 플레이한만큼 멀티플레이가 원활하리란 기대도 딱히 없었거든요. 그렇게 어린 '카말라 칸'으로, 마블 어벤져스의 첫 플레이를 시작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던 '싱글 플레이'

'카말라 칸'을 어벤져스의 일원이자 싱글 캠페인의 화자로 내세운 건 퍽 좋은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최근 게임계에서 안 챙기면 괜히 말이 나오는 정치적 올바름을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코믹스 팬들에게도 인기있는 캐릭터이고, '올 뉴 올 디프런트 어벤져스' 이슈에서 어벤져스 멤버가 되었던 바 있으니 원작 고증에서도 딱히 무리가 없는 적당한 포지션입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성장의 여지가 있는 캐릭터라는 특성 상, 게임 켐페인의 주인공으로서는 아주 알맞다고 볼 수 있죠.

▲ 꽤 적합한 주인공 '카말라 칸'

MCU의 느낌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서 코믹스의 기준을 따른 캐릭터 모델링 또한 합격점입니다. 다소 순박해 보이는 MCU의 캡틴 아메리카와 달리 게임의 캡틴은 중후하면서도 책임감 있는 얼굴이 되었고, 토니 스타크는 확실히 더 깐족댈 것 같은 모습입니다. 브루스 배너는 영화보다 잘생겼지만 헐크는 더 흉악한 모습이고, 토르는 본인이 직접 왔습니다.

캐릭터 모델링이 MCU와 코믹스의 미묘한 경계에 놓여 있다면, 전투 애니메이션은 MCU의 그것을 노골적으로 따왔습니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영상화 매체이고, 그간 마블의 영상화 매체는 모조리 MCU에 쏠려 있었으니 익숙함을 위해서라도 좋은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덕분에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영웅들의 시그니쳐 무브들이 게임 속에 완벽히 녹아들었습니다. '아이언맨2'에서 고밀도 레이저로 사방을 긁어대던 모션이나, 헐크버스터의 개틀링 펀치, 묠니르를 회전시켜 주변을 쓸어담는 토르의 모습이 그대로 게임 속에서 구현됩니다.

▲ 영화에서 본 것 같은 화면 구성도 간혹 보입니다.

덕분에, 기존 코믹스의 팬들과 MCU의 팬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포지션을 잡았습니다. 어벤져스가 몰락해 숨어든 후, 팬픽 소설을 쓰던 '카말라 칸'이 어찌어찌 어벤져스를 다시 모으고 진짜 히어로로 각성해가는 과정을 그린 싱글 캠페인도 꽤 훌륭하게 만들어졌습니다. '툼레이더' 시리즈를 개발했던 개발사의 싱글 플레이 개발력은 어디로 간 게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분량이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똑같이 멀티플레이를 베이스로 삼은 게임이면서 뭔 얘기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앤섬'에 비하면 인상깊은 캠페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싱글 캠페인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자막이 개판 그 자체라는 겁니다. 쓰잘데기 없는 지문이 계속 튀어나오고 심지어 일반 대사랑 같은 카테고리로 묶여 끌 수도 없습니다. 말이 길어지면 뒷부분은 아예 잘라버리기도 하며, 간혹 오타도 눈에 띄죠.

▲ 카마음후, 토힘소, 숨쉬는 로봇

그래도 여기까진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싱글 플레이 캠페인은 기대조차 안 했는데 생각보다 매우 괜찮으며, 캐릭터 모델링은 합격점, 전투 애니메이션은 매우 훌륭한 수준입니다. 사전 플레이 기간에 엔딩을 볼 때 까지만 해도 매우 만족스러운 게임이었죠. 그렇게 친구들도 하나 둘 엔딩을 보았고, 네 명이 엔딩을 보고 나자 사전에 '찜' 해둔 영웅을 꺼내 어셈블을 시도했습니다. 캠페인으로 게임의 맛을 봤으니, 이제 이 게임의 핵심 콘텐츠이자 정체성인 멀티 플레이로 넘어갈 때였죠.


넘치는 재미, 더 넘쳐나는 버그

엔딩을 본 친구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각각 캐릭터를 고르고 게임을 시작했죠. 와 너무 재미있어요. 영화에서 보여준 멋진 협동기가 거의 없는 건 아쉽지만 자고로 친구와 같이 해서 재미없는 게임도 거의 없습니다. 멀티플레이의 콘텐츠 플로우는 '워프레임'과 흡사합니다. 각 영웅별로 한계 레벨이 존재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재료를 모아야 하죠. 영웅 종류는 아직 적은 편이지만, 워프레임도 처음에는 적었습니다. 5년을 넘게 서비스한 지금이야 엄청 많지만요.

▲ 참 재밌긴 한데

문제는 이겁니다. 같이 하니까 너무 재미있긴 한데, 10번 가까이 같이 게임을 하면서 끝까지 별 탈 없이 게임을 진행한 건 단 한 번 뿐입니다. 어쩌면 저 세계의 평화를 위해 필요한 건 어벤져스가 아니라 세스코일지도 모릅니다. 게임 출시 후 한동안 갖가지 버그가 발생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불운보다는 필연에 가깝죠. 아무리 QA 팀이 많아도 수십만의 게이머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버그가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많이 발견됩니다. QA팀이 한 명 뿐이었어도 이 정도 버그가 나오는 건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말입니다.

5명의 적을 처치하는 미션에서 적들이 몽땅 사라져 진행이 막히는가 하면, 이미 해금을 완료한 장식품이 다시 잠겨있기도 합니다. 멀티플레이 도중 튕기는건 당연한 일이고, 그렇게 튕기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지만 영웅이 복제되어 수가 늘어납니다. 4인 플레이가 한도인 게임에서 세 명의 블랙 위도우와 두 명의 헐크가 난동을 피우곤 합니다.

▲ 퀸젯 바닥 내려앉을 지경

▲ 그녀의 팔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무조건 걸리는 버그도 아닙니다. 이러다 또 가끔씩은 별 탈 없이 게임이 진행되기 때문에 짜증을 내면서도 체크포인트 불러오기로 재시도를 반복하게 되죠. 3일째 되던 날, 수십번을 튕기던 친구는 36시간에 임박하는 플레이 타임에도 불구하고 환불 신청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또 됐습니다. 결국 하루 뒤 다시 사긴 했지만, 스팀 측도 현재 게임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있는 듯 하더군요.

폭력적으로 몰아치는 버그에 지쳐 친구들이 하나둘씩 '두고보겠다'를 선언하자, 리뷰를 써야 할 중대한 의무를 가진 저는 혼자 게임을 플레이했습니다. 어차피 매칭 시스템이 고장나서 매치메이킹은 작동조차 하지 않는 상황인데, 친구들도 없으니 AI라도 끼고 해야죠.

이 과정에서 총 네 캐릭터의 만렙을 달성했는데, 종류만 다를 뿐 혼자 플레이해도 버그는 여전히 휘몰아칩니다. 몹이 사라지고, 캐릭터가 굳고, 적이 사라지자 아군에게 망치를 휘두르는 AI 토르라던가, 갑자기 27만 미터 밖으로 사라지는 경험까지. 이 정도로 많은 버그에 시달리면서 게임을 한 적이 언제인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 아군한테 망치 휘두르지 마 멍청아

그렇다고 버그만 해결되면 끝날 문제도 아닙니다. 싱글 플레이 캠페인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게임 디자인의 문제점들이, 멀티 플레이 콘텐츠에서는 속속 드러납니다.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게임임에도 적이 워낙 강해 헐크는 딱총을 피해 숨어야 하고, 인디케이터는 바로 앞에 있는 목표물 위치도 잘못 알려줄 정도로 엉망진창입니다. 맵이 넓은 편인데 맵 기능은 아예 존재하지 않아 길을 외워서 가야 하죠.

편의성 측면에서도 문제점은 한둘이 아닙니다. 카말라나 헐크는 문을 부숴서 열고, 아이언맨과 블랙 위도우는 해킹으로 잠긴 문을 열 수 있지만 어벤져스의 대장 캡틴은 힘도 약하고 컴퓨터도 문외한이라 문을 아예 못 엽니다. 아마 전기로 작동해서 그런가 봅니다.


어찌어찌 얻는 아이템은 옵션의 기준이 없어 중구난방인데다 저급의 아이템이 고급 아이템보다 더 강한 경우도 있죠. 이건 '앤섬'에서 봤던 문제 같습니다. 더 쓰자면 더 쓸 수도 있지만, 다 쓰다간 인벤 역사상 최장 리뷰를 큰 폭으로 경신할게 뻔하니 이쯤만 말하겠습니다.

몇 번 말했지만, 게임 자체는 정말 재밌습니다. 폐지줍기고 파밍이고 결국 그 모든 것을 수행하는 과정은 '전투'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며, 이 게임의 전투 자체는 정말 재밌습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개발사인 크리스탈 다이나믹스는 툼레이더 리부트 트릴로지에서 AAA급 콘솔 게임 개발력을 유감없이 드러냈지만, 멀티플레이에 대한 무지를 이 작품을 통해 드러냈습니다. 그러니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부분이 싱글 캠페인이겠죠.


어벤져스! 잠시 대기!

하지만, 이 게임에서 정말 화가 나는 점은 버그투성이 미완성 게임이라는 점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 뿐이면 빠르게 손절하면 그만이겠죠. 콘솔 버전은 어쩔수 없지만 PC판은 36시간을 하고도 환불받은 친구가 있으니 가능할겁니다. 정말 화가 나는 점은, 이 문제투성이 게임이 재미있다는 겁니다.

이번 리뷰를 쓰면서, 어쩌면 이것이 오늘날 게임 산업을 이끄는 트렌드인 'IP의 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말을 더하고 뺄 것 없이 지금 게임의 상태는 완전한 개판 그 자체입니다만, 전투가 재미있고 그 전투를 실행하는 캐릭터들이 내가 좋아하는 마블의 캐릭터들이라는 그 두 가지 점 때문에 욕하면서도 게임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명백히 현 시점에서 이 게임은 미완성 게임인데다 돈내고 하는 베타테스트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이 점수로 재밌기도 힘든데 그 어려운걸 해냅니다. 크...

개발사 측에서도 버그의 심각성을 알고 있고, 일주일에서 열흘 사이에 패치를 통해 고치겠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려서 다 고쳐질 거란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확인된 버그만 수천 건이고, 지금도 한 판에 두 세번씩 버그를 보는 상황에서 그걸 다 고칠 정도의 개발력이면 어벤져스는 고티를 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 어벤져스의 메타크리틱 점수는 60점대까지 떨어진 상황이죠.

비교적 다행인 점이라면, 게임의 근본이 썩어버려 미래를 기대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라는 겁니다. 크리스탈 다이나믹스는 게임 출시 이전부터 무료 DLC를 통해 새로운 영웅과 콘텐츠 추가를 약속했고, 이 게임의 콘텐츠 플로우는 성장 과정을 끝도 없이 이어가는 수직적 배치가 아닌, 많은 영웅과 콘텐츠를 수평으로 배치해 승부를 보는 '워프레임'식입니다. 꾸준히 콘텐츠가 추가되고, 버그와 매치메이킹 시스템이 정돈된다면 충분히 오래 플레이할 잠재력은 가진 게임이라 볼 수 있죠. 일단 게임의 기반이자 뿌리인 전투는 재밌으니까요.

하지만, 출시 시점이 게임 완성도에 비하면 너무 일렀고, 이미 출시가 되어버린 현재 게임의 성패는 시간과의 싸움으로 변했습니다. 출시 특수를 보고 온 게이머들이 실망하고 죄다 떠나버리기 전에, 어떻게든 마음을 돌릴 업데이트와 패치로 이들의 발을 잡아끌어야 합니다.

▲ 근시일 내 추가 예정인 활잡이

'앤섬'은 그 부분에서 실패했습니다. 앤섬도 전투 시스템이나 애니메이션 등은 퍽 쓸만했습니다만, 무언가를 보여주기 전에 유저들이 죄다 떠나버려서 더 전진할 동력을 잃었습니다. 어벤져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게임을 안정화시키지 못해 게이머가 대거 떠나버린다면, 그때가 되서 새 콘텐츠와 수정 패치를 남발한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일 겁니다. 무엇보다 빨리 게임을 고쳐내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죠.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마블의 팬들이라면 누구나 이 게임을 기다렸을 것이고, 다른 영웅들과 함께 적들을 분쇄하는 쾌감을 즐기고 싶으실 겁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웅장한 BGM과 함께 '어벤져스! 어셈블!'을 외쳐줘야 할 캡틴의 입술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 어셈블을 외쳐줘요 미국대장!

게이머층이 완전히 이탈해서 개발 동력을 상실하지 않는 이상, 언제라 특정할 수는 없지만 결국 괜찮아질 겁니다. 아마 그 때가, 여러분이 '어셈블'할 시간일 겁니다. 그러니, 혹시 아직까지도 이 게임을 살지 말지 고민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잠시 참으셔도 좋습니다. 요즘은 자택 대기가 미덕인 시기이니, 조금만 참읍시다. 게임이 좀 제대로 될 때까지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