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을 넘게 달려온 2020 아프리카TV 철권 리그(이하 ATL)가 지난 20일 그랜드 파이널을 마지막으로 대망의 막을 내렸다. 2020 ATL 시즌 1~3 파이널에서 차례로 우승을 차지한 '무릎'-'울산'-'로하이'의 삼파전이 예상된 것과 달리 많은 이변이 벌어졌던 그랜드 파이널. 그리고, 2020년의 마지막 순간에 웃은 선수는 바로 'JDCR' 김현진이었다.

"아쉬움이 남는 한 해였다"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JDCR'이 가장 먼저 꺼낸 말이다. 그 무엇보다 좋아했던 철권을 생업으로 삼고 10년이 넘도록 외길을 걸어온 'JDCR'이지만, '코로나19' 이슈가 전 세계를 강타한 올해만큼은 많은 고충과 고민이 있었다고 한다.

"철권 월드 투어(이하 TWT)가 취소된 것이 아무래도 가장 크다. 2017년부터 꾸준히 참가하며 한 해를 보내던 행사가 갑자기 사라지니 당장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오프라인 대회가 줄어들며 격투 게이머로서의 활동이 크게 제한되고, 스폰서나 팀을 찾는 일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2020 ATL 그랜드 파이널에서 우승하며 마무리만큼은 잘 된 것 같다.

또 이번 우승을 축하해 주신 분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아서 놀랍고 감사하다. 올해는 대회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았지만, 그랜드 파이널만큼은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또 대회에 앞서 응원도 정말 많이 받았는데, 나를 계속 지켜봐 주시는 팬분들 덕에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스스로 밝힌 것처럼 올해의 'JDCR'은 꽤나 부진했다. 2020 ATL 시즌2에서 우승-준우승을 각각 1회씩 기록한 것 외에는 최상위권 입상에 모조리 실패했다. 콘솔로 진행하는 오프라인 무대가 익숙한 그에게 PC 온라인 무대는 상당히 생소했다고 한다. 또한 일정 기간마다 대규모 밸런스 패치가 진행되는 철권7에서 캐릭터 선택의 방향성을 제대로 잡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TWT 취소 발표 이후 ATL이 투어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런데 PC 스팀 버전으로 대회가 진행되는 것에 대해 자신감이 정말 없었다. 온라인 경기는 평소에 내가 해왔던 오프라인 경기와 느낌이 전혀 다르니까. 그래서 2020 ATL 시즌1 당시엔 나 스스로에게 반신반의하며 참가했다. 시즌1을 통해 내 경험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고, 컴퓨터 세팅과 마음가짐을 제대로 준비해서 시즌2에 임하고 첫 우승을 기록했다.

이어진 2020 ATL 시즌3는 철권 시즌 패스 4로 진행됐는데, 주력으로 사용해온 드라그노프와 아머킹이 별다른 버프를 받지 못해 그대로 약하더라. 개인적으로 큰 실망을 하며 주변 선수들이나 팬분들과 캐릭터 선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보니 맘이 흔들려서 이런저런 캐릭터를 사용하고 스타일도 바꿔보고 하다가 부진을 겪었다. 너무 많은 고민이 나를 덮었다고 해야 할까."

"그랜드 파이널 퀄리파이어가 확정되고 나서는 캐릭터를 바꾸기로 마음을 정했다. 드라그노프나 아머 킹은 대회용 캐릭터가 아니라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두 캐릭터는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준 소중한 캐릭터들이고, 성능이 좋지 않다고 놓아버리기엔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 그러나 최고의 선수들이 모이는 그랜드 파이널 무대에선 밀릴 것이 뻔했기에 이러한 생각이나 고집을 버리기로 했다.

새롭게 고려한 캐릭터들은 기스, 리로이, 파쿰람, 마스터 레이븐이었다. 준비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단기간에 연습을 마치고 성과를 낼 수 있는 강한 캐릭터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스터 레이븐은 내 플레이 스타일은 어울리지만 숙련도가 많이 필요해서 탈락. 기스는 다른 선수들의 내성이 높아서 탈락. 리치가 짧은데 공격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리로이는 나와 안 맞을 것 같아 탈락.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게 파쿰람이었다. 시즌 패스3에서 나오자마자 많이 플레이하기도 했었고, '썬칩' 선수와 여러 방법으로 연습하며 자신감을 붙였다"



'JDCR'의 그랜드 파이널 첫 상대는 올해 수많은 우승 커리어를 쌓으며 절정의 기량을 뽐내는 '울산' 임수훈이었다. 그러나 'JDCR'은 파쿰람으로 보란 듯 세트스코어 2:0 완승을 거뒀고, 다음 상대였던 '무릎' 배재민까지 2:0으로 꺾었다. 이어진 승자조 결승에선 '머일' 오대일의 기스를 상대로 '패패승승승' 역스윕을 기록하며 최종 결승에 올랐다.

"난 '울산'-'무릎' 선수가 사용할 캐릭터와 플레이 스타일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반면 두 선수는 내 파쿰람 픽은 예상했어도 플레이 스타일까지는 알지 못했을 거다. 그 부분을 이용하고 싶어서 내 수비적인 이미지와는 반대로 공격적인 운영을 펼쳤고, 다행히 그게 잘 통한 것 같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시즌 패스4 업데이트로 한일전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엔 파쿰람을 사용하는 선수가 거의 없어 참고 자료가 부족했다. 그런데 최근 '울산' 선수는 '겐' 선수의 파쿰람과, '무릎' 선수는 '치쿠린' 선수의 파쿰람과 개인 방송을 켠 채 대전을 진행했다. 그 영상을 반복 재생하며 양 선수의 플레이를 분석했고, 이것이 경기를 준비하는 데 가장 많은 도움이 됐다"

"'머일' 선수와의 경기는 아직도 생생하다. 5판 3선승제여서 기회가 많다는 생각에 느슨하게 게임을 했던 것 같다. 1세트에선 선수로서 당하면 안 되는 기술에 당해 패배하는 뼈아픈 실수를 했다. 이어 2세트까지 내주고 세트스코어 0:2가 되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 이후 기스에게 굳이 공격적으로 할 필요도 없고, 캐릭터 상성도 좋고, 내성도 있으니 수비적으로 천천히 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완급 조절을 한 게 잘 통했다"



'JDCR'의 결승 상대는 매 시즌 파이널마다 그랬듯 패자조를 뚫고 부활한 '무릎'이었다. 어김없이 스티브를 꺼낸 '무릎'은 1차전에서 세트스코어 3:0 승리를 거두며 브라켓 리셋에 성공했다. 하지만, 'JDCR'은 최종전에서 전혀 흔들리지 않은 채 '무릎'을 압박하며 역으로 3:0 완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다. 감격의 우승을 차지한 'JDCR'은 세리머니에서 살짝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최종 결승 1차전 1세트에서 유리했던 게임을 내주고 '망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0:3으로 패배하며 내 파쿰람은 여기까진 것 같았다. 소위 말하는 '짬'이 익숙한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부족하다 보니 승리 플랜이 전혀 안 떠오르더라. 그래도 멘탈은 꽉 잡았고, 카운터를 방지하기 위해 조금 더 신중하게 플레이하기로 마음먹은 채 최종전에 돌입했다.

이상하게 그날은 긴장이 안 됐다. 큰 기술을 사용하기 무서워 계속 참다가 패배하느니, 긴장하지 말고 준비한 대로 사용하자는 생각을 하며 과감하게 내질렀다. 내 성향에는 잘 맞지 않는 기술과 행동들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무릎' 선수에게 먹힌 것 같다.

또 이번 우승의 밑바탕엔 회색 후드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대회에 출전할 때면 회색 후드를 즐겨 입었다. 게임이 잘 안 풀릴 때 모자를 쓰면 왠지 모를 안정감이 느껴지니까(웃음). 언제부턴가 대회에 나갈 때도 회색 후드를 잘 입지 않게 됐는데, 이번 그랜드 파이널 경기 당일 아침에 입을 옷을 고르는데 회색 후드가 눈에 딱 띄더라. 이걸 입고 간 것도 멘탈을 유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눈물의 의미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지금까지 10년 넘게 선수 생활을 하며 우승을 꽤 많이 해봤는데, 눈물이 나온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나 스스로 이번 그랜드 파이널에 많은 것을 걸었던 게 아니었을까. 또한 지금까지 다른 캐릭터들로 겪어온 고통을 비롯해 주변인들의 현실적인 조언, TWT에 참가하지 못한 아쉬움, 격투 게임 프로게이머로서의 고민 등 쌓여왔던 많은 것들이 떠오르고 해소되며 복잡한 감정이 몰려온 게 아닐까"



올 한 해 철권 e스포츠는 그야말로 '무로울'의 전성시대였다. '무릎'-'로하이'-'울산'이 ATL을 비롯한 각종 철권 대회의 최상위권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JDCR' 역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며 세 선수를 존중하는 입장을 내비쳤다. 그러나 한편으론 현재 철권7의 캐릭터 밸런스에 대한 아쉬움도 표했다.

"올해 철권 온라인 대회가 상당히 많이 개최됐는데, 모든 대회에 집중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쉼 없이 열리는 대회에 연습이나 집중이 잘 안될 수도 있고, 사적인 약속이나 각종 스케줄로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성적을 내는 세 선수 모두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또 온라인 대회 특성상 아마추어 고수를 만나 예선에서 허무하게 탈락할 수 있는데, 세 선수는 그렇게 당하는 일이 많이 없는 것 같아 신기하다"

"다만 현재 철권7의 캐릭터 밸런스는 다소 아쉽다. 재밌고 좋아서 시작한 게임인데, 대회에서 입상하려면 애정이 있는 캐릭터를 사용하기보다 그저 강한 캐릭터를 사용해야 한다. 만약 내가 대회에서 드라그노프, 아머 킹, 헤이하치를 사용한다면 그 대회는 내게 별 의미가 없다는 뜻일 거다(웃음)"


한편, 올해 'JDCR'은 활발히 개인 방송과 유튜브 활동을 이어왔다. 이미지와 달리 개인 방송에서의 'JDCR'은 하이 텐션을 유지하며 팬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많은 즐거움을 줬다. 또한 'JDCR'의 방송에는 유달리 많은 외국 시청자가 모이는데, 이는 2009년부터 국제 대회에 꾸준히 참가하며 이름을 알린 덕분이다. 유창한 영어 실력은 덤으로.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고 재밌는 사람도 아니다 보니, 방송을 처음 할 땐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아예 모르겠더라. 그런데 방송을 몇 번 하니까 채팅창에서 장난을 치는 팬분들이 생기고, 그런 걸 받아주며 자연스럽게 텐션이 올라간 것 같다. 내 방송의 본질은 철권 실력을 보여드리는 것보다 팬분들과 소통하는 것이다. 주변인들도 방송할 때 너무 진지할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해줬고, 또 내가 유일하게 보는 '전띵' 선수의 방송을 통해서도 많이 배웠다.

또 외국 팬분들께 정말 고맙다. 내 채널에 찾아오는 것부터 쉽지 않을 텐데, 꾸준히 들어와 채팅으로 응원해 주시는 것에 많은 도움이 된다. 현재 한국 팬분들과 외국 팬분들 비율이 절반 정도인 거로 아는데, 두 그룹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소통하고 재밌는 컨텐츠를 만들겠다"



처음부터 철권을 생업으로 삼으려 하진 않았다. 단지 오락실에 사람들이 모이고, 경쟁하고, 어울리는 그런 문화가 좋아서 열심히 한 거다. 그러나 철권도 온라인이 주력이 되며 그때의 감성과 재미를 느낄 수 없게 됐다. 그 시절이 많이 그립긴 하지만 당연한 시대의 흐름이라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한다. 언제든지 편하게 철권을 할 수 있다는 확실한 장점도 있으니까.

선수들은 철권을 연습하고 대회에 참가하는 게 스스로를 증명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건데, TWT가 취소되며 그런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도 올해 ATL과 레벨업을 비롯한 철권 대회가 꾸준히 개최되어 정말 다행이었다. 지속적인 것이 중요한 최근 시점에서 선수들에게 꾸준한 동기 부여가 되고 의지를 태울 수 있는 정기 리그를 만들어 주신 모든 관계자 여러분과 시청해주신 팬분들께 감사드린다.

어느덧 무소속으로 활동한 지 1년이 넘었다. 사실 올해 초 이야기를 나눈 프로 팀이 있었는데, '코로나19' 이슈가 악화되면서 무산됐다. 아무래도 팀 소속으로 활동해야 선수로서의 재미와 열정이 긍정적으로 살아나고, 확실히 책임감도 생기는 듯하다. 경제적인 지원 말고도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프로 팀 활동을 열심히 하고 싶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향후 목표를 묻자 'JDCR'은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답변을 전했다. 자신은 어제보다 더 나은 '성숙한 게이머'가 되고 싶다고. 팬들을 향한 마지막 인사와 함께 남긴 'JDCR'이 생각하는 성숙함은 다음과 같다.

"예전엔 프로게이머의 목표라면 단순히 강해지는 것, 잘해지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30대에 들어서며 보다 성숙한 사람, 성숙한 게이머가 되고 싶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게임을 더 진지하게 대하고 여러 방면에서 바라보고 싶다는 거다. 게임을 하며 어느 부분에서 내가 잘하고 못했는지, 그 부분이 왜 좋았고 왜 싫었는지 따위의 것들을 깊게 고민하고 개선할 수 있도록 말이다. 또한 인게임만이 아닌 게임 외적으로도 좋은 철학을 갖추고 철권 유저들의 모범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마지막으로 늘 응원해 주시는 팬분들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20년의 마지막 순간 가장 크고 중요한 무대에서 우승을 기록해 매우 기쁘고, 많은 도움을 준 '지상'-'썬칩'-'전띵'에게도 정말 고맙다. 내가 소고기 쏜다!"


사진 : 'JDCR' 제공, 아프리카TV 철권 리그 공식 중계 화면 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