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전래 동화와 같은 게임이 하나 있습니다. 아, 다만 그저 따스하고 교훈을 주는 그런 전래 동화는 아니에요. 어딘가 으스스하고 때로는 무겁기도 한 그런 전래 동화죠. 한편으로는 마치 전설의 고향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그런데 참 재밌는 건 이 너무나도 한국적인 게임이 한국에서 개발한 게임이 아니라는 점이죠. 조선 시대가 배경이고, 주인공 유리는 무과에 급제한 청년이며, 사또도 등장하고 대감마님도 등장하며 곱디고운 한복과 단아한 한옥들도 여기저기 보이지만 이 게임을 제작한 건 다름 아닌 프랑스 인디 개발사인 노 모어 500입니다.

게임명: 수호신
장르명: 비주얼 노벨
출시일: 2022.4.14
개발사: No More 500
서비스: No More 500
플랫폼: PC



정말 한국적인 (해외 개발사의) 게임

이를 모르고 그냥 플레이하면 한국이 아닌 나라에서 개발했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국적인 완성도가 높습니다. 완벽하다고 할 순 없지만 어디까지나 창작물이고, 이 정도면 어지간한 드라마나 영화, 장르소설 등에 비교해도 절대 부족하지 않은 수준이죠.

▲ 빨간색으로 표시된 단어들은 용어 설명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건 당연하겠지만 한국의 전통 요소를 '한국'의 것이라고 알려주는 부분입니다. 굳이 억지스럽게 '설명'한다는 느낌보다는 게임의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보가 따라나옵니다.

주인공과 친구들이 주막에서 막걸리와 수정과를 마시며 삼계탕을 먹기도 하고, 때로는 국밥을 먹기도 하죠.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주막이 식당과 주점을 역할을 동시에 하며, 사람들과 웃고 떠들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정보를 얻게 됩니다. 여기에 더해 수정과는 한국의 전통 음료, 막걸리는 전통 술, 삼계탕과 국밥은 오래전부터 먹던 음식이라는 것 역시 알 수 있고요.



▲ 재질이 느껴질 정도로 섬세하게 표현된 한복

뿐만 아닙니다. 한복의 경우를 볼까요.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입고 있던 한복이 피에 젖었다는 문구를 통해 게임의 주요 사건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기도 하고, 등장인물마다 서로 다른 색색의 한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꾸준히 보여주기도 하죠. 그리고 인물들이 입고 있는 한복은 그 재질이 느껴질 정도로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신분에 따라 복식이 변경되거나 그 화려함의 수준이 달라지기도 하죠.

게임 내 주요 아이템으로 노리개가 등장하는 것 역시 참 독특하고도 놀라운 설정입니다. 우리가 한국인이기에 자연스레 넘어갔던 부분이나, 오히려 그 반대로 너무 깊게 설명하고자 하는 부분을 수호신은 균형을 잘 맞추면서 녹여냈습니다. 그리고 게임에서 설명하는 것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인게임에서 키 하나만으로 아주 쉽게 용어 사전을 확인할 수도 있죠.



그저 한, 중, 일의 문화를 다 섞어내 동양적, 동양풍이라고 설명하던 대부분의 외국 게임과 달리 수호신은 정확히 한국적인 게임입니다. 조선이라는 배경을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한양이나 동래와 같은 옛 지명이 꾸준히 등장하고, 사건이 일어나는 주요 지역인 양동 역시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경주 양동(良洞)마을과 같은 한자를 사용하거든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과 같이 장승이 등장하는 들판을 비롯해 신분에 따라 그 화려함이 달라지는 등장인물들의 집 내부, 기와집이 늘어선 양반촌, 일러스트만 봐도 그 왁자지껄함이 단박에 떠오르는 시장의 모습 등 배경 역시 깔끔하면서도 꼼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일러스트만큼이나 눈에 띄는, 아니 귀에 들어오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게임 주요 장면에 깔리는 배경 음악들이죠. 주연 인물 중 하나인 수아가 치는 장구 소리가 멋들어지게 나오기도 하고, 음악마다 전통 악기의 소리가 많이 들려오거든요.



▲ 인물들의 집은 모두 다르게 그려진다



(평범한) 멀티 엔딩 게임인 줄 알았죠?

수호신이라는 게임 자체는 아주 전형적인 비주얼 노벨입니다. 엔딩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몇 가지로 나뉘어 있고, 미스터리와 스릴러, 추리가 섞여 있죠. 하지만 직접 수사하거나 오브젝트를 클릭하는 등 실제 추리물로서의 조작 자체는 아예 없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오직 진행을 위해 대화문을 클릭하거나, 질문을 위해 대화문을 선택하거나, 정말 가끔 등장하는 엔딩을 위한 주요 선택지를 고르는 기본 조작만 제공됩니다.

정말 비주얼 노벨, 즉 비주얼을 결합한 소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숨겨진 이야기나 선택지에 따라 나뉘는 분기들이 나름 치밀하게 엮여 있습니다. 한 번의 엔딩을 본 뒤 새롭게 나타나는 선택지가 생기기도 하고, 그에 따라 처음 플레이할 때는 아예 확인할 수 없던 새로운 이야기가 이어지기도 하죠.

초반에는 답답하게, 아니 한 대 때리고 싶을 정도로 정말 아주 매우 답답하게 느껴지던 주인공의 행동이나 겉핥기식 스토리 전개 등이 새로운 분기가 생겨남에 따라 조금씩 풀려갑니다. 마치 양파 같달까요. 새로운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범인에 대한 정보, 마을의 비밀 등이 좀 더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 스토리를 진행하다 보면 숨겨졌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건, 이 게임이 그저 단순한 멀티 엔딩 스토리 게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얼핏 본다면 그저 여러 엔딩을 가진 스토리 게임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그 모든 엔딩이 하나의 큰 줄기로 이어지죠. 수호신이라는 게임 전체가 하나의 큰 이야기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그 전개 과정에서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정확한 설명을 할 순 없으나,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요소를 활용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냥 뻔하고 답답하고 평범할 수 있었던 이야기를 꽤 흥미롭게 비틀어냈죠. 이 과정에서 잠깐잠깐 지나갔던 힌트들도 빠짐없이 다 이야기에 풀어냅니다.

초중반까지는 그저 한국적 요소를 보여주면서 끝나겠구나 싶었던 게임이 짜잔 깜짝 놀랐지? 라며 반전 요소를 보여주는 느낌이랄까요. 다만 그 흥미 구간까지 가는 과정이 아주 재미있지는 않습니다. 등장 인물 자체가 많지 않고, 선택지도 많지 않은 편이라 직접 간섭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적기 때문이죠.

▲ 저도 잡고 싶은데 그게 말이죠

평범한 비주얼 노벨은 조작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에 결국 스토리와 등장 인물들의 매력이 게임의 모든 걸 좌지우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 물론 보여지는 비주얼 역시 당연히 중요합니다. '비주얼'+'노벨'이니까요. 여튼, 오직 클릭과 아주 가끔의 선택만으로 몇 시간에 걸쳐 흥미롭게 게임을 플레이, 아니 보려면 재밌어야 합니다. 클릭하고 있는 손가락이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빠져들 만큼 매력적이고 몰입감 넘치는 이야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수호신은 아쉽게도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아 미끄러지는 내리막길까지 가는 구간이 너무 평범합니다. 그래도 오르막을 구불구불하게도 가보고, 계단도 타보고, 평지도 한 번 갔다가 한숨이 날 정도로 높은 경사도 한 번 겪어봐야 지루하지 않을 텐데, 그저 같은 경사의 쭉 뻗은 길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반전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혹은 그 반전을 좀 더 극적으로 선보이기 위함이었다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무려 첫 번째 엔딩을 보는 순간까지 주인공 유리는 주요 힌트조차 찾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이고, 사또는 화만 내고 있죠. 첫 엔딩이 뜬 뒤에 혼자 아니 그래서 뭔데?를 외칠 정도였달까요.

▲ 하이라이트 구간부터 엔딩까지는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수호신은 조선을 배경으로 한 한 편의 전래 동화나 설화와 같은 게임입니다. 그중에서도 마치 장화홍련전과 같이 마냥 밝지만은 않은 그런 분위기를 풍기죠. 미스터리 스릴러보다는 그런 비극적 요소를 포함한 한국 설화를 게임으로 풀어냈다고 보는 게 더 맞을 듯합니다.

그런 만큼 조작거리가 많은 최근의 비주얼 노벨이나 직접 머리를 써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추리물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엔딩에 결과를 미치는 선택지도 아주 적은 편이고, 개발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 달려간다는 느낌이 강하거든요.

하지만 완성도 높은 아트와 사운드, 한국적인 분위기와 배경을 잘 살린 스토리 등은 분명 이 게임의 특장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한국의 전통문화와 관련된 무려 37개의 용어를 하나하나 설명해놓은 부분은 정말이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참 좋더군요. 당연하게 한국의 것을 한국의 것이라 소개하는 그 부분이 말이죠.

▲ 한복: 한국의 전통의상을 칭하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