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 평소처럼 트위터를 보다가 충격적인 글을 발견했습니다.


"e스포츠계 이슈가 되고 있는 블리자드의 신작 게임 저작권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관련법 제정을 시사했다. e스포츠진흥법에는 공공재 성격의 게임은 저작권 문제 없이 자유롭게 e스포츠 종목으로 육성 발전시킬 수 있는 조항이 삽입돼 있다."


다른걸 떠나서 '저작권 문제 없이 자유롭게'라는 문구는 섬뜩한 느낌까지 들기도 했습니다.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것일까요? 더군다나, 어제 유인촌 장관이 e스포츠 중장기 발전계획을 발표한 자리에 저도 분명 있었기 때문에 더욱 의아스러웠습니다.


"도대체 이게 어디서 나온 말이지?"


회사에 도착해 출처가 어딘지 막 찾던 중, 평소에 알고 지내던 다른 매체의 기자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어제 행사 취재를 갔다 온 자신의 동료 기자는 위 글에 대해 전혀 들은 것이 없다고 하는데, 혹시 알고 있는 게 있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저라고 없었던 걸 기억할 수가 있나요. 기가 막혔습니다.


일단, 어제 행사때의 일을 하나씩 떠올려 보겠습니다.


어제(8일) 오후 유인촌 문화부장관은 서울, 용산 e스터디움에서 게임전문방송 온게임넷을 통해 생방송으로 진행된 가운데 e스포츠 재도약을 이루기 위한 e스포츠 중장기 발전계획을 발표했습니다.



▲ e스포츠 중장기 발전계획을 발표하는 유인촌 문화부장관




행사가 끝난 후 매채 기자를 대상으로 미리 예약된 식당에서 간담회를 한다는 공지가 있었습니다. 식당에 가보니 유인촌 장관은 이미 다른 약속이 있어서 떠났고, 문화부의 유병한 실장이 기자들의 질문을 응답을 해주었습니다.


워낙 e스포츠 중장기계획이라는 것이 제목처럼 장기적인 계획에 치중되어 있었고, 모호한 부분이 다소 있었기 때문에 특정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원하는 몇 가지 질문이 오갔습니다.


그러던 중, 기자 한 명이 "지금 중장기 계획보다는 블리자드의 스타크래프트에 대한 지적재산권에 대한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지 않나. 블리자드 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유병한 실장은 잠시 고민하다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 유인촌 장관을 대신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했던 유병한 문화부 실장




"현재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데, e스포츠 협회와 블리자드가 생각하는 바가 달라서 갈등을 빚어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저작권 문제는 민간 계약의 문제다. 어쨌건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기대한다. 정부는 당사자들의 합의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단, 정부에서는 앞으로 이런 상황이 자주 발생하지 않도록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자 한다. 근본적인 해결법을 위해 '법'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정부에서는 다양한 분쟁조정위원회를 운영 중인데, 저작권 문제를 둘러싼 분쟁도 분쟁조정위원회와 연계해서 처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출 생각이다."



처음에 소개했던 글과는 그 의미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사실 이것이 왜 블리자드를 타겟으로 한 법이라는 일명 ‘블리자드 법’으로까지 둔갑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답변 중의 '법'의 의미를 유추해서 해석한다고 해도, 그 거리가 너무나 멀어 보입니다.



유인촌 장관과 문화부가 발표한 e스포츠 중장기 계획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는 합니다.


"문화부는 e스포츠와 관련해서 향후 다양한 권리관계에 따른 분쟁에 대해 체계적인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e스포츠 분쟁조정 협의체를 구성 운영할 계획이다. e스포츠 및 법률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하여, 지적재산권 등 e스포츠 관련 분쟁을 조정하는 거점을 마련하게 된다.

또한 e스포츠와 게임산업 양측 모두 상생할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공정한 e스포츠 지적재산권 표준 가이드라인을 개발 보급하여, 불필요한 갈등을 해소하고 상호협력관계를 조성해나간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e스포츠 종목으로 선정된 게임을 저작권 문제 없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공공재'라는 단어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래서, 제가 직접 문화부 게임컨텐츠산업과에 전화로 문의를 했습니다. 돌아온 답변은 역시나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전달된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와전된 것일까요?


이리저리 조사한 결과 결국 소스를 하나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작년 5월 허원제 국회의원이 대표로 발의했던 'e스포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안)'이었습니다.


e스포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은 e스포츠산업기반의 조성과 경쟁력 강화 및 진흥을 위해 법률적, 제도적 기반을 만들자는 것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사실 e스포츠산업을 진흥하자는 일반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논란이 되는 조항이 몇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아래의 조항입니다.


제12조(이스포츠대회의 육성, 지원 등) ①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문화체육관광부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따라 이스포츠대회를 육성, 지원할 수 있다. ② 공표된 게임물은 이스포츠대회의 종목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 경우 해당 게임물의 출처를 명시하여야 한다.



얼핏 보기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구체적인 조항이 더 없기 때문에 일단 '공표된 게임물'이기만 하면 e스포츠대회의 종목으로 사용할 수 있고, '출처만 밝힌다면 문제될게 없다.'라고도 해석될 여지가 있었습니다.


실제로도 작년 9월 24일 이 법률은 소관위인,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에 회부, 상정되어 심사를 받았었지만 아래와 같은 이유 등으로 인해 통과되지 못하고 아직도 계류 중입니다.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의 검토의견

제정안에서는 공표된 게임물을 이스포츠대회의 종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이 경우 출처를 명시하도록 규정하고 있음.


이는 해당 게임물의 출처만 명시하기만 하면 이스포츠대회를 주관하는 자가 저작권자의 허락이 없이도 당해 저작물 사용이 가능하게 되므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함.


즉, 이스포츠 대회를 주관하는 자가 그 게임물을 이용하여 입장료, 중계권 수익, 선수 및 구단을 활용한 사업 수익 등을 창출하는 경우에도 해당 게임물 저작권자는 자신의 개발한 게임물을 통해 창출된 정당한 부가가치(수익)을 확보하지 못할 수 있고, 이로 인해 게임물 저작권자와 대회주관사간 저작권 관련 분쟁 발생의 소지도 있을 것으로 보임.


이와 관련하여 정부가 제출한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전부개정법률안’에서는 이스포츠대회가 비영리 및 반대급부 미취득을 전제로 한 경우에 한하여 공표된 게임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음.




여기서 지적재산권 혹은 저작권 문제에 대한 당시 소관위의 입장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언급한 정부의 게임법 개정안(2008년 11월 제출)에서는 '비영리 및 반대급부 미취득을 전제로 한 경우에만' 공표된 게임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고 했는데 이 법률 조차도 소관위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고 아직도 계류 중입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 이스포츠 진흥에 관한 법률안]




제가 내린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어제 문화부가 발표한 1) 'e스포츠 중장기 발전계획의 일부'와 2) '문화부 유병한 실장의 답변', 그리고 작년에 발의되어 저작권 침해 문제 등의 이유로 계류중인 3) 'e스포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 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해석되고 왜곡되어,

우리 정부와 국회가 마치 외국기업인 블리자드를 타겟으로한 법률을 제정해서 특정 게임을 공공재 성격의 게임으로 공표, 저작권 문제 없이 이스포츠 종목으로 쓸 수 있게 하겠다는 정책을 시사한 것처럼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건 분명히 잘못된 정보입니다.


추후 이 법이 실제 현실화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상식적으로 이런 법이 무사히 통과될 리도 없거니와 e스포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이 소관위의 심사를 받았을 때의 회의록을 읽어보면 국회의원들이 얼마나 저작권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용경 의원은 그 자리에서 문화부 관계자에게 저작권에 대한 선진 트랜드도 파악하면서 정책을 수립해달라는 부탁을 할 정도였습니다.

▶ e스포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에 대한 소관위의 회의록


스타크래프트를 둘러싼 블리자드와 케스파간의 저작권 분쟁이 아직도 끝을 맺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대한민국 e스포츠산업의 발전을 원한다면 더 많은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사실 전달에는 좀 더 신중을 기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