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딱 두 달 전 6월 24일 블리자드는 대한한공 격납고에서 스타크래프트2(이하 스타2) 미디어 데이를 개최하고 한국에서의 스타2 가격정책 및 대한한공과 연계된 마케팅 프로모션에 대한 발표를 했습니다.


WoW를 결제해서 플레이 하는 유저들에게는 스타2도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있었지만, 저에게 그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한국에 오직 ‘디지털 다운로드’ 방식으로만 판매한다는 블리자드의 발표였습니다. 오래 전부터 PC게임 패키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애정이 있었던 사람으로서 슬프기도 했습니다.


혹자는 대한민국이 불법복제의 온상이기 때문에 패키지를 발매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다운로드 방식이든 패키지 방식이든 어차피 클라이언트를 설치해서 플레이 해야 하기 때문에 신빙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럼 왜 패키지를 발매하지 않았을까요? PC방이라는 독특한 게임문화가 자리잡고 있는 상황에서 WoW와 요금제와의 연계, 그리고 69,000원의 평생요금제를 제외한 1일 2,000원, 30일 9,800원의 정액제를 고수하면서 온라인에 특화된 정책을 온라인 게임의 성지인 이곳, 대한민국에서 한번 펼쳐보고 싶었던 것이었다면 가슴은 아니지만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대한민국에서 스타2는 오로지 디지털 다운로드 방식으로만 판매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정판 패키지의 부재까지 이해할 수 있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보통 한정판 패키지는 팬 서비스 차원으로 제공됩니다. 한정판으로 부가 수익을 내기보다는 해당 개발사 내지는 해당 게임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골수 팬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선물'의 개념입니다.


일례로 작년에 발매된 PS3 액션 대작 언차티드2는 게임상에 등장하는 실제 장식용 황금도와 아트북이 들어가 있는 한정판을 돈으로 판매하지 않고 정식 출시 전 멀티데모에 열성적으로 참가했던 유저들을 대상으로 추첨해서 무료로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스타2의 한정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상으로 제공된 것은 아니지만 블리자드와 스타2의 팬이라면 정가인 99.99 달러 (한화 약 12만원 상당)가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의 선물이 한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 스타2 한정판 패키지 구성물, 팬들을 위한 종합선물세트입니다.




스타크래프트1과 확장팩 브루드워가 들어가 있는 짐 레이너 군번줄 모양의 2GB USB 메모리부터 14곡이 수록된 스타2 OST CD와 176 페이지 분량의 아트북, 개발자 인터뷰와 디렉터의 코멘트가 수록된 비하인드 스토리 DVD, 그리고 스타크래프트 코믹북과 같은 현실적인 선물도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팬심을 자극하는 것은 디지털화 된 구성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정판 독점 레이너 마린, 타우렌 마린, 나이트 엘프 밴시, 디아블로 마린으로 구성된 4종의 초상화 세트와 전용 데칼, 그리고, WoW 유저들에게 따로 떼서 판매해도 상당히 인기를 끌 것 같은 토르 펫은 블리자드 팬들에게는 축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스타2 한정판을 구입하며 획득할 수 있는 스페셜 초상화 4종과 '진정한 팬'이라는 위업
※ 이미지 출처: http://katz.egloos.com/





▲ WoW 토르 펫 동영상




하지만, 대한민국 유저는 이 모든 것을 접할 기회조차 없습니다. 패키지 자체를 판매하지 않으니 한정판도 당연히 없는 게 아니냐고요? 저는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PC 게임시장의 불황 때문에 시장 자체가 패키지에서 디지털 다운로드로 흘러가는 건 맞습니다. 그래서 이미 북미에서도 스팀을 비롯한 다양한 디지털 다운로드 서비스가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게임사들이 팬들을 위한 선물인 한정판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 EA 온라인 스토어에서 판매 중인 매스이펙트2 디지털 한정판




위 사진에서 보는 것은 EA 코리아의 디지털 상점에서 판매 중인 매스이펙트2의 디지털 한정판입니다. 실물이 아닌 디지털 한정판이기에 실물로 제공되는 상품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운드트랙, 영상, 아트북, 코믹북 등이 모두 디지털화 되어 파일로 함께 제공되어 팬들의 욕구를 채워주고 있습니다. 드래곤에이지 같은 게임에서는 디지털 한정판을 통해 추가 퀘스트를 즐길 수 있는 다운로드 컨텐츠(DLC)까지 제공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 상품이 빠진 대신에 게임 내에서 즐길 수 있는 각종 아이템들을 더 많이 제공해주기 때문에 유저들에게 이러한 디지털 한정판의 인기도 높은 편입니다. 실제로, 드래곤에이지가 첫 출시됐을 때 스팀에서는 한정판이 일반판보다 판매 순위가 더 높기도 했습니다.


스타2에는 한정판을 구입해야 달성할 수 있는 위업이 있습니다. ‘진정한 팬’이라는 이름이 위업인데요, 국내 서버에는 이 위업 자체가 구현되어 있지만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해외 배송비에 웃돈을 주면서 어렵게 어렵 게 북미 한정판을 구입한다고 해도 북미 시디키로는 국내 서버 접속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해당 위업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국내 유저들은 1차적으로 한정판을 정식으로 구입할 기회조차 제공받지 못했고, 북미에서 한정판을 구입한다고 해도 국내 서버에서는 적용할 수 없으며, 스타2에 원래 구현되어 있는 업적도 절대로 달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때 오픈마켓에 스타2 한정판이 27만원에 올라와 화제가 됐었는데요, 해외에서 구매대행으로 북미 한정판 패키지를 구입하는 것 자체가 게임법 제32조에 의하면 국내에서는 불법입니다. 그래서, 한 유저는 위업을 없애든지 아예 한정판 발매를 하든지 한 가지만 하라고 공홈에 아우성을 치기도 했습니다. 일부 유저들이 무리하게 북미에서 한정판 구입을 시도하다 그만 악덕업자에게 사기를 당한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 스타2 공식홈페이지, 한정판 발매를 바라는 한 유저가 남긴 글




그 동안 블리자드는 한국 유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항상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대답을 했었습니다. 스타2를 한국에서 최초로 발표한 것은 물론, WoW 결제하면 스타2를 무료로 할 수 있는 요금제와 대한한공과 제휴해서 이루어낸 스타2 래핑 항공기도 이런 애정의 표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픈베타가 시작된 지 한달이 지난 지금도 스타2 공홈에 한정판 판매를 촉구하는 유저들의 게시물이 꾸준히 올라고 있습니다. 스타2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만큼 좀 더 비용을 지불해서라도 특별한 것을 얻고 싶다고요. 하지만, 블리자드는 앞서 말한 디지털 한정판이라는 이미 널리 이용되고 있는 방법도 분명 존재하는데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 유저들의 이 정도 팬심이면...




저는 아직도 블리자드가 한국을 중요한 시장으로 보고 있다는 말을 굳게 믿습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의 블리자드가 보여준 행보를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번 패키지 및 한정판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접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의 블리자드가 무한한 애정을 보내는 대상은 대한민국에 거주하면서 스타2를 꾸준히 결제해주는 고객일뿐이지, 1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블리자드표 게임에 깊은 신뢰를 보내온 팬들은 아니라는 것을요.

블리자드에게 대한민국의 '진정한 팬'은 더 이상 없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