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즐길 거리는 필수적으로 몰입도 속칭 중독성을 동반하게 되는데, 게임 역시 즐길 거리의 하나이기 때문에 게임이 재미있을수록 몰입도는 증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게임이 중독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사람의 본능을 자극하는 재미가 있다는 칭찬이기도 합니다.

한국은 온라인 게임 위주로 게임 산업이 성장해왔기에 주로 온라인 게임의 몰입도(중독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만, 사실 온라인 게임 못지않은 몰입도를 갖고 있다고 평가받는 PC 게임들도 있습니다.

보통 축구 게이머들의 바이블이라는 FM 시리즈나 턴제 전략 RPG의 궁극이라는 마이트 앤 매직 영웅전 시리즈, 샌드박스류 게임의 교과서로 칭송받는 GTA 시리즈같은 게임들이 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립니다. 그런데 취향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다수의 게이머가 인정하는 중독성 게임의 원조 끝판왕(?)은 따로 있습니다.




[ 중독 게임 패러디, 그랜드 시드 마이어의 월드 오브 히어로즈 매니저 플러스 (출처:루리웹) ]



한 턴만 더!(One More Turn!)라는 단어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시드 마이어의 문명(이하 문명) 시리즈는 전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재미와 중독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제작자인 시드 마이어는 세계 3대 게임 거장의 한명으로 손꼽히는 개발자이며, "게임은 흥미로운 선택의 연속"이라는 그의 말은 수많은 게임 개발자들에게 손꼽히는 명언으로 남아있습니다.

스크린샷을 보면 별로 재미없어 보이지만 한번 시작하면 업무 보고서 대신 시말서를 쓰게 되고, 점심 먹고 마우스 잡았다가 눈을 돌려보면 새벽이 밝아온다는 바로 그 게임. 초반의 진입장벽은 사람들의 인생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악마의 게임,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의 최신작 5편이 발매되었습니다.


참고로 문명 시리즈는 구석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인류 문명의 발전사와 문명의 특징, 실제 역사에 근거한 다양한 연구 기술 등 때문에 교육용 소프트웨어로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게이머는 문명을 가르칠바에야 차라리 뛰어놀게 하라는 조언을 합니다.)


구석기에서 출발해 우주선을 쏘아 올리기까지, 인류가 지금까지 겪어온 문명의 발전을 턴제 시뮬레이션으로 표현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문명 시리즈의 최신작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을까요? 2010년 9월 24일 발매된 문명 5를 체험해보았습니다.






▷ 육각형의 헥스맵과 달라진 도시 영역


가장 먼저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육각형의 헥스맵과 도시 영역의 변화입니다.

과거의 문명에서는 도시의 문화와 경제가 발전해나갈수록 점차 세력이 커지면서 주변의 영역이 넓어졌지만, 문명 5편에서는 게임 내의 재화인 골드로 도시 주변의 영역을 바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지도에 등장하는 철광석이나 말같은 다양한 특산물들을 얻기 위해 여러 턴을 기다려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덕분에 전작에서는 새로 도시를 만들었을 경우 발전해서 주변의 영토를 얻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제 돈만 있다면 방금 정착한 도시도 상당한 크기의 영토를 얻어 빠르고 안전하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돈을 투자해서 기존의 수도와 영토를 쉽게 연결해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수동적인 방어만 했던 도시에 원거리 공격 기능이 생겨서 도시의 영역에 접근한 적들에게 원거리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군 병력을 최소화해도 야만인들 정도는 접근하기 전에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수비 병력이 필요했던 전작들보다 초반의 방어가 훨씬 쉬워졌습니다.

사각형에서 육각형으로 바뀐 맵 역시 전작에 비해 좀 더 짜임새있는 지형을 보여줍니다.

가장 효율적으로 공간을 사용하는 도형이라는 육각형으로 지형이 구성되면서 맵의 크기가 작아도 훨씬 풍부한 오브젝트들을 표현해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다양한 병력과 건물, 자원과 도시들이 오밀조밀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은 더욱 화려해진 문명 5의 그래픽을 통해 멋지게 표현됩니다.






▷ 인류 발전은 전쟁의 역사! 확 달라진 문명 5의 전투


문명의 전투도 5편으로 넘어오면서 많은 변화를 거쳤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하나의 지형에 여러 유닛을 모을 수 있었던 부대 통합 (stack) 기능이 삭제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제 한 지형에서는 하나의 병력만 존재할 수 있게 되어, 다수의 병력을 하나의 부대로 모아 이동하던 과거의 전투는 사라졌습니다. (병력을 지나 이동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의 타일에 하나의 부대만 들어오게 되면서 외형적으로도 좀 더 화려한 전투가 가능해졌습니다. 수십개의 병력을 준비해도 통합해버리면 지형에서 하나의 군대만 보이던 전작과 달리, 십여개의 병력만 모아도 화면에 가득 차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원거리 전투 역시 많은 변화를 거쳤습니다. 특히 궁병같은 경우 실제로 한 타일 너머로 원거리 공격을 수행할 수 있으며, 바다의 병력이 화살을 쏘아 지상의 병력을 공격하는 전투도 초반부터 가능해져서, 원거리 병력이 뒤에서 지원하고 방패병이 앞을 방어하는 등 좀 더 전략적인 전투가 가능해졌습니다.







부대가 전투를 거듭할수록 경험치를 얻어 강해지는 승급 시스템도 그대로 남아있으며, 고대의 궁병부터 현대의 소총병까지 역사속에 등장했던 군대 병력들이 더욱 화려하고 세밀해진 그래픽으로 표현됩니다.

과거 문명의 전투가 생산을 기반으로 한 물량싸움의 성격이 강했다면, 문명 5의 전투는 병력의 효율적인 배치와 이동 등 과거의 단순한 공격력 숫자 놀이에 비해 어느정도 전략적인 재미까지 살렸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절반의 요소가 보급이라는 말처럼, 전략적인 재미를 살렸다는 느낌은 있어도 전체적으로는 전통적인 물량 밀어붙이기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 더 풍부해진 외교 인공지능과 중립 도시 국가의 등장!


세번째로 달라진 점은 외교의 중요성과 도시 국가의 등장입니다. 전작에서도 외교는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어 주변 국가들과 외교에 신경쓰지 않고 전쟁을 벌이면 나홀로 대여섯개의 국가와 전투를 벌이게 되는 암담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물론 서로에게 이득인 외교를 별다른 이유없이 거절하거나 국력이 훨씬 낮은 국가가 상납을 요구해오는 등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형태의 외교가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주변 국가와 나쁘지않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입니다.





문명 5에서는 전작에서 더욱 발전된 인공지능으로 각 국가의 지도자들과 치열한 외교전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각국의 종교가 달라도 큰 문제없이 외교를 수행할 수 있고, 실제 게임 내의 영토 통행이나 병사 행동 등에서 좀 더 다양한 반응과 선택을 보여주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진지하면서 우스꽝스럽게 표시된 각국의 지도자들과 함께 이런 저런 외교를 시도해보는 것도 재미있으며, 전작인 문명 4에서도 외교전을 수행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카페나 블로그에 연재하는 블로거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문명 5에서도 이런 짜릿한 외교전을 지켜보는 재미는 여전할 것 같습니다.


각 문명 외에도 지형 곳곳에 중립 도시 국가가 등장하면서 도시 국가들과의 외교가 새롭게 부각되었습니다.

도시 국가들은 다른 국가들처럼 적극적으로 활동하진 않으나 전투의 도움을 요청하는 등 일종의 임무를 부여합니다. 임무를 해결해주거나 병력과 자원을 선물해서 도시 국가와의 관계를 개선시켜 나가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물론 도시국가끼리 전쟁을 선포하거나 주변의 야만인들을 공격해달라는 등 까다로운 임무가 많지만 관계를 계속 개선시킬 경우 식량이나 수입 등에 유용한 도움을 받게 됩니다. 특히 일부 사회 정책에 따라서는 특수한 NPC가 등장해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 느려졌으나 더욱 짜임새있는 발전과 문화 점수를 활용한 사회 정책의 특화


문명 5를 해보면 전작에 비해 발전 속도가 다소 느려졌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특히 영토의 구입이나 사회 정책의 특화 등 플레이어가 개입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지고 발전이나 병력을 생산하는 시기가 느려지면서 각 시대마다 좀 더 다양한 활동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문명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턴이 증가했으며, 각종 유닛의 생산 시간이 길어지고 군대 유지비나 생산 정도에만 쓰이던 골드로 영토를 구입해야 하기 때문에 자원의 배분도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사회 정책에 문화 점수를 활용한 특화 기능이 생겼다는 점도 주목해볼만 합니다.

문명 5에서는 문명의 발전에 따라 얻게 되는 문화 점수(Culture Point)를 사용해 자유주의나 전체주의 등 각 정책마다 다양한 혜택을 얻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전통 사회를 선택해 발전시킬 경우 모든 영토 구입 비용이 50% 줄어드는 군주제의 혜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문명의 발전 속도는 느려진 대신 게이머의 선택에 따라 문명의 발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각 턴을 넘길 때마다 좀 더 많은 고민과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턴을 넘기기 전에 할 일이 남아있을 경우 턴 넘기기 버튼이 남아있는 일들을 가르쳐주기 때문에 실수로 턴을 넘기는 일도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만약 한글로 나온다면, 안 사고 버틸 수 있을까?


시드 마이어가 탄생시킨 턴제 악마의 매혹은 여전히 막강한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문명의 틀을 유지하면서 더욱 화려해진 그래픽에 시리즈를 관통하는 게임성을 그대로 갖추었고, 전투와 영토 구입, 사회 정책 등의 새로운 시스템이 게이머를 손짓합니다.

문명 5의 지원 언어에 한글이 없다는 점은 아쉽지만, 문명 5를 구입한 뒤 사라질 시간을 생각하면 오히려 잘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게임 내에 등장하는 영어는 대부분 쉬운 수준이기 때문에 영어에 익숙하지 않아도 문명 5의 재미를 그대로 체험해볼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설명했지만, 결국 할 말은 딱 하나뿐입니다. 역시 시드 마이어!

시뮬레이션을 좋아하고 스스로의 인내력과 자제심을 믿고 있다면 문명 5를 즐겨보세요. 초반의 진입장벽만 넘을 수 있다면, 가격이 전혀 아깝지 않은 확실한 재미를 느껴보실 수 있습니다. 물론 문명 5를 구입한 뒤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제 탓이 아닙니다. 나 혼자 죽을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