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다양한 업계의 사람들을 만난 후에는 기자들끼리 '실제 만나보니 어떻더라' '이번 인터뷰는 이게 재미있어' 식의 후일담이 오가기 마련이고, 그날도 별 생각없이 인터뷰 체험기(?)를 듣고 있었는데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들려온 것이다. 홍정훈.


이름을 듣는 순간 추억의 시계가 돌아갔다. 때는 아직 뚜.뚜.뚜.띠~~~ 모뎀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 당시에도 게임은 좋아했지만, 문학적 감수성과 친분이 두텁지 않은 기자에게도 소설을 읽는 취미가 있었다. 종이로 된 책이 아니라 파란 화면과 하얀 글씨로 표현된 모니터 속의 텍스트, 이른바 장르 문학이었다.


작금의 입시 교육과 비교하자면 어느 것이 더 시간낭비일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도 팔딱팔딱 신선한 고등어들을 하루종일 학교에 붙잡아두었으니 좋아했던 게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남아도는 시간을 채워준건 대여점의 출현과 함께 막 출판 붐이 일기 시작했던 장르 소설들. 좀 과장하자면 기자야말로 '가정교육을 판타지로 받은' 셈이다.




[ 2007년 종료된 하이텔. 이걸로 떠들고 소설보고 게임하고 전화비때문에 두드려맞고... ]




비록 최근에는 아타리 쇼크를 연상시킬만큼 수준 이하의 장르 소설들이 범람하면서 시장 자체의 평판을 저하시키는 난맥상에 빠져들었지만, 당시 PC 통신을 기반으로 등장했던 장르 소설들의 상당수는 현재도 꾸준히 읽혀지며 작품성을 인정받을 정도로 손꼽히는 수작들이 많았다.


게다가 이후 대학에 군대까지 다녀와도 이런 생활패턴이 크게 바뀌지 않았으니, 내 청춘의 한자락에는 꼭 게임과 장르 소설이 빠지지 않았다. 불현듯 써놓고보니 잉여력 증명인 것 같아서 서글프지만 현실이 이런걸. 어쨌거나 장르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무협에는 좌백 작가요, 판타지에는? 바로 이 남자, 홍정훈 작가였다.



물론 '미친 달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같은 자존감 넘치는 멘트를 멋지다고 거리낌없이 따라할 수 있는, 풋사과의 자유를 만끽하던 시기였던터라 더욱 좋아했을 수도 있지만, 프로 작가의 필력에서 터져나오는 화려한 액션과 일상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주제를 맛깔나는 재미로 고급스럽게 엮어내는 탄탄한 전개는 '휘긴경' 홍정훈 작가만의 전매특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월야환담 시리즈, 더 로그 등의 소설로 유명한 1세대 장르 소설 작가, 홍정훈 ]




그런데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이름을 게임업계에서 듣게 될 줄이야. 그것도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 이미 끝판왕인 진승범 대표까지 인터뷰가 마무리된 상황에 다시 전화걸어 '갸가 갸가?' 물어보기도 뻘쭘하지만 어쨌거나 추억의 한 켠을 장식했던 인물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인데, 염치 불구하고 청을 넣고 부랴부랴 달려갔다.



"제가 지향하는 바가 원래, 늘 글을 쓰면서도 느끼지만 남들이 1류라고 칭해주는 것들은 제가 추구하는 바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삶의 진지한 고찰 같은 것들이요. 제 취향이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오히려 모럴 반달리즘(Moral Vandalism)이랄까요? 도덕적인 가치를 파괴하려는 형태에 가깝죠. 전 선으로 위장해서 독을 먹인다고 합니다만. (웃음)"


뭐, 그래. 솔직히 인정하자. 당시에는 기자도 오갈데 없는 피끓는 청춘에 분출구만 찾아 돌아다녔으니 청소년과 성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홍정훈의 자유분방한 표현력이나 반사회적인 일탈도 끌렸다. 원래 블록버스터에는 눈요기를 위한 장면들도 한두개쯤 들어가는 법이니까. 또 아버지가 썼던 슈퍼맨 가면이 그냥 정말로 가면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시기가 되면 으레 그런 것들에도 끌리기 마련이다.


"기본적으로 제가 추구하는 것은 극한 상황과 극적인 장면입니다. 액션과 활극, 위기 상황의 침착함. 현대 사회에서의 슈퍼맨, 마치 베어 그릴스같은 인간형의 사람들이 위기에 처하고 또 그걸 풀어나가는 재미. 개인적으로 사람의 본질이라는 것은, 배틀 로얄이나 서바이벌같은 상황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평화로운 곳에서 가려지는 도금을 벗겨내고 싶습니다."







성공한 1세대 판타지 작가 중의 한명이던 그가 게임 쪽과 인연을 맺게 된 이유가 궁금했는데 사실 작품 활동을 하던 시기에도, 그러니까 약 2005년 경부터 게임 업계 쪽으로 꾸준한 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덕분에 아키블레이드에서는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들이 게임속에 자신의 상상력을 구현하려는 시도를 하려다가 벽에 부딪히는 경우가 없었다는 그의 설명.


"물론 게임의 기획이라는 것이 언제나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 벽이 기술상의 어려움이나 기획뿐만 아니라 자금이나 인원같은 외적 요인이 될 수도 있구요. 만약 개발 경험이 전혀 없는 분과 작업을 하게 된다면 부딪힐 일이 많겠지만, 저 개인적으로 게임 개발쪽 업무를을 함께 진행했던 경험이 있기도 했고, 또 TRPG에 대한 지식도 많아서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잊고 있었다. 작가 홍정훈은 소설에서 자주 언급되는 격투기나 오토바이뿐만 아니라 왠만한 룰 북(Rule Book)쯤은 가볍게 돌파했을 정도로 TRPG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갖춘 인물이었다. 당연히 게임의 기본적인 구조나 진행 등에 대해 누구못지않게 익숙할 법 하다.

게이머들이 종종 궁금해하는 것을 물어보자. 게이머들은 항상 소설속에서 꿈꿨던 멋진 세계관과 이야기, 캐릭터들을 갖춘 온라인 게임을 원하는 것 같다. 그런데 정작 온라인 게임의 역사가 10년이 넘어가도록 게임과 시나리오의 만남이 제대로 녹아들어 성공한 케이스는 없다. 원인이 무엇일까?


"사실 굉장히 단순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게임을 제작할 때 담당 개발자들이 생각하는 것은 '개발은 내가 해도 이야기를 못 만드니 외부에서 데려와 시키자'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이런 형태로 작업을 시작하면 상급자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작가가 아니라 PD나 개발자들이 만들고 싶은대로 만들게 됩니다. 물론 다 그런 형태는 아니겠지만요.

이야기가 잘 녹아들어있는 게임을 원한다면 책임과 권한까지 주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이야기 담당자에게 충분한 권한과 책임을 주는 경우는 업계에서 별로 없었다고 봅니다. 원작이 있더라도 만약 원작과 게임의 재미가 추구하는 바가 다르면, 결국 게임 개발자의 손을 들어주게 되거든요. 그리고 아직까지 중요성이 낮다고 생각하기도 하구요."




너무 반가운 인물을 직접 만났더니 이야기가 너무 추억과 일반론 위주로만 흘러가는 것 같다. 그렇다면 직접 만들고 있는 아키블레이드는 어떨까? 사실 지난번 인벤에서도 한차례 소개되었지만 개발중인 게임이다보니 너무 단편적인 내용 위주로만 흘러간 경향이 있다.

"아키블레이드는 화면에서 보셨듯이 액션 게임입니다. 제가 참여한 만큼 캐릭터에도 신경을 많이 썼구요. 성장 개념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캐릭터에 익숙해지기 위한 시간을 주는 정도일 뿐이구요. 물론 특성에 따라 캐릭터별로 변화가 생기지만, RPG처럼 순서를 매기는 형태의 성장은 없습니다.

직접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들이 재미있어질 때까지, 그냥 피하고 때리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잘 때리고 잘 막고, 일반 액션에서 콤보 이어 때리고 헤드샷 넣고 등... 액션의 재미를 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실제 게임을 즐기면서 완성해 가고 있구요. 체험한 것들 위주로 수정하다보니 일대일 밸런스 위주로 돌아가더라구요. (웃음)"




옆에서 위험 발언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진승범 대표. 일대일 밸런스만 맞는다고 오해할까 걱정했는지 바로 뛰어들어 추가 설명에 들어간다. 서로 친한 사이라는데 그래서 그런지 주고받는 설명이 손가락으로 내리치는 키보드에 착착 달라붙는다.


"1vs1 밸런스와 2vs2 밸런스는 외부 테스트에서도 반응이 좋았구요. 다만 아직까지는 난전으로 가면 밸런스가 좀 약하다는 평가가 있어서 개선중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개발자들이 먼저 체험해서 재미있어하는 형태로 보완해나가니까 3vs3 이상의 대전은 테스트부터가 쉽지 않아요.

콤보나 기술도 입력 자체는 쉬운 편이지만 지형의 기울기나 장애물의 위치 등에 따라서 평소 자연스럽게 들어가던 콤보가 안 들어가는 등 변수가 많습니다. 격투 게임에서 똑같은 성능의 캐릭터를 갖고 게임에 들어가도 거리나 타이밍에 따라 실력 차이가 발생하는데, 그런 형태에 가깝습니다. 게이머의 판단이나 실력이 끼어들 여지를 주는거죠."








캐릭터성이 뛰어난 소설에서 캐릭터를 차용한다면 오히려 캐릭터의 매력에 게임성이 매몰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아키 블레이드에서는 어떤 형태로 소설 속의 캐릭터를 가져와 게임의 밸런스 및 개성으로 표출하는지 궁금하다. 제약같은 것도 있을 법 한데.

"결국 순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캐릭터의 개성을 확실하게 표출해낸 뒤에 밸런스를 맞춰가는 것이 맞다고 보는데요. 만약 밸런스를 먼저 생각한다면 개성있는 스킬이 나오기 힘들 것 같거든요.

그리고 아키블레이드의 밸런스는 사실 격투 게임으로 치면 철권같은 경우라고 보는데, 분명히 객관적으로 성능이 약간씩 처지는 캐릭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부분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어느 하나가 망한 캐릭터라는 느낌이 들면 당연히 안되겠지만, 궁극적으로 캐릭터 액션 게임의 밸런스는 그런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력과 인기를 겸비한 1세대 장르 문학 작가가 자신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환경으로 액션 게임을 선택했다는 것이 의문이다. 오히려 MMORPG가 제격이 아닐까 싶은데. 코드브러시의 아키블레이드 역시 시나리오의 영향이 크지는 않을 것 같은데도 벌써 책까지 출판된 상황이다.

"철권이나 블레이 블루같은 격투 게임도 세계관이 상관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 보면 아닙니다. 오히려 캐릭터성이 잘 드러나기 때문에 스토리에 더 관심이 가는 부분도 있죠. 아키블레이드는 게임이 준비 단계라서 소설책에서 먼저 보여드린 부분이 많습니다.

반대로 게임을 개발하다보면 캐릭터에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냐 이대로는 안돼! 예쁜 여성 캐릭터가 필요해!' 라던가...(웃음) 캐릭터의 개성이 게임의 큰 축이라서 소설속에 등장하는 세븐즈 리그나 절망의 군주에 나오는 영웅 등, 게이머분들에게 선보여드릴 때가 되면 8명 정도가 완성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아키블레이드는 액션 게임으로 끝이 아니다. 아직 첫번째 게임이 개발중이기 때문에 당찬 포부라고 평할 수 밖에 없지만 지난 인터뷰에서 언급했듯이 아키블레이드의 세계관을 활용한 원소스멀티유즈, OSMU 사업이나 다른 프로젝트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앞서나가는 것 아니냐고 비판하시는 분이 있겠지만 머릿속에는 완구나 만화같은 다양한 사업까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당장은 현실때문에 제약이 많지만, 계획이라도 탄탄하게... (웃음) 홍정훈 작가의 아키 블레이드가 오픈 엔디드 형태라서 지금 당장은 소설 속의 캐릭터 형태를 잡고, 게임 아키블레이드를 개발해서 성공시키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게임 이름도 사실 공교롭게 두 개의 게임, 그것도 대작 게임과 겹치게 되었는데 저희로서는 좀 억울한 부분이 있습니다. 기존에 없는 이름들 여러개 늘어놓고 도메인부터 검사해서 선정한 이름이거든요, 그래서 소설도 출판한 것이고. 절대 저희가 따라한 거 아닙니다.(웃음)"



아직 개발중인 게임을 섣불리 속단하거나 기대하긴 이르다. 어느 한 단편만을 보고 기대하기에는 한국의 게임 시장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게임 이름을 기억하게 만드는 이유는 1세대 장르 소설 작가가 시작부터 함께한 캐릭터성만 제대로 녹아들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감.

게임이 성공할까? 모르겠다. 그러나 캐릭터성에 대한 답변은 확실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기분의 원초적이고 화려한 액션을 글빨(?)로 커버하던 홍정훈 작가와 엔씨소프트의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나온 실력자 진승범 대표가 만났으니 최소한 평범한 캐릭터 액션 게임은 아니리라.


※ 인벤에서는 장르와 플랫폼에 상관없이 스타트업 혹은 신생 게임 개발사에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desk@inven.co.kr으로 기사 제보/ 취재 요청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