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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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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고시 포기한 대신 꽃미남 프로그래머 됐죠!" 포프김 인터뷰

박태학 기자 (Karp@inven.co.kr)


포프김. 특별한 이름이다.

사실 토종 한국 게이머에게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그는 캐나다에서 게임을 개발한다.

하지만 그가 제작에 참여한 게임들이 유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가 재직했던 개발사는 이름을 듣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 '홈월드'부터 시작해 '워해머',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로 게임성과 작품성 모두를 사로잡은 렐릭 엔터테인먼트의 핵심 인력이었으며, 현재는 스퀘어에닉스 산하의 에이도스에서 근무하고 있다.

스퀘어에닉스는 '파이널판타지'와 '드래곤퀘스트'라는, 일본식 RPG 최고의 IP를 보유한 회사며, 에이도스는 여전사 라라의 '툼레이더'를 비롯해 PC 게임 사상 최고의 게임 중 하나로 꼽히는 '데이어스 엑스' 개발사다.

이쯤 되면 그의 실력에 대한 의심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지난 KGC 2012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그를 어렵게 섭외했다. '김상우'라는 본명을 가진 한국인답게 해외 개발자들과 비교해 수월한 인터뷰가 진행될 것으로 기대했다. KGC에서 펼쳐진 그의 강연은 매우 전문적인 내용이었기에 선배 기자를 좌절에 빠뜨리긴 했으나 이번 인터뷰에서 듣고 싶은 것은 그의 인생사니까.

[ ▲ 자칭 미남 개발자 '포프 김'(한국명 - 김상우) ]




해외 개발자라는 기본적 인식 때문일까. 그를 바라보는 시각이 인터뷰를 진행하며 조금씩 변하는 것을 느꼈다.

'자신감에 높이가 있다면 이 사람은 에베레스트야...'

그는 자신을 믿는다. 자신의 능력을 믿고 몸을 움직였다. 거침없는 그의 행동과 철두철미한 판단력은 놀라운 시너지를 일으키며 따끈따끈한 성공을 거뒀고, 그 결과 남부럽지 않은 연봉을 받는 잘나가는 개발자가 됐다. 하지만 겸손이 곧 미덕이라 뿌리내린 한국인에게 그의 솔직담백한 인터뷰가 반듯하게 전해질지 의문이 들었다.

그와의 대화는 꽤 길었다. 두 시 정도에 만났는데 끝날 때 시계를 보니 다섯 시가 훌쩍 넘었다. 하지만 다양한 경험을 축적한 개발자답게 그의 일대기는 꽤 흥미로웠고, 사이사이로 비치는 그의 자신감이 이야기의 풍미를 더했다.

인터뷰는 일반적 형식이 아닌 수기 형식으로 다뤘다. 기자는 잠시 뒤로 물러나 있겠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을 그의 이글이글한 눈동자 앞에 조심스럽게 모시겠다. 걱정할 것은 없다. 기자가 본 포프김은 활력 가득한 재미있는 사람이지, 넘치는 카리스마로 상대를 휘어 잡아먹을 사람은 아니니까.




1.


캐나다에서 그래픽 프로그래머로 일한 지 어느덧 7년이 지났다. 나름대로 이쪽 방면에서는 인정받는 실력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이뤄낸 것도 많고…

사실 난 학창시절에 영어를 정말 싫어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영어 본거지 중 하나인 캐나다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대답없는 운명의 끈이 나를 이끌었기 때문 아닐까. 캐나다에 입성 후 오랫동안 일한 '블루캐슬'에서의 나날은 내게 큰 성장동력으로 작용했다.

이 회사는 입사 당시만 해도 작은 게임사라고 생각했는데, 캡콤 산하로 들어간 이후 입지가 변한 회사다. 이 '푸른 성'은 여러 팀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옆 팀은 '데드라이징2'이라는 제목의 좀비 파라다이스 게임을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난 그 게임 개발에 직접적인 참여는 하지 않았지만, 엔진 알고리즘에서 내 기술이 약간 포함되어 있으니 아예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 게임의 성공을 누구보다 바랐다. 하하!

내가 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은근히 많다. 그냥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티스트가 만드는 그래픽적 효과를 화면 상에 보일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기술을 만든다고 보면 될 거다.

서양의 게임 개발인력 구성을 보면 직종별 세분화가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한국에 있을 때는 클라이언트 담당이 이것저것 다 해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다르다. 그래픽 담당, 유저 인터페이스(UI) 담당 개발자가 따로 있다. 한국의 클라이언트 개발자는 여기서 제너럴리스트라 불린다. 이름이 꽤 멋진데, 이들은 모든 분야를 뭉뚱그려 어느 정도 만질 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뭐, 나는 콘솔 쪽 개발자이기에 하드웨어 특성을 몽땅 이해한 후 디버깅 같은 기술 책임을 담당하고 있다.

[ ▲ 만들라는 좀비는 안만들고! ]





2.


옛날 생각이 난다.

대학교 졸업은 2005년 5월인가 6월쯤 한 것 같다. 당시 나는 온몸에 패기를 둘둘 휘감고 있었다. 세상 무섭다고, 먹고살기 어렵다는 소리 귀따갑게 들었지만, 큰 걱정 안 했다.

하지만 그 귀따가운 소리가 전부 뼈가 되고 살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직장 구하기 위해 원서를 60개쯤 작성할 때가 되니 사회가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처진 어깨를 이끌고 렐릭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이름은 밝힐 수 없는 모 회사에도 지원서를 내 봤다. 결국, 그 모 회사에 입사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직원 봉급도 잘 안 주는 등 문제가 많은 회사였다. 자기애와 프라이드로 똘똘 뭉친 외국에서 이런 기업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결국, 3개월 반 정도 있다가 나왔다. 당시 우리 팀 관리하던 매니저 길가로 불러내 욕도 했다. 하지만 뭐, 그 매니저 역시 회사 내 정치 물에 찌든 사람이라 평소에도 좋게 보진 않았다. 양심의 가책은 없다.

문제는 돈이었다. 막상 회사 나오고 보니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부모님께서도 걱정 많이 하셨다. 성공하기 전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큰소리 떵떵 치고 왔는데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니 면목이 없었다. 발등에 불 떨어지니 내가 회사를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기술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물색했고, 결국 한 대형유통회사에 입사해 데이터베이스를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됐다.

난 대학교 다닐 때도 순수 프로그래밍 실력에서 나름대로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나만큼 빠르고 확실하게 처리하는 녀석은 없었다. 데이터베이스를 담당하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 회사 역시 나만큼 일 잘하는 친구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랑이 심하다고? 맞다! 하지만 난 솔직하고 당당한 이런 모습이 좋다.

[ ▲ 이 쉬운 것을 왜 못한다는 거지? (출처 - 한국형 표준 원전 계통 실무 ]





3.


음…뭔가 허전하다. 데이터베이스 일도 나름 전문기술을 요구하는 분야라 초봉 그럭저럭 괜찮게 받고 있었지만, 마음이 공허해…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루하다. 뭐, 게임 제작과정에서 우러나오는 마약 같은 중독성을 고등학생 때부터 맛본 내가 이런 딱딱한 업무에 흥미를 느낄 것이라고는 애초부터 기대 안 했지만.

결국, 이번 직장도 깔끔하게 퇴사했다. 성공을 목적으로 캐나다에 온 것은 맞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은 의지가 더 강했다.

이후 부모님을 설득한 후 자리 잡은 새 직장이 아까도 말한 '블루캐슬'이다. 이 회사에 대한 정보는 위에서 말한 내용과 같다. 이 회사에 들어올 당시 본 면접은 일반적인 게임사와 크게 다를 것 없었다. 내가 쌓아왔던 그간의 인간관계에 문제점은 없는지 확인하는 정도다. 사실 이 정도라면 정말 정신에 크게 문제 있는 녀석이 아닌 이상 무난하게 통과하는 수준이다.

1차 면접이 통과되자 본격적인 실기 테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질문 수준은 면접 대상에 따라 다른데, 나는 경력자이기에 다소 높은 질문이 주를 이뤘다. 이 게임의 그래픽은 어떠하며 내적이나 외적으로 볼 때 어떤가, 혹은 이런 알고리즘을 구현해 본 적 있는가에 대한 것 말이다. 그들은 실력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문제해결능력, 쉽게 말해 '센스'를 더 중히 다루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초봉 얼마 원하느냐고 묻길래 그전 회사에서 35,000불 받았다고 하니 면접관이 크게 웃었다. 30분이 지나고 50,000불 줄 테니 들어오라고 했다.

[ ▲ 고맙습니다! 블루캐슬! ]





4.


블루캐슬에 입사하기까지 거쳐왔던 과정을 돌이켜 보면 참 우여곡절이 많았다. 자유분방하고 얽매이기 싫어하는 이 성격 탓일 게다. 난 고등학생 때부터 거침없는 성격이었고, 덕분에 힘든 적도 있었지만 좋은 부분 역시 그 못지않게 많았다.

기억을 뒤적여 보자. 내가 처음 게임을 만들었던 해는 90년대 중반이었던 것 같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팀을 짜 게임을 만들고 있었다. 그때는 '미리내 소프트'같은 규모 있는 게임사 외에 대부분의 게임팀이 우리처럼 끼리끼리 모여 제작하는 방식을 취했고, 월급 개념같은 것은 없었다. 게임 개발은 말 그대로 배는 곪지만 꿈만은 풍족한 그들만의 리그였다. 그래서 헝그리정신에 입각한 근성도 충만할 때였다.

그렇게 게임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공부를 못하지는 않았다. 중학생 땐 중위권 성적이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나름으로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도 서울대 갈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가족이나 선생님들 역시 내게 서울대 진학을 권유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연세대 법대에 선택했다. 조금 건방지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서울대는 시험장에 도시락 싸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마음을 접었다. 나의 자유로운 영혼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니까. 과 역시 컴퓨터와 관련된 곳을 선택하고 싶었으나 당시 연세대 이공계열은 색약자를 받아주지 않았다. 가슴속에 뜨거운 개발자의 심장을 탑재한 나는 몇 가지 색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이놈의 눈 덕분에 눈물을 머금고 문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 ▲ 안보여요... ]





5.


고등학교에 올라가기 전, 독학으로 틈틈이 C 언어를 공부한 나는 대학교에 진학하자마자 컴퓨터 프로그래밍 관련 동아리 문을 두드렸다. 이 친구들과 어울려 좋은 게임 개발할 수 있는 기초 환경을 다져 놓으면 과에 상관없이 유명세를 떨칠 수 있으리란 막연한 기대감과 함께.

하지만 이게 나의 착각이라는 사실은 그리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동아리 회원들은, 기초 지식이 부족했다. 당시 보급형이었던 386 컴퓨터를 켜고, 몇 가지 기능 관련 작업을 진행했더니 이 친구들이 매우 신기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것을 보자마자 바로 탈퇴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몸담았던 게임 개발팀은 내가 법대에 가는 즈음에 팀원 간의 불화로 해체됐다. 그렇기에 대학교에서 이러한 나의 욕구를 채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나를 기다린 것은 진한 아쉬움 뿐이었다. 한동안 방황했다.

대학교에서도 내 자유분방한 성격은 고쳐지지 않았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처럼 비칠 수도 있던 나였다. 그 결과 내 주위엔 오랜 재수생활 탓에 지긋한 나이대에 접어든 형님들이 많이 계셨다. 오히려 그분들이 더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았으니까.

형님들은 법대생이라는 환경적 요소와 나이라는 시간적 요소의 시너지에 휘말려 사법고시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결국 나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 휩쓸렸다. 기억 속엔 아직 게임 개발하는 순간의 쾌감이 남아있었지만, 당장 내 눈앞에 있는 녀석은 현실이라는 묵직한 이름이었으니까.

잊으려고 노력했다. 게임 개발할 당시 실패한 경험도 애써 생각해보고, '그땐 도스지만, 지금은 윈도우야. 난 안될 거야…아마'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하지만 이러한 잡념으로 가득 찬 사법고시생에게 성공은 그리 가볍게 다가오지 않는다. 결국 시험은 깔끔하게 낙방했고, 마지막 시험을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이러한 생각이 차올라 있었다.

붙으면 인생 펼 수 있는 거 같긴 한데…검사, 판사 되려면 점수 진짜 좋아야 하고, 그럼 결국 또 경쟁이잖아?

몸이 으슬거렸다.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분야에서 평생 경쟁하고 살 생각을 하니, 행복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이 시기에 내면의 다툼은 극에 달했고, 덕분에 성격도 매우 까칠해졌다.

[ ▲ 난 이런 삶 원했던 게 아니야! ]





6.


뜻밖에 결론은 간단했다. 어차피 다른 일을 해도 '평생 경쟁'은 피할 수 없는 법. 기왕 할거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기로 결심한 거다.

사법고시를 포기한 후 나의 길을 가겠다고 집에 연락할 때, 솔직히 아버지께서 나를 쫒아내실 줄 알았다. 뭐,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다행히 그런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고, 아버지께서도 이해해주셨다.

승인이 떨어지자마자 야심 찬 포부를 안고 캐나다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집에는 '성공하기 전까진 독신으로 살겠다'고 말했다. 좋아하던 술과 농구도 당분간 거리를 두기로 했다. 손가락엔 반지도 끼웠다. 서양문화권에서는 반지를 낀 사람이 기혼자라는 인식이 강해 이성이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절실했다.

누군가에겐 일상이지만 내게는 기회의 요람으로 다가왔던 캐나다. 그곳에서 잡은 첫 일은 번역이었다. 영어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컴퓨터 관련 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마이크로소프트 MVP로 유명한 조진현 프로그래머도 그 과정에서 알게 됐다. 어느 정도 번역이 손에 익자 코리아헤럴드지의 통번역까지 참여하게 됐는데, 덕분에 거액의 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나중에는 돈 버는 것에 너무 정신이 팔린 나머지 자기발전이 소홀해져 무섭기까지 했다.

고개 휘휘 젓고, 잡념 다 털어낸 후 밴쿠버에 있는 'BCIT'(British Columbia Institude of Technology)에 들어갔다. 학비는 그동안 번역으로 번 돈으로 충당했다. 학교에 들어간 이유는 간단하다. 나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력이 약하니 주위에 날 잡아줄 무언가가 필요했고, 학교는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가장 쉬운 해결책이었으니까.

[ ▲ 학교 가세요, 두번 가세요 ]





7.


막상 학교에 들어가긴 했지만, 불안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미숙한 영어실력이 걸렸다. 나름 전문적인 분야에서 유명한 학교이니만큼 수업을 따라가는 데 있어 많은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했다.

그런데 의외였다. 첫 중간고사 성적표를 받아보니 내 성적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용기를 얻은 나는 잊고 있던 학구열과 함께 활활 불타올랐고, 결국 1년 만에 과 수석을 차지했다. 학교 수업 자체 난이도가 워낙 높기에 한 학기가 끝날 때마다 50명씩 자퇴하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BCIT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학교인 동시에 취직률도 90%에 육박한다. 2학년으로 진급할 당시 나는 그러한 취직률 이점을 그대로 받을 수 있는 클라이언트 서버 관련 과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일단 나중에 사회 나오면 돈 많이 버는 쪽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좋은 학과를 똑똑한 학생들이 그냥 내버려 둘 리 없다. 경쟁률이 낮을 리 만무했다.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은 대부분 그러한 인기 학과로 몰려있는 상태였고, 그에 반해 이전부터 게임 관련 전공을 특화하길 원했던 나는 결국 디지털 프로세싱 관련 학과를 선택했다. 성적이 대체로 하위권인 친구들이 선택하는 과였지만 상관없었다. 부진한 과 친구들을 데려다 내가 가진 지식을 공유했고, 그 결과 내가 졸업할 때 디지털 프로세싱 학과는 학교 전체를 통틀어 2등 정도까지 성장하는 기염을 토했다.

[ ▲ 글쎄 이 쉬운걸 왜 못하는 거야 친구들? 잘 들어 봐! ]





8.


BICT를 졸업하고 입사한 곳은 블루캐슬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오랜 시간을 있었던 곳은 두 번째 보금자리였던 렐릭 엔터테인먼트다. 렐릭은 블루캐슬과 회사 분위기 면에서 다른 점이 여럿 있는데, 가장 큰 부분이라면 '아티스트가 주도하는 회사'라는 것이다.

내가 몸담았을 당시의 렐릭만 해도 아티스트 전력이 가히 세계 최강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게임 개발자 중 한 명인 존 카멕(ID소프트)이 렐릭에 직접 전화해 "당신들 게임 봤어. 그 파티클 대체 어떻게 만든 거야?"라고 물어볼 정도였으니까.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그리고 내가 그래픽 엔진의 핵심을 담당했던 '워해머 40,000 : 스페이스 마린' 역시 아티스트의 주도 아래 제작된 게임이다.

아쉬운 것은 기획의 부재였다. 실질적인 게임 개발 실력에서 별다른 약점 따위 보이지 않는 골든 멤버라지만, 정작 게임에 재미를 우려내야 하는 기획력에서 구멍이 났던 것. 심혈을 기울여 엔진을 제작하면서 나름 정도 많이 든 '워해머 40,000 : 스페이스 마린'의 실패도 그래서 더 안타깝다. 손맛 좋은 액션 게임인 것은 맞지만, 요즘 세상에 일직선 식 진행을 반기는 유저가 얼마나 있겠는가? 이 작품은 100만 장 이상 팔려 스테디셀러를 기록했지만, 실질적인 손익분기점을 넘기 위해선 현 판매량의 2배 이상 팔려야 했다. 나름 큰 규모의 프로젝트였기에 지금 생각해도 미련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4~5년 정도 렐릭에 몸을 담은 뒤 퇴사할 시점이 되었을 때는 쓸쓸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회사에 대한 애정, 그간 동료들과 함께 난관을 헤쳐나가며 쌓은 끈끈한 우정도 물론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내 자식, 내 '엔진'이었다. '워해머 40,000 : 스페이스 마린'을 만들 당시 엔진 제작 파트는 나를 포함해 단 둘 뿐이었고, 그마저도 나머지 한 사람이 다른 일정이 겹치는 탓에 혼자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엔진의 기본적인 틀은 '다크사이더스'의 코드를 따오는 것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그래픽 효과를 비롯한 전반적인 스펙은 모두 나 스스로 입력했기에 어느새 이 녀석을 단순 프로그램이 아닌 자식같이 보는 시각까지 생긴 것이다. 이 녀석은 모양도 예뻐 타 개발진에게 칭찬도 자주 듣고 왔다. 루카스아츠의 한 프로그래머는 데칼 처리에서 내 엔진이 무척 깔끔한 해결법을 제시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잊자. 잊어야 한다.

[ ▲ 손맛은 우리가 잘 만들어 놨잖아. 기획팀, 너희 정말... ]

[ ▲ 워해머 스페이스 마린 플레이 영상 (출처:McAkomx) ]





9.


렐릭을 떠난 새가 내려앉은 현재의 보금자리는 '파이널판타지'와 '드래곤퀘스트'라는 거대 IP 보유한 스퀘어에닉스다. 나는 일본식 RPG 개발자는 아니지만, 스퀘어에닉스 산하의 에이도스(eidos)가 모회사의 부족한 부분을 충분히 메웠기에 큰 걱정은 없었다. 에이도스는 이미 '데이어스 엑스'라는 걸출한 작품을 시장에 선보이며 미국식 복합장르 게임의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었으니까.

그런 에이도스의 신작은 내 심장 속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스퀘어에닉스에서 내가 개발하고 있는 게임을 여기서 밝힐 수는 없다. 그저 심각할 정도로 멋진 게임이라는 사실만 알리겠다. 렐릭에서 5년여간 근무하며 프로그래머로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고 생각했고, 별다른 도전욕구도 생기지 않아 시간은 무료함을 타고 흘러가고 있었다. 스퀘어에닉스의 신작은 그런 내게 신선한 경종으로 다가온 것이다!

내가 정말 이 녀석을 제대로 만들 수 있을까.

녀석을 눈앞에 마주한 순간 떠오른 스친 생각이다. 언제 나올지는 밝힐 수 없지만, 추후 등장할 테크 데모를 보면 유저들도 아마 나와 같은 감정을 맞이하리라 생각한다. 게임 개발자로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마땅히 내세울 만한 작품은 없었는데 아마 이 작품으로 나의 미진했던 부분이 어느 정도 채워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 ▲ 우리회사 개발팀, 이정도 실력입니다! *사진- 에이도스의 '툼레이더 리부트' (내용과 관계없음) ]





10.


장소가 변하면 맞물려있는 다양한 요소들 역시 변화하는 법이다. 내가 그랬다. 스퀘어에닉스에 입사 후 나를 감싸고 있는 입지 역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고, 그 시작은 한국에서 개최한 'KGC 2011'이었다.

당시 KGC는 내게 여러모로 깊은 의미를 안겨주었다. 개발자 생활 대부분을 외국회사에서 보냈기에 한국 개발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릴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 때의 강연은 현재 인맥을 구성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미리 말하지만, 프로그래머는 완벽주의자인 경우가 많다. 굉장히 계산적이고 이성적인 업무이기에 어떻게보면 완벽주의자에게 프로그래머는 천직일 수도 있겠다.

첫 KGC 강연을 맞이한 나 역시 이러한 프로그래머 적 사고방식에 충만한 상태이기에 철저한 준비작업이 필수였다. GDC 못지 않은 수준으로 대비했다. 차트는 백장이 넘어갔고, 멘트 하나하나에도 세심하게 주위를 기울였다. 혹시 모를 청중의 우발적인 질문들도 깔끔하게 받아넘길 수 있도록 연습했다. KGC는 'SIGGRAPH'나 'GDC'에 비해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한국에서 강단에 선다는 것 자체만으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결과적으로 나의 강연은 성공이었다. 한국에서의 반응 뿐 아니라 해외 반응도 호평이 줄을 이었다. 그 때 일을 계기로 한국의 개발자들과 'Game Dev Forever'라는 블로그를 공동으로 운영하게 됐는데, 이를 통해서도 그전까지 몰랐던 한국의 수많은 개발자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KGC 2011 강단에 섰을 때는 알아보는 사람이 한, 두명에 불과했지만, 일년이 지난 KGC 2012는 많은 부분이 바뀐 상태였다. 운영적 측면에서도 매끄러워진 게 눈에 보였으며, 무엇보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 조금 얼떨떨했다. 내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백 명에 가까워지자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상투적이지만 진실된 마음이 또아리를 틀고 나를 반긴다.

KGC 2회차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박민근 개발자의 주도 아래 진행되고 있는 게임 개발자 렙소디에도 참석한 적 있는데 모두 유쾌한 분들이어서 즐거웠다. 이번 KGC 2012 뒷풀이 자리에서 만난 한국의 수많은 개발자들은 나를 한 가족처럼 대해줬고,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고 보면 한국 게임 개발자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게임업계는 개발 환경 측면에서 세계적으로도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어렵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기 소신을 지켜나가며 꿋꿋히 개발하고 있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경외감마저 든다.

[ ▲ 박민근씨. 당연한 말씀을... ]

[ ▲ 포프김의 스크린 스페이스 데칼 강연 자료 (워해머 40,000 : 스페이스 마린 ]


▶ 게임 개발자 랩소디 13화 - 인기 게스트 특집 (대마왕,포프) 청취하기
▶ Game Dev Forever 홈페이지 바로가기




그리고….


한국인이지만 해외 게임 개발사에서 오랫동안 일해오니 이런저런 요청이 많이 들어온다. 그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나와 같이 해외 개발사에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후배 개발자들에 대한 조언이다.

사실 이런 질문 받을 때 이런 생각을 한다. 답은 그들 마음속에 이미 있는 거라고.

뭔가 내가 특별함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나 역시 일반적인 게임 개발자에 불과하며, 다른 점이 있었다면 남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배우고 일했다는 것 정도니까. 그래서 난 그렇게 대답한다. 개발자들 스스로 마음속에 열정을 품어야 한다고.

흐르는 시간과 함께 게임업계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각도 변화했다. 예전에는 '돈 못벌어도 좋으니 만들고 죽자'라는 배수의 진 같은 정신력이 동반되어 나오는 게 게임이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게임 쪽도 이제 돈 어느 정도 버는 직종이라는 인식이 잡혔고, 실제 그러한 환경에 적응해 살아가는 개발자도 주위에 다수 있다. 북미 개발사 역시 이러한 마인드가 서서히 뿌리내리고 있어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 ▲ 성공하고 싶습니까? 일단 한 번 보세요! ]


한국 게임 개발사들에게 보내는 메세지를 마지막으로 나의 이야기를 정리하려 한다.

'Game Dev Forever'를 운영하며 한국의 여러 개발자를 만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MMO의 종주국인 만큼 대규모 유저를 수용할 만한 서버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달했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해당 분야에 노하우를 축적한 대규모 개발사도 많아 이러한 나의 생각은 거의 맞다고 생각해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왜 한국은 서버기술 관련 자료를 공유하지 않지?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경쟁사회에서 공유란 말 만큼 위험한 단어도 없다. 사방에 퍼진 적에게 내 비장의 무기를 스리슬쩍 내보이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게임업계를 장기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조금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해외의 경우 서버를 비롯한 다양한 기술 대부분이 오픈소스인 경우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특별히 손해본다는 인식은 없다. 북미에서 문화 콘텐츠 수준으로 성장한 '헤일로'를 비롯해, '언차티드', '크라이시스' 등 유명 게임들 역시 대부분의 소스를 공개하고 있지만 그럼으로 인해 그들이 차기작에서 손해를 보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국 게임업계가 세계에 비춰지는 시각은 어떨까? 해외 게임업계에 몸담은 경험에 의하면, 그들에게 한국은 'MMORPG 강한 나라', '부분 유료화로 게임 즐기는 나라'라는 인식이 강하다. 두 가지 인식 모두 해외에서 주류라고 하기에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분명히 게임의 다양성에 있어 한 축을 담당하고 있으며,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지금은 세계 무대를 향한 한국 게임 개발사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한 시점이다. 대규모 MMO와 부분유료화 관련 지식이 부족한 그들에게 한국의 이러한 '경험'은 대단한 자원이 된다. 게임업계 동반 성장을 위해 해당 지식을 공유하고, 그와 함께 그들이 앞선 기술도 가져오는 마인드가 필요한데, 아쉽게도 한국 게발사들은 너무나 폐쇄적이다. 이러한 반응에 귀를 기울인다면 한국 게임사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물론, KGC, NDC와 같이 강연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나마 한숨 돌린다. 하지만 전문인이 들을 만한 기술 위주의 강연이 활성화 된다면 더욱 풍성한 대한민국 게임업계의 미래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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