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제외합니다. 총, 제외합니다. 동양 무기, 안 나옵니다."

'거의 모든 무기의 역사 - 서양 판타지 편'. 무슨 역사 관련 서적, 그것도 시리즈물 서적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제목의 세션에서 강연자들이 힘주어 말한 내용 중 하나다.

NDC2013 첫째날인 24일(수) 열린 강연에서 넥슨 개발본부 W디자인팀의 이원 수석연구원과 W엔지니어링팀의 김한경 선임연구원은 '콘텐츠 크리에이터를 위한 교양 세션'이라는 타이틀을 내걸었다. 주제는 서양 판타지 소재의 게임에 등장하는 무기들의 역사, 그리고 그것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역사적 개연성이었다.

▲ 이원 수석연구원(우)과 김한경 선임연구원(좌)



■ 전쟁, 그로 인한 무기의 발전 역사

"서양 판타지라고 하면 어느 시대가 떠오르나요? 또, 어떤 무기가 먼저 떠오르나요?"

이원 선임연구원의 질문에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은 중세, 그리고 검. 그는 이와같은 보편적 인식을 바탕에 두고 오늘의 발표 방향을 잡았다고 이야기했다.

무기란 애초에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만큼, 전쟁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 이원 수석연구원은 역사상 주목할만한 전쟁으로 트로이 전쟁,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포에니 전쟁 등을 꼽았다. 이들은 모두 고대로 분류되는 시기에 있었던 전쟁이며, 기본적인 형태의 무기들을 확립시키는데 기여한 사건들이다.

서양 역사에서는 후반부로 갈수록 무기의 종류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중세 십자군 전쟁과 백년 전쟁을 겪으며 무기의 종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유럽 세계와 아랍 세계의 대립이었던 십자군 원정을 기점으로 서양 무기사에는 사브르(Saber)와 같은 곡도(曲刀)들이 많이 생겼다.





창이나 활, 투척무기 등 비교적 간단한 형태의 무기일수록 오랜 기간에 걸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필럼(Pillum, 한 번 투척하고 나면 찌그러져서 다시 사용할 수 없는 일회용 투창)과 같이 독특한 목적으로 고안된 파생형 무기들도 등장했다.

배틀액스(Battle Axe)와 같은 무기는 기원전 9세기 정도까지 사용되다가 무게와 불편함 때문에 창으로 대체됐으며, 클럽(Club, 몽둥이)과 같이 비교적 튼튼하면서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무기들이 보편화됐다.





무기의 발전은 군대의 무장과 전술의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대의 보병은 맨발이 특징일만큼 가벼운 무장을 했으며, 기병 역시 방석 같은 천 하나만 얹어놓고 타는 방식이었다. 그러다가 그리스, 로마 시대에 들어서 중장보병이 생겨났으며, 편자가 등장해 기병의 행군 거리가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됐다.

이후 보급되기 시작한 '등자'는 보다 큰 의미를 지닌다. 등자는 말 위에 탄 사람의 신체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기병의 확산을 불러왔고, 이를 토대로 충격기병(중갑을 입고 말과 함께 들이받는 공격을 하는 기병)이 발달하는 등 전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 역사 속 무기들, 게임에서는 어떻게 발전해왔나

본론은 게임이다. 서양 판타지를 소재로 한 게임들에서 무기들은 어떻게 발전해왔을까. 마이크를 넘겨받은 김한경 선임연구원은 게임 안에서의 무기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먼저 알아두셔야할 것은, 여기서 언급하는 게임들이 '최초'를 의미하는 않는다는 겁니다. 비교적 빠른 이해를 돕고자 보다 널리 알려진 게임들을 위주로 선택했음을 알려드립니다."

가장 먼저 언급된 '로그라이크(Roguelike)'와 '넷핵(NetHack)'은 모든 게임 요소를 아스키 텍스트로 나타내는 게임이다. 실제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무기의 피해량이나 명중률, 무게 등을 수치로 나타냄으로써 무기를 본격적으로 게임화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다.



다음으로 언급된 것은 1991년 출시된 '프리히스토릭(PreHistorik)'. 통상적으로 '고인돌'이라 알려져 있는 게임이다. 프리히스토릭은 2D게임 안에서 무기의 기본적 메커니즘을 시각화한 사례로 언급된다. 즉, 무기의 공격판정을 2D 히트박스로 구분함으로써 '때렸다' '맞았다' 등을 시각화한 것이다.



1987년 등장한 '젤리아드'는 프리히스토릭보다 먼저 출시됐지만 내용의 스케일이나 짜임새 면에서 보다 발전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인벤토리를 보여줬으며, 무기를 휘두르는 액션을 적용한 작품이다.





대항해시대2는 시리즈 특성상 탐험과 교역이 주가 되는 게임이지만, 전투와 무기 시스템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공격 턴과 방어 턴을 주고받는 식으로 진행되는 전투 시스템을 채택함으로써 무기와 방어구에 공격, 방어와 관련된 속성을 적용했다.



디아블로1과 2는 '랜덤 옵션'이라는 시스템으로 무기와 방어구 자체를 게임의 메인 콘텐츠로 격상시켰다. 하나의 아이템이라도 랜덤 옵션을 적용해 수많은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유저들은 자연스럽게 순환 플레이를 하게 됐다는 것.



이후 공격과 방어를 3D로 표현한 '부시도 블레이드', 탑승물을 게임의 주요 특징으로 내세운 '마운트 앤 블레이드', 강화 시스템을 도입해 무기와 방어구를 과시의 수단으로 만들어낸 '던전앤파이터'. 그리고 가장 최근 출시된 '디아블로3'에서는 현금 경매장 시스템으로 게임 속 무기와 방어구 아이템에 현실적 가치를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 "게임은 현실이 아니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게임 속에서 무기와 전투를 표현하는 범위도 점차 넓어졌지만, 김한경 선임연구원은 "게임 속 무기가 고증을 지키는 수단이었던 적은 없다"고 말했다.

사실상 게임은 고증을 완벽하게 반영하지 않고도 훌륭히 발전해왔다. 그것은 게임이 현실의 복제가 아닌 재미의 추구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게임에 대한 시각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악화된 부분도 없잖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퀄리티를 유지하거나 더 높이기 위해 고증에 철저해지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까? 현실을 보다 충실히 반영하면 게임에 대한 시각이 개선될까?

그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게임을 보다 나은 미디어로 만들기 위해서는 '게임 본연의 재미를 추구하는 것'과 '게임 외부의 질서를 반영하는 것'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는 편이 옳겠냐고.





애초에 게임을 만드는 사람과 즐기는 사람 모두 그것이 현실을 그대로 모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다. 비행 슈팅 게임에서 비행체가 아이템을 '먹는다'거나, SF 소재의 게임에서 보스 로봇을 '죽인다'는 것은 게임이기에 허용되는 표현이다.

다른 미디어, 예를 들어 영화에서 24시간 내내 먹지도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으며 계속 뛰어다니는 주인공이라든가, 애니메이션에서 왕방울만하게 큰 눈을 가진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어찌 보면 미디어이기에 허용되는 이야기다.






■ 보다 큰 흐름, '개연성'에 주목하라

중요한 것은 보다 크게 보는 시각이다. '개연성'.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하는 말이다. 무기의 역사부터 게임 속 무기 시스템의 발전까지를 되짚음으로써 두 사람은 그 안에 있는 '개연성'을 언급했다.

무기는 다른 무기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거나 사라져 왔다. 십자군 전쟁 이후 외날 곡도가 유행했다거나 갑옷과 도검이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며 발전해왔다는 것이 그 좋은 예다.

한편, 무기는 사회제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장궁과 크로스보우가 풀 플레이트 메일을 가볍게 뚫을 정도의 파괴력을 지녔다는 것은 전투의 양상을 바꿔놓았다는 측면에서도 주목할만하지만, 그로 인한 기사 계급의 몰락과 봉건제 붕괴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크나큰 의의를 지닌다.

그뿐만이 아니다. 역사에서 오래도록 활용된 무기들은 대개 쉽게 만들고 간단하게 수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즉,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무기들이 오래 살아남았다는 의미다. 앞서 말한 '개연성'의 측면에서 보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역사는 결국 개연성의 지배를 받으며 발전해왔고, 게임 속에 등장하는 무기들 역시 개연성의 축을 이루어왔다는 것이 이번 강연의 핵심이다. 게임 속에서도 이러한 개연성의 영향을 받아 무기가 점점 더 중요한 콘텐츠로 취급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게임에서 이런 개연성에 주목하는 것이 과연 재미를 저해하는 일일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어떤 현상을 관찰하고, 그에 맞는 모델을 수립해 적용해가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이미 커다란 재미 요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무언가로부터 모티브를 얻는다'는 것의 원동력이 되죠."

이렇게 되면 게임은 역사적 현상을 단순화한 일종의 모델이며, 그 안에서 생겨나는 수많은 현상들에 따른 새로운 모델이 적용되어 왔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모든 무기는 언제나 '도구'로서의 필요성과 상상력에 의해 생겨났으며, 그것을 통해 환경을 극복하거나 때로는 환경을 바꾸기도 해왔다. 게임을 개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무기'는 바로 게임이다. 즉, 그들은 게임을 활용해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보다 넓은 방면의 지식을 받아들여 스스로의 지평을 넓히자는 말과 함께 역사 이야기로 시작한 그들의 이야기는 게임을 바라보는 철학적 관점까지 폭넓게 짚어보며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