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게임 비용의 급격한 증가

게임사가 돈을 버는 방식, 반대로 말하면, 게임을 플레이하는 데 게이머가 써야 하는 비용은 시간이 지날수록 단계마다 급격히 상승되어 왔다.

처음에야 패키지를 하나 사면 영구 소장이었고 별다른 추가 요금 없이 영원히 플레이가 가능한 방식이었다. 단 몇만 원의 일회성 요금 지불로 끝이었던 셈이다. 얼마나 많은 게임을 사느냐가 문제였고 플레이 시간이 필요했을 뿐, 더 이상 돈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두 번째로는 온라인 게임이 대중화되면서 발생한 정액제 요금이다. 보통 매월 2~3만 원씩의 요금을 정기적으로 납부하는 방식이었다. 플레이 기간에 따르는 누적 금액으로 보자면 한 게임당 들어가는 비용은 꽤나 증가한 셈이다. 패키지와는 달리 서버 유지, 지속적 업데이트 등 추가되고 달라진 점을 고려했을 때 이해하지 못할 금액은 아니었다. 물론 게이머 간 현금거래를 통해 상당한 돈을 쓰는 경우도 있긴 했다.

세 번째로는 부분 유료화다. 이때부터 게임을 플레이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가파르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씩 판매되다가, 어느 날 이게 상당한 매출원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다양한 아이템들이 출시되고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했다. 한달 50만 원의 결제 금액 한도라는 규제가 나온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네 번째로는 바로 가챠, 뽑기다. 이때부터 가파르게 올라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늘을 뚫었다. 나아가서 많은 부분 유료화 아이템들이 뽑기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게임사들의 실적은 계속해서 증가했지만, 이는 곧 게이머들이 사용하는 비용도 그만큼 증가했다는 뜻이다. 또한 그 비용이 산술급수적, 기하급수적 증가를 뛰어넘어 뒷자리에 '0이 하나 추가되고 단위가 바뀔 정도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 화제가 된 그 댓글, 오죽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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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사회의 경제 성장률, 게이머들의 소득 증가율, 게임의 개발과 유지에 드는 비용의 증가율, 게임에 소비하는 돈의 증가율을 그래프로 나타낸다면, 아마 기울기부터 상당한 차이가 발생할 것이다.

끝없이 올라가던 주식 시장도 공황이 찾아오면 한 번씩 폭락했던 것처럼, 끝없이 출시되던 뽑기 상품도 지치고 분노한 게이머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때가 언젠가는 도래한다. 그리고 그게 바로 지금이다.



2. 뽑기보다 싼 트럭! 트럭이 대세다!

‘트럭 시위’의 시작은 LOL e스포츠의 인기 구단인 ‘T1’이었다. 새로운 시즌을 앞두고 감독과 코치의 선임 내역이 유출되고, 이 선임 명단에 분노한 팬들이 2020년 11월에 트럭을 보내 항의하면서부터였다. 트럭의 효과가 상당했는지 당초 유출된 내용과는 다른 형태로 인선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게이머들은 트럭 맛을 제대로 봐버렸다. 게임사에 항의 메일을 보내거나, 게시판에서 게임사를 비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프라인에서 적극적으로, 그것도 자신의 돈을 상당량 써가면서 트럭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고래’라 불리는 헤비 과금 게이머에게는 ‘뽑기’ 비용보다 트럭이 더 싸다는, 트럭은 뽑기가 아닌 확정템이라는 말도 나올 정도였다. ‘뽑기’에 수천만 원을 들였으나 원하는 게 나오지 않아 결과적 무과금이 되는 일도 빈번히 나오는데, 그보다 훨씬 적은 비용이 드는 트럭은 물질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그 실체와 결과물이 확실하지 않은가. 게이머들에게는 ‘뽑기’보다 ‘트럭’이 남는 장사가 되어버렸다.

한때는 게임의 비싼 과금을 옹호하는 말도 있었다. 비싼 골프채, 비싼 낚시 도구, 비싼 자동차 등등과 다를 바가 없다며 말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비싼 골프채도, 비싼 낚시 도구도, 비싼 자동차도 매일, 매주, 매월 지르지는 않는다. 문제는 게임은 매일, 매주, 매월 지르도록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헤비 과금 게이머가 한 며칠만 과금하지 않으면 트럭은 보내고도 남는다. 메이플스토리의 초창기 트럭은 게이머 1인이 개인 돈으로 보내려 했을 정도였고(추후 다른 게이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모금 후 공동으로 트럭이 보내졌다), 트럭을 위한 모금 시작 수십 분 만에 입금이 완료된 사례들도 있다.

게이머들은 ‘뽑기’에서 원하는 아이템이 지극히 낮은 확률로 나왔을 때 얻는 쾌감보다, 트럭을 보냈을 때의 쾌감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다.

▲ 1인 트럭 보내기에 달린 댓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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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페그오, 메이플스토리, 마비노기, 세븐나이츠2, 프로야구 H2, 타이니팜

지금까지 트럭 맛을 본 게임들이 대략 이 정도 된다.

지난 한두 달을 돌이켜보면, 게임사들 입장에서는 땅을 치고 후회할 순간들도 여럿 있을 게다. 페그오의 이벤트에 관한 최초의 그 트윗이 없었더라면, 페그오가 이벤트를 취소하지 않았더라면, 메이플에서 환생의 불꽃 등과 관련된 확률을 몇 달만 빨리 조치했더라면, 페그오나 메이플이 초기 사과문을 좀 더 잘 썼더라면, 보상을 좀 더 확실하게 했더라면 등등...

또 한편으로는 이슈가 되었던 여러 사안 중 일부는 우연이 겹치거나 오해에 기인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게임사의 누군가는 일정 정도 억울해하고 유저들의 분노에 대해 섭섭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문제는 아니다. 몇 년 동안 계속해서 ‘뽑기’가 가속화되어왔던 상황에서는 그 시발점이 무엇이냐의 차이일 뿐, 언젠가는 터질 문제였다. 다만 그 터진 시기가 지금이었을 뿐.

개별적인 사안들이 사실과 부합하느냐 부합하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 하나 때문에 게이머들이 분노한 것도 아니다. 지난 몇 년 넘게 쌓아온 분노 게이지가 이번에 터진 것뿐이다. 항아리의 경계면보다 높이 들어찬 물이 ‘표면장력’ 때문에 잠시 더 버티고 있었으니, 흘러넘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따름이다.

비용을 많이 쓰게 만드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많이 쓴다 해도 본인을 위해 쓰는 것이니 그에 만족할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비용을 씀에도 만족을 얻지 못하거나 쓴 만큼 대우를 받지 못하는 데에 있다.

지속적인 ‘뽑기’ 상품의 추가, 대단히 낮으면서도 공개되지 않는 확률, 그 낮은 확률조차 상황에 따라 몰래 변경된다는 짙은 의심과 정황들, 그만큼 대단히 얻기 힘든 아이템들, 그와 반비례해서 과거보다 훨씬 높게 들어가는 돈 등등 분노 유발 요인은 충분하다. 그렇다고 쓴 만큼 VIP 대접을 받는 것도 아니다. 보통 다른 산업에서야 이 정도 돈을 쓰면 VIP 대우를 받지만, 게임에서는 신규 ‘뽑기’를 어떻게 또 만들까를 생각하니까.



4. 자율규제는 실패했다.

어느 산업이나 마찬가지지만, 게임계는 규제에 대해 상당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왔고 게임 언론들도, 게이머들도 이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과거 얼토당토않은 사안으로 게임중독을 이야기하거나 셧다운제를 도입하는 등등 정부 정책이 현실과 맞지 않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아 왔으니까.

모바일 게임의 성행과 더불어 ‘뽑기’가 이슈로 떠오를 당시에도, 과거의 황당한 정책들이 오버랩 되어서 함부로 규제에 동의하긴 어려웠다. 대신 업계가 도입한 것이 자율규제였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이야기하자면, 자율규제는 실패했다. 혹 몇 년이 지난 이후 어떻게 될지 모르나, 현재까지 자율규제의 성과는 미약한 편이며 성공이나 중립을 논할 수준도 되지 못한다. 이번 사태 자체가 확률에 대한 자율규제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증거이고 그저 명분 쌓기에 불과했다는 반증이다.

▲ 자율규제의 실효성은 정계에서도 주요 쟁점으로 언급됐다


그래서인지 현재 추진되는 ‘확률 공개’라는 법률 개정안을 반대하는 게이머들은 그리 많지 않다. 무언가 성과가 있고 그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게이머들이 그것을 인지하고 있다면, 과거처럼 이 법률 개정안이 상당한 반대에 부닥치거나 몇 년간 유예하고 결과를 더 보자는 여론이 높았을 것이다.

특히 이번 사건 중간중간에 나온 ‘영업 비밀이라 공개할 수 없다’ 라거나 ‘결제 태도’와 같은 멘트들은 게이머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셈이 되어 버렸다.

‘내 돈 주고 내가 사는데 왜 제품의 성분과 품질(=확률)을 몰라야 하지?’라는 말 앞에서 영업 비밀이라는 명분은 퇴색된다. 게임의 소스 코드, 기획안 같은 것들이 영업 비밀이지, ‘뽑기’의 확률은 영업 비밀이 아니다. 내가 내 돈으로 게임 아이템 구매하는 데 왜 ‘태도’ 운운하며 진상 취급을 당해야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아이템조차도 낮은 확률의 운에 기대어 얻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유들로, 확률 공개를 추진하는 개정안에 대한 반대 명분은 별로 없다. 그리고 그것은 몇 년간 누적된 자율 규제의 실패와 ‘뽑기’의 상업적 성공이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5. 사료, 난민, 흑우: '집단 지성' 혹은 '집단 무의식'

가끔 새로운 단어가 유행하는 것을 보면서 오싹할 때가 있다. 반 농담으로, 반 자조적으로, 혹은 비유로 시작된 단어가 공감을 얻고 자연스레 퍼지는데, 그 단어 자체가 본질을 관통하고 있을 때이다.

게이머들이 접지 않고 계속하도록, 혹은 무언가 사건 사고가 터졌을 때 이를 무마하기 위해 게임사가 뿌리는 캐시 및 아이템에 해당하는 ‘사료’라는 단어가 있다. 호구처럼 계속 당하면서도 게임을 계속하고 결제를 또 하는 게이머 스스로에 대한 자조적 표현으로 호구를 변형한 ‘흑우’라는 단어도 있다.

이 사료와 흑우라는 단어는 장기간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많은 돈을 결제하고 있음에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지갑만 공출당하는 신세에 대한 풍자일 것이다. 대다수의 게이머는 스스로가 별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음을 이미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런 표현을 사용하자마자 곧바로 널리 퍼져서 일상 용어처럼 사용하게 되었으리라. 이번에는 진짜 울타리를 들이받고 뛰쳐나오는 일이 발생해 버렸지만.

‘난민’이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다. 본의 아니게 고향을 잃어버린 보트 피플처럼, 오랫동안 정든 게임을 떠나 다른 게임으로 이주하는 게이머들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던 게임을 접고 다른 게임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실이지만, 난민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뉘앙스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원래 하던 게임은 마치 고향처럼 그리워하는 대상이고, 마음 한 켠에 언젠가는 다시 돌아갈 수 있다 혹은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이 남아있다는 말로 읽히기도 한다. 스마우그 때문에 외로운 산을 떠난 난쟁이들처럼, 마기에 세계수가 침식되어 숲을 떠나온 엘프들처럼 말이다.

이번 사태가 발생한 뒤, 그간 익숙하게 접하던 사료, 흑우, 난민이라는 단어를 보니 문득 그 의미가 새로워졌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 자연스레 불리던 참요들처럼, 최근 몇 년간의 상황에 대해 게이머들이 무의식적으로 깨닫고 있던 것들을 집단 지성을 통해 표출해 낸 것이 아닐는지.

▲ 메이플스토리 인벤에서 많은 공감을 받았던 한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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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료 말고 정식으로 대접해야 할 때!

앞으로는 유료 아이템 전부, 그리고 무료라 할지라도 게임 내에서 중요 기능을 하는 확률은 모두 공개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법률 개정안이 통과되든 통과되지 않든 간에 그래야 살 수 있다.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어 버렸고, 이렇게 될 때까지 트럭은 앞으로도 자주 판교를 오갈 것이다.

하지만 공개하는 그 순간 문제가 종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간 확률에 대해 쌓인 많은 불신도 해결해야 할 숙제이다. 게임사가 확률을 공개한다고 해도, 오랜 기간 이루어진 임의적인 확률 변경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게이머들에게는 그게 진짜 맞냐는 의구심이 상당 기간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다른 제품은 성분이든 품질이든 객관적 검사가 가능하지만, 게임의 경우 그게 쉽지 않다는 특징도 있다. 매번 패치 때마다 제 3자가 소스를 뜯어볼 순 없는 노릇이고, 몰래 잠수 패치를 하는 경우는 잡아내는 것도 쉽지 않다. 따라서 앞으로 상당 기간 확률 공개는 물론이고, 공개한 확률에 대한 신뢰성을 차근차근 쌓아나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 뽑기 상품의 가격도 조정되어야 하고, 뽑기 상품의 축소도 동반되어야 한다. 뽑기 상품 자체를 폐지할 필요는 없겠지만, 너무 많은 뽑기와 비싼 가격은 이런 저항을 반복적으로 발생시킬 것이다. 쉽게 말하면, 뽑기 상품으로 그간 너무 많이 먹었다. 적당히 먹는 것이 제일 좋다.

시간이 지나 여론이 진정되기만을 바라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 1년 반 전쯤, 에픽세븐에서도 누적된 불만이 터져 나온 적이 있었고 큰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사태의 수습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사태 이후 게임사가 보여준 모습은 하나의 참고사례가 될 것이다. 사태 이후 이루어진 간담회는 나름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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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게이머들의 액션 자체가 달라졌다. 단순히 게시판이나 유튜브 등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게 아니라, 소비자로서의 권리와 의사표현을 오프라인에서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반대로 칭찬받는 사례도 있다. 로스트아크처럼 게이머들의 만족도가 높은 경우, PD에게 커피를 보내자는 말도 나올 정도니까.

불만 표출이든 칭찬이든, 모두 소비자들이 본인의 돈을 써가며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것이 2021년 게임 소비자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그간 게임 소비자들은 자조적으로 사료를 먹은 흑우와 난민을 오가고 있다고 표현했지만, 이제부터라도 사료가 아니라 ‘정식’을 잘 대접한다면, 개발자들이 커피가 아니라 소고기를 선물로 받게 되는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