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백은 타격 훈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지만, 그냥 넙죽 맞아주기만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 기구입니다. 실제 격투기나 싸움에선 누가 떄린다고 곧이곧대로 맞아주기만 하는 경우는 드물고,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반격까지 고려해서 회피 및 스텝 연습 등도 뒷받침이 되어야 하죠. 때로는 실제 반격을 상정해서 미트 트레이닝이나 스파링 등을 해야 그 일련의 흐름에 대해 이해할 수 있고요.

미국의 실내 시뮬레이팅 제조사인 스카이테크 스포츠는 이런 고민에 대한 해결책으로 '봇 복서'를 지난 CES 2019에 처음으로 공개했었습니다. 센서를 통해 복서의 움직임과 펀치를 감지한 뒤에, 하단에 장착된 모터로 빠르게 회피한다는 원리로 사용자의 훈련을 돕는 기구죠.

이번 CES 2020에서는 기존보다 한 층 더 강화되어서 돌아왔습니다. 기본 메카니즘은 동일하지만, 좀 더 재미있게 트레이닝할 수 있도록 게임을 곁들인 것이죠. 하나는 좀비의 공격을 피하면서 KO시키는 게임이고, 또 다른 하나는 AR 글래스를 쓰고 가상의 복서와 한 판 승부를 벌이는 게임이죠.

▲ AR 글래스 없이 좀비와 한 판 하거나

▲ AR 글래스 끼고 복서와 상대해야 합니...아 글러브터치 때 주먹날리다니 노매너네

좀비 게임은 AR 글래스나 별도의 외장 센서 없이 봇 복서 샌드백을 스크린에 연결해서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원형의 링에 매판마다 좀비가 올라오고, 그 원 안에서 좀비는 피했다가 상대방을 공격했다가 하죠. 좀비가 피할 때는 샌드백도 뒤로 움직이는데 이때는 쳐도 점수를 얻지 못합니다. 좀비가 어느 정도 앞에 있을 때 쳐야만 공격이 들어가는 만큼, 이를 잘 파악하고 공격해야 하죠.

기본적으로 유저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센서가 봇 복서에 내장되어있는 터라 상체의 움직임만으로도 좀비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좀비의 공격 자체는 생각보다 빠르진 않아서 어느 정도 적응하면 복싱 만화에서처럼 스웨이만으로 회피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죠. 그렇게 흘러가는 걸 막기 위해서인지, 너무 오랫동안 좀비쪽에 가까이 붙어있으면 유저가 데미지를 입도록 설정을 해뒀습니다. 그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어? 언제 이렇게 달았어?"라는 생각이 들긴 했죠.

또 한 가지, 좀비의 움직임에 너무 신경 쓰다보면 샌드백이 어느 정도 뒤로 갔는지 파악하기가 좀 어려웠습니다. 어느 정도 앞으로 쏠려있는 상태에서만 피해를 입힐 수 있는데, 그 정도가 가면 갈수록 미묘해져서 이게 왜 안 맞지? 싶었죠.

▲ "어딜 치시죠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 의외로 이런 식으로 자주 농락당합니다.

그에 비해서 AR 글래스를 끼고 가상의 복서와 스파링하는 게임은 왜 타격을 못 했는지, 혹은 왜 맞았는지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상대 복서가 막 더킹에 위빙, 스웨이까지 현란하게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뒤로 빠졌다거나 앞으로 와서 공격한다거나 하는 움직임은 파악할 수 있었거든요. 그에 상관없이 샌드백을 마구 두드려서 어쨌든 이기고 보는 사람도 종종 보였는데, 상대방에게 맞으면 맞을수록 점수가 깎이기 때문에 고득점을 위해선 적절히 치고 빠지는 요령이 필요했습니다.

상대방 복서의 움직임이 실제와는 좀 달라서 아쉽기는 한데, 그래도 피하면서 공격하는 적을 상대한다는 느낌은 차고 넘치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VR 복싱과 달리 AR이기 때문에 주변 환경에 대해 확실히 인지한 상태에서 플레이할 수도 있고, 실제로 샌드백을 두드리는 손맛도 있다보니 플레이하는 맛도 살았고요.

▲ 다시 봐도 Play of the Game감이군요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샌드백 받침대 부분이 상당히 커서 인파이팅을 할 때 조금 걸리적거린다는 점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밀착해서 때리는 어퍼나, 사이드로 파고들려고 할 때 자꾸 발이 걸려서 집중력이 흐트러졌거든요. 물론 하다보면 익숙해지는 것이기도 하고, 실제 샌드백과 비교해보면 그 받침대가 그리 큰 것도 아니라서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진짜 문제는 기기가 19,900달러(한화 2,350만 원)이나 한다는 거죠. 즉 가정용으로 쓸 만한 물건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만 출시된 상태죠.

어쨌든 별도의 외장 센서 없이 유저의 동작을 꽤나 잘 인식하고 그에 맞춰서 움직이는 기술을 보여줬다는 것과, 본래 목적에 맞는 재미를 줬다는 점에서 '봇 복서', 꽤나 괜찮은 물건이었습니다. 아마 집에다 들여놓고 할 일은 없겠지만, 테마파크나 그런 곳에서 있으면 꽤나 관심을 보일 물건 아닐까 싶습니다.

아, 물론 너무 열이 받은 나머지 멱살 잡고 패듯이 잡아서 두들기면 곤란합니다. 그런 경우를 스카이테크 스포츠에서도 상정해뒀기 때문에 내구도를 높였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복싱 스킬 훈련을 돕기 위한 물건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고장난 건 무료 AS가 어렵다고 하거든요. 비싼 물건인 만큼, 취급에 주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