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담에 대해 ‘매니아’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큼은 아니지만, ‘건담을 사랑하는 유저’라는 표현은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할 만큼 건담을 좋아한다. 1988년 이후 22년 만에 우주세기가 다시 시작되기 전, 정식 세계관은 섭렵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79년 작품인 초대 건담 애니메이션을 전부 보았고 비우주세기 작품도 골라 골라 시청했다. 프라모델은 워낙 비싼 취미라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몇 개는 구입했고, 언젠가는 VR로 콕핏에 앉을 수 있을 거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건담 게임이 새롭게 출시될 때마다 눈여겨보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내 인생 최고의 건담 게임은 소프트맥스에서 개발한 ‘SD건담 캡슐파이터’였다. 비록 게임 내에 오류도 많았고 운영 면에서도 높은 점수를 주긴 힘들었지만, 근-원거리를 가리지 않는 특유의 찰진 타격감과 버그까지 컨트롤로 승화시켜내는 뉴타입들과의 대전, 개성 넘치는 건담들을 직접 조종하는 것에 대한 기쁨 등, SD건담 캡슐파이터를 통해 느낀 재미는 또래 친구들의 한심한 눈초리와 PC방 초등학생들의 선망의 눈길을 모두 감내하기에 충분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E3 2017 현장에 전시된 여러 대작보다 전시관 한쪽에 조그맣게 자리 잡은 건담 versus 부스가 먼저 눈에 보인 건, 캡슐파이터가 사라진 이후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던 내게 ‘혹시 이번에는’ 이라는 기대감이 남아있었기 때문인 듯싶다.

홀린 듯 조이스틱을 잡고 건담 세계로 빠져들었지만, 조금씩 아쉬운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빔 라이플의 유탄은 빛이 아닌 바주카처럼 느리게 날아갔다. 기체의 상승과 하강에 사용되는 부스터는 왜 오른쪽 스틱을 사용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R1과 R2로 사용했다면 조작이 더 쉽지 않았을까? 버튼마다 무장이 잔뜩 들어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화끈한 액션이 나오진 않았다.


내 기준이 ‘SD건담’에 맞춰져 있기에 이질감에 거부 반응이 들었을 수도 있다. 이런 조작에 이미 익숙한 유저라면 나름의 재미를 느낄 수도 있을 듯 싶다. 어찌 됐든 나에게는 옛사랑을 잊을 만큼 아름답고 새로운 연인은 아니었다.

건담의 새로운 신작이 발매될 때마다 아쉬웠기에 가끔은 제작사를 원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곧 클로즈베타에 들어가는 반다이남코의 신작 ‘드래곤볼 파이터Z’는 20년도 더 된 만화의 화풍을 살리면서도 마치 새로운 게임을 하는 듯 디테일을 잘 담았다. 미국 현지에서는 이번 신작 ‘드래곤볼 파이터Z’가 격투 게임의 새바람이 될 것이라 예측하는 중이다.

반다이남코가 옛것을 새롭게 느껴지도록 만들 만큼의 능력을 갖추고 있음이 증명됐지만, 유독 건담 게임은 발매되는 게임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발전이 눈에 띄지 않는다. 건담이 더이상 주류 문화는 아니라는 생각에 그만한 위험을 부담할 순 없다고 판단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매번 비슷한 종류의 게임을 ‘매니아들은 사주겠지’라는 생각으로 발매하는 것은 지나치게 셈이 보이는 행동처럼 느껴진다.

건담도 드래곤볼만큼 좋은 소재다. 건담 애니메이션은 여전히 다른 시리즈가 계속 발매되고 있고, 왠만큼 큰 규모의 쇼핑몰에는 어김없이 건담 프라모델 상점이 들어서 있다. 건담을 사랑하는 유저가 줄어든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게임사가 그만큼 좋은 작품을 만들지 못한 이유도 분명 존재한다. 건담을 사랑하는 이가 이제는 소수 매니아들뿐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판단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반다이남코가 이런 비슷한 종류의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유저에게 빚을 진다는 생각을 했으면 한다. 그리고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유저에게 언젠가는 화끈하게 보답할만한 ‘역작의 건담’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언제든 콕핏에 탑승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뉴 타입들에게 만족할만한 전장이 펼쳐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