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그에게 '하루'란 그저 또 한 번의 순환에 불과하다. 매일 아침이면 그가 일하는 병원에 들러 진료를 하고, 주에 한 번은 응급실에서 간혹 오곤 하는 긴급한 환자들을 본다. 하수상한 시절이다 보니 응급 환자들은 꽤 되는 편이었다. 매 번 오는 이유는 서버 문제나 자잘한 버그였지만.

금요일은 조금 다르다. 금요일은 제 4병동의 회진이 있는 날이다. 삶보다 죽음이 더 가까운 이들. 다가올 서비스 종료의 순간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가쁜 숨을 이어가는 이들이다.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그 죽음의 책임은 그들에게 있으니까. 그리고 오늘. 그는 또 한 명의 환자를 만났다.


"선생님. 오늘 보실 환자분 차트 준비됐습니다."

"이 동네는 왜이리 죽어나는 게임들이 많은지... 오늘은 병명이 뭔가"

"일단 이것부터 말씀드릴게요. 지금 보실 환자는 미숙아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칠삭둥이라도 되는거야?"

"아뇨. 오삭둥이라 해도 믿으실거에요. 그래서 날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어요."

"부모가 문제가 있나? 개발 기간이 얼마나 되는데?"

"음... 일단 공식적으로는 5년이요. 어머니가 몬트리올 스튜디오인데 난산으로 해체되어버렸어요."

"5년동안 개발했는데 미숙아가 나왔다면 나같아도 해체될것 같군. 환자명이 뭐지?"

"부제까지 붙여드릴게요. 매스 이팩트: 안드로메다입니다."

"아... 들어본 바가 있지. 오늘 볼 환자가 그 환자였구만. 알겠네."


조금 남은 꽁초를 손가락으로 튕겨냈다. 미처 타지 않은 담뱃잎들이 부산히 날렸다. 마치 앞으로 보게 될 환자의 완성도처럼. 그러다 결국은 빗물에 젖은 바닥에 닿아 똑같이 젖어들었다. 그리곤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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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많은 분의 기대를 깨버린 것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변명하자면, '그 게임'은 아직 안 다룬 거지 안 쓸 생각은 아니에요. 지금도 머릿속에서 갖가지 드립들이 쑴풍쑴풍 나와서 주체하기가 힘들 정도지만, 조금 더 냉정한 시선에서 보기 위해 한 주는 좀 편한 게임으로 가려고 합니다. 원래는 '그 게임'을 이 기획의 끝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게임으로 쓰려 했는데 친구들, 동료 기자, 하다못해 게임업계 지인들까지도 '언제 나옴?'을 말하는 바람에 저도 빨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오늘은 다른 게임을 먼저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 오늘의 주제.

지난주에 '로브레이커즈'를 말씀드리면서 제가 많이 기대한 게임이라고 말씀드렸었죠. 하지만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편의상 그냥 안드로메다라고 하겠습니다)는 그와는 조금 달랐어요. 기대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에요. 매스 이펙트 3부작은 제 인생에 단비처럼 나타났던 제 인생 게임입니다. 인생 게임이 너무 많아서 50회차 정도 산 것 같은데 그래도 누가 제게 인생 게임이 뭐냐고 물으면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매스 이펙트 3부작이라고 해요.

심지어 3편의 엉망이라는 엔딩도 전 좋았습니다. 그냥 그 3부작의 모든 것을 사랑했어요. 그러고 보니 유튜브에서 어떤 영상을 보았는데, 미국식 '너드'의 모습으로 소개팅 자리에서 매스 이펙트 얘길 하는 남자가 나오더군요. 그 영상 안 봤다면 지금도 여자친구한테 매스 이펙트 영업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만큼 사랑했어요. OST는 휴대전화 벨 소리였습니다. 영상을 보고 그만뒀지만.

그러니 이 말부터 할게요. 바이오웨어,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네? IP 가지고 있으면 다예요? 이 명작 시리즈에 왜 이렇게 크게 똥을 발라 놨어요? 누뗄라인줄 알았다는 핑계 대지 마요.

환자 차트


사진(규격 사이즈에 맞춰 붙여주시기 바랍니다)

이름: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Mass Effect Andromeda)

출생: 2017년 3월 21일(만 1.5세)

가족관계: 부(EA), 모(바이오웨어 몬트리올 스튜디오), 전설이 되어버린 형제(셰퍼드 3부작)

확진 시기: 2017년 3월

병명: 발육 부진, 동태눈

원인: 개발 노선 난항, 지나친 정치적 올바름 강요

완치 가능성: 0%(마지막 패치 완료)

예상 사망일: 미정


자 환자 차트부터 봅시다. 일단 안드로메다는 예상 사망일이 없습니다. 온라인 게임이 아니니 서비스 종료는 없어요. 제가 지금까지 망겜의 법칙에서 다룬 게임들은 전부 다 서비스 종료일이 확정된 게임이었고, 앞으로도 그런 온라인 게임들을 위주로 다룰 테지만, 간혹 이런 일도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안드로메다가 멀쩡히 살아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누군가의 마음속에 살아 있을 뿐이죠.

냉정히 말하자면, 안드로메다는 심각하게 나쁜 게임은 아닙니다. 다른 게임들과 비교하면 그냥저냥 할만한 평작 정도는 되는 편이에요. 막 압도적으로 재미있지도, 인상 깊지도 않지만 할 만합니다. 셰퍼드 3부작을 즐기지 않은 분들에게는요. 하지만 이 게임이 '망겜'인 이유는 이게 그냥저냥 할만한 게임으로 만들어져서는 안 될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매스 이펙트' 시리즈는 엄청난 팬덤을 자랑합니다. 'N7 데이'라고 기념일도 만들 정도예요. 이 정도 팬덤을 가진 게임은 북미에선 기껏 해봐야 헤일로 정도입니다. 그 팬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어요. 그렇다고 개발 환경이 나빴나요? 바이오웨어면 EA DICE와 함께 EA의 왼팔과 오른팔이라 해도 무방해요. EA 내에서는 최고급 대우를 받는단 겁니다. 그럼 시간이 모자랐을까요? 5년이에요. 셰퍼드 3부작이 끝난 후 5년이 지났습니다. 5년이면 콘솔 세대가 바뀔 시간이에요. 근데 그 시간을 지나고 그 대우를 받으면서 게임을 이렇게 만들어요?

▲ 이 게임은 망하면 안되는 게임이었어요.

솔직히 처음엔 어지간히 망해도 나라면 재밌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만큼 팬이니까요. 근데 게임 시작하고 이틀째에 머물자 딱 이런 느낌이 들었어요. 도우가 쫄깃하고 매우 맛있는 피자집이 있습니다. 너무 맛있어서 도우만 따로 시켜 먹을 정도였어요. 5년 만에 그 피자집을 다시 찾았는데 아니 이게 뭐람? 메뉴가 죄다 떠먹는 피자가 되어버렸네요? 대충 이런 느낌이었어요. 그럼 이제 차근차근 살펴보죠.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가 왜 팬들로부터 외면당했는지, 이제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오픈월드로서의 나인가, 액션 어드벤쳐로서의 나인가
시나리오가 무너지고, 매력도 같이 무너지고


일반적으로 안드로메다가 망한 이유에 대해 대다수 분은 인물 모델링이 이상하고, 불쾌한 골짜기가 보이고, 시나리오가 빈약하다 정도의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다 사실이에요. 이건 밑에서 다시 이야기를 나눌 주제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안드로메다가 진짜 팬들에게 외면당한 이유는 그게 아니에요. 안드로메다가 예전 셰퍼드 3부작의 장점을 그대로 포용했다면, 설령 모델링이 더 개판이었다 해도 할 사람들은 했을 겁니다. 저 또한 재밌게 즐겼을 거고요.

하지만 결과물은 그렇지 않았어요. 무엇이 문제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릴게요. 기존의 매스 이펙트 시리즈는 몇 가지 특징이 있어요. 그걸 카테고리화해서 나열하면 이렇게 쓸 수 있습니다.

- 다양한 조연들이 등장하며, 이 조연들의 스토리 비중이 꽤 크다.

- 전체 시나리오는 큰 대주제가 있다.

- 각 조연들에게 할당된 시나리오는 병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 조연 시나리오에서 게이머의 선택 여부에 따라 조연이 사망할수도, 혹은 적이 될 수도 있다.

- 최종장에 이르면 그간 게이머가 쌓아온 업적과 조연들의 생사 여부, 그리고 관계에 따라 결말이 난다.

- 각 조연에 대한 시나리오와 메인 시나리오를 제외하면, 비중이 큰 콘텐츠가 없다.


매스 이펙트는 오픈 월드 게임이 아닙니다. 생긴 것만 보고 착각할 수 있지만, 게임의 진행 플로우는 '스카이림'보다 '콜오브듀티'에 훨씬 가까워요. 다만 차이점이라면 최종장에 이르는 과정에서 게이머가 많은 선택을 할 수 있고, 병렬적으로 놓인 임무들을 원하는 순서대로 수행할 수 있다는 겁니다.

▲ 인물간의 드라마가 게임의 핵심이었어요.

결국 '매스 이펙트' 시리즈에서 중요한 건 광활한 우주를 떠도는 모험이 아니라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 사이에 얽힌 드라마입니다. 이들과 어떤 관계가 되고, 이들과 어떤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서 게이머는 게임을 할수록 주인공에게 몰입하게 됩니다. 최종장에 이를 때가 되면 자신도 모르게 주변 인물들에게 정이 들어버려요. 우주의 광활함과 자유로운 모험은 게임의 '주'가 아닙니다. 그냥 이 드라마를 쓰기 위한 무대에 불과하죠. 게이머가 주인공의 심리에 너무 강하게 몰입되다 보니 그냥 진짜 우주를 돌아다니는 느낌이 들 뿐이에요.

이런 디자인은 매스 이펙트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북미에서 유명해지고 세계적 팬을 지닌 SF 프렌차이즈는 전부 다 이렇습니다. '헤일로'도 링월드의 압도적인 모습과 설정들이 굉장히 잘 짜여 있을 뿐 결국 정해진 시나리오를 따라가는 레일 슈터고, 영상 매체인 스타워즈도 그래요. 스타트렉은 조금 오픈 월드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건 영상물이니 애초에 드라마일 수밖에 없죠.

근데 안드로메다는 오픈 월드를 만드는 걸 택했어요. 아니 잘 만들면 말도 안 해요. 오픈 월드로 만들려다가 '헤헤 이게 아닌가?'하면서 어색하게 다시 뒷걸음질친 것만 같은 이상한 반오픈 월드를 만들어버렸습니다. 이 시스템에 설정을 또 맞추려다 보니 '위기에 빠진 우주 구원'이 주제였던 전작들과 달리 '뭔지 모를 세계 탐험'이 게임의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주변 인물들과 퀘스트는 클리셰 덩어리에 완성도가 떨어지고 주변 인물에 대한 정도 잘 붙지 않아요.

▲ 세상에서 가장 영양가 없는 오픈월드

이건 굉장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게임 플레이에는 '정당성'이 있어야 해요. '내가 주인공을 이렇게 조작해야 하는 이유'가 필요한 겁니다. 안드로메다는 그게 터무니없이 약해요. 전작의 셰퍼드는 아무도 몰라주는 상황에서 우주를 구하기 위해 진짜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습니다. 그 과정이 워낙 긴박하고 절망적이다 보니 게이머조차도 그 감정에 동화되어 버렸어요. 하지만 안드로메다는 긴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게임은 여유만만 우주 모험기가 되어 버렸죠.

이렇게 되면서 전작의 수많은 매력 포인트들이 소실되어 버렸습니다. 기존 매스이펙트 시리즈가 병렬적 구조이긴 했지만, 그 서브 시나리오들은 전부 다 완성도가 높았습니다. 투창카의 제노페이지 관련 퀘스트나 탈리 조라와 게스 퀘스트를 해보신 분이라면 아실 거에요. 마지막 플레이가 5년이 넘었음에도 아직도 기억날 정도로 뛰어난 완성도의 시나리오들입니다. 이것들이 매스 이펙트 시리즈의 힘이었고, 매력 포인트였어요. 하나하나가 똥줄이 타들어 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사건을 해결해가면서 모이는 동료, 그리고 싹트는 우정과 애정이 매스 이펙트의 핵심이었죠.

▲ 이 땐 진짜 절망적인 분위기가 딱 와닿았었죠.

하지만 안드로메다는 뛰어난 시나리오도, 계속 움직여야 할 충분한 동기 부여도 없습니다. 게이머는 이상할 정도로 넓은 필드를 돌아다니면서, 랜덤 생성도 아닌 광물을 계속 캐야 하고, 계속 같은 자리에서 리젠되는 적들을 지루하게 상대해야 합니다. 이게 반복되다 보면 점점 시나리오 진행에 대한 동기가 사라지고, 마지못해 꾸역꾸역 메인 시나리오를 진행하게 되죠. 말로는 위급하다고, 네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별 쓸모없는 일들을 죄다 하고 다니니 주인공의 목적도 갈 길을 잃고 게이머의 의지도 갈 길을 잃어버립니다. 시나리오에 관한 얘기는 밑에서 더 하도록 하죠.


아니, 정체성이고 뭐고 그냥 게임을 못 만들었어요
몇 번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대체 왜 이렇게 만들었지?


그럼 게임 내부를 좀 살펴봅시다. 솔직히 살펴본다고 마음에 드는 구석이 보일 것 같진 않지만요. 먼저, 안드로메다의 가장 큰 문제는 게임의 중심이 될 시나리오가 망했다는 겁니다. 이게 왜 큰 문제인지는 앞에서 말씀드린 '매스 이펙트'가 어떤 게임인지 생각해보면 됩니다. 매스 이펙트는 시나리오가 중심이 되는 게임이에요. 우주 오픈 월드를 할거면 노맨즈스카이를 하면 됩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서 설명해 드릴게요.

※ 이 밑으로는 스포일러가 꽤 포함됩니다. 사실 중요하진 않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주인공 '라이더 남매'의 직책은 '패스파인더'입니다. 설정상 이 '패스파인더'는 전 우주의 탐험과 수색, 나아가 무력까지 행사할 수 있는 우주 모험 보안관들인데 이 패스파인더가 되는 과정이 기가 막힙니다. 원래는 아버지의 직책인데 모종의 일로 아버지가 죽게 되자 그 자리에서 본인 의지도 없이 물려받아요. 아니 이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니잖아요. 자기 아들이라고 그냥 시켜주면 되는 거에요?

▲ 잠들었다 깨보니 이세계의 패스파인더가 되버린 건

이 '패스파인더' 말이죠. 종족별로 단 한 명밖에 없어요. 설정이 그렇습니다. 근데 그 단 한 명 있는 직책을 마치 김씨 왕조 정권 이양하듯 물려받습니다. 뭐 죽기 전에 어쩔 수 없이 물려준 거긴 한데 그걸 누구나 이견 없이 받아들이는 건 좀 너무하잖아요.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전개인데 말이죠. 패스파인더의 징표는 녹색 반지쯤 되는 걸까요? 아니 하다못해 그 녹색 등불도 훈련받는다고 오지게 맞았습니다.

▲ 죽을 때 되면 아무나 붙잡고 물려주는 그런 겁니까?


그리고 나서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우주를 박살 내고 다니다가 그 와중 만난 우주 친구들에게 종족별로 패스파인더 권한을 줘버립니다. 지가 뭔데요? 설정상 주인공은 그냥 해군 출신이에요. 셰퍼드처럼 N7 출신에 온갖 우주의 위기를 겪은 것도 아니고 그냥 후방 내무실에서 후임들한테 바둑알 뿌리면서 드래곤볼이나 찾으라고 하다가 운 좋게 아버지 따라 안드로메다로 온 건데, 갑자기 인류의 첨단이 되어버리고 다른 친구들에게 완장을 채워주며 갑질을 합니다.

차라리 미숙한 상태로 얼떨결에 패스파인더용 Ai인 SAM을 이식받고, 시나리오를 진행하면서 점차 패스파인더의 자질을 찾아간 끝에 엔딩에서 패스파인더가 되는 줄거리였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미숙한 주인공이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그리면서 입체적인 성격도 만들어주면 진부한 줄거리라 해도 재미는 있거든요. 어차피 지금도 진부한데 안 될 건 뭐에요? 주인공이라고 일단 감투 한번 씌워주는 걸 보니 시나리오 디렉터가 감투에 대한 환상이 좀 있나 봅니다.

게임 내에서 주적이 되는 '켓'들의 설정도 좀 문제가 있습니다. 이 '켓'들은 안드로메다 원주민으로 등장하는 '앙가라'를 강제로 변형해서 만든 존재들인데, 스토리 진행에 따라 주인공의 친구 종족들도 하나씩 납치되고 변화해버려요.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거잖아요? 바로 전작인 셰퍼드 3부작의 주 적이었던 '리퍼'가 딱 이 모양새입니다. 그 친구들도 납치해서 변신시키는 걸 참 좋아했는데, 이번 작품도 똑같네요. 차라리 리퍼는 '항거할 수 없는 적'이라는 느낌이라도 있었지 이 친구들은 말로만 무섭다 무섭다 하지 게임 내에서 만나면 호구가 따로 없어요.

▲ 얘들이 적이라고 나옵니다. 긴장이 1도 안돼요.

'렘넌트'도 한 번은 짚고 싶었어요. '렘넌트'는 아무도 그 정체를 모르는 미지의 기술인데, 엄청나게 거대한 기계 덩어리가 행성에 박혀서 행성을 조작하고 있는가 하면 아예 행성이 이 렘넌트로 이뤄진 경우도 있어요. 게임 내에서는 주로 적으로 나오고 드물게 엄청나게 거대한 렘넌트도 상대하게 됩니다. 이 녀석들을 '아키텍트'라고 부르는데 솔직히 전 처음 만나고 충격적이었어요. '이런 거대 보스가?!' 하는 충격이었죠. 문제는 이 녀석들이 최종 보스보다 훨씬 세기 때문에 이 녀석들을 잡으면 지루함만 남는다는 걸 너무 뒤늦게 알았다는 겁니다.

▲ 최종보스보다 더 센 이건 그냥 지나가는 특수몹... 이게 게임이냐.

하여튼, 이 강렬한 인상과 꾸준한 마주침 때문에 저는 마지막에 가서 이 렘넌트에 대한 비밀이 풀리길 기대했어요. 솔직히 제가 이 게임을 계속 플레이한 이유도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엔딩을 봤는데... 아직도 렘넌트가 뭔지 모르겠어요. 후속작을 위한 거대한 떡밥인 것 같은데 이걸 언제쯤 알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EA가 매스 이펙트 프로젝트를 죄다 동결해버렸거든요. 그냥 렘넌트 이름 이거로 바꿔버리죠. '스팅레이'로.

그렇다고 게임 시스템이 재미있느냐? 하면 그것마저도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반쯤 만들어진 엉성한 오픈 월드는 랜덤 요소가 하나도 없으므로 지루함만 불러내고, 전투는 진짜 단순하기 짝이 없어요. 적들의 패턴도 뻔하고, 말이 외계인이고 우주종족이지 그냥 껍데기만 조금 다른 인간들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색다른 맛도 없죠. 적당히 은폐 엄폐 사격만 하고 이펙트도 없는 스킬 몇 번 날려주면 끝납니다. 스킬 이펙트가 2011년하고 변한 게 없어요.

1편의 감성을 어쩌고 하면서 만든 자동차 '노매드'도 진짜 끔찍하게 모는 재미가 없어요. 길이 뭐 운전하기 엄청 좋게 되어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조금 운전하고 내리고 싸우고 일보고 또 운전하고의 반복인데 그냥 맵을 좁게 만들었으면 차도 꼭 탈 필요 없고 좋은 것 아닌가 싶네요. 왜 굳이 재미없는 걸 넣으려고 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이래서 제가 차를 안 사고 있는 겁니다. 주차하기 귀찮기만 하지 쓸모가 없어요.

▲ 귀찮음만 주는 차까지

시나리오와 설정, 시스템에 이렇게 문제가 많은데 그것뿐만도 아니에요. 안드로메다 출시 이후, 가장 먼저 가시적인 문제가 되었던 인물 모델링은 진짜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직도 절 바라보던 그 NPC들의 동태 눈깔이 생각나요.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없는 게 마치 '에일리언 아이솔레이션'에 나오던 안드로이드들을 보는 느낌이었죠. 우주에 그런 친구들하고 저만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오싹한 게 또 없어요.

다행이도 이 인물 모델링에 대한 문제는 사후 패치를 통해 많이 해결되었습니다. 주인공의 얼굴색만 살짝 바꿨을 뿐인데 아버지가 백인 미남에서 웬 마오리족 추장님이 되시는 이상한 점들이 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을게요. 그러니 모델링에 대한 이야기는 짧게 넘어가도록 하죠.


PC? 좋아요. 근데 왜 이렇게 넣었어요?
왜 보편적 시각이 아닌 너만의 PC를 넣는건데요?


하지만 이 문제는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안드로메다가 또 욕을 먹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과도한 PC에 대한 집착입니다. 여기서 PC는 컴퓨터 말하는 게 아니에요. 'Political Correctness'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실 PC의 의도 자체는 나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만, 여기선 누가 봐도 바이오웨어가 심하게 욕심을 부린 것이 보여요.

오늘날 게이머들은 게임 내 PC적 요소에 대한 피로감이 상당히 높습니다. PC의 묘사에 집착한 나머지 게임성이 떨어져 버린다거나, 게임 내에서 괴리감이 생기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비교적 최근에 일어나는 일인데, 사실 이런 사례는 다른 미디어에서도 흔히 보입니다. 전 연극판 해리 포터에서 헤르미온느가 흑인이 된 걸 보고 기절할 뻔했어요.

▲ 이분이 연극판 헤르미온느입니다. 뭐 이건 그럴 수 있어요.

저도 욕먹기는 싫으니 정확하게 말씀드릴게요. 안드로메다의 문제는 'PC를 넣었다'가 아니라 'PC를 잘못해서, 그리고 과도하게' 넣었다는 겁니다. 일단 캐릭터 커스터마이징부터 보죠. 남성 캐릭터인 스콧 라이더는 비리비리해 보일 정도로 마른 편인데다 미소년에 가까운 미남입니다. 아버지한테 AR 장비를 받는 일만 없었어도 총보다는 마이크를 잡고 방탄우주단이 되었을 겁니다. 반면 여성 캐릭터인 새라 라이더는 그냥 여캐입니다. 그냥 평범하게 생겼죠. 남성 캐릭터는 떡대와 근육 등 남성성을 강조하고, 여성 캐릭터를 미형으로 그리던 게임업계의 시선을 완전히 반대로 비꼬아놨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잘한 것 같죠? 아니에요.

▲ 총 대신 마이크 들고 방탄우주단 하면 되는 남자 주인공

이 게임 내 여성에 대한 묘사는 엄청나게 많은 이슈가 됐습니다. 아니 세상에 캐릭터를 일부러 못생기게 만드는 사람하고 예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 중 누가 더 많겠어요. 여기서 커스터마이징은 일회용도 아니고 그 긴 플레이 시간을 함께 할 게이머의 아바타란 말이에요. 누가 봐도 안드로메다의 여성들은 하나같이 못생겼고, 심지어 개발자들도 '일부러 못생기게 디자인해야 하는 사내 분위기가 있었다'라는 내부 고발을 할 정도였어요. 제가 그간 망한 게임들을 자주 봤고, 개발진의 실수들도 많이 봤지만 이렇게 망하고 싶어서 용을 쓰는 개발진은 처음 봐서 뭐라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다 보니 게임 설정도 비틀어져 버립니다. 게임 내에서 만나는 '아사리' 동료인 '피비'가 대표적이죠. 설정 상 아사리는 전원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그들끼리도 동성 번식이 가능하고, 타 종족에겐 가장 매혹적인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에 종족을 불문하고 아사리에게 성적 매력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2차 창작이나 크로스 미디어에서 아사리는 푸른 피부임에도 굉장한 미모를 가진 것으로 묘사되고, 실제로 전작들의 아사리는 꽤 매력적이었어요. 그리고 안드로메다에 등장하는 피비는... 솔직히 너무 못생겼습니다. 그리고 이게 모든 종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인상이랍니다. 그 '모든 종족'에 저는 포함이 안 되나 봅니다. 이렇게 전 우주에서도 버림받았어요.

▲ 난 우주에서 가장 매력적인 종족, 아사리라고 한다

캐릭터 생성 탭을 눌러보면 흑인과 동양인, 히스패닉 등 비백인의 프리셋은 드글드글한데 정작 기본인 백인은 몇 없습니다. 맘에 드는 얼굴을 만들어 보려고 히스패닉 프리셋에 피부를 하얗게 만들어 봤더니 이어진 컷씬에서 아버지가 엄청나게 무서운 히스패닉 아저씨로 나왔어요. 눈빛이 마치 '네 뿌리를 잊지 마라'라고 말하는 것 같더군요. 솔직히 말하면 우주 군인보다는 멕시코 카르텔 보스 같았어요.

캐릭터를 미형으로 만들긴 더럽게 어려운데 못생기게 만드는 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커스터마이징입니다. 누가 봐도 일부러 못생긴 캐릭터를 하라는 것 같은데, 솔직히 하면서 든 생각은 '개발자가 못생겨서 니들도 다 못생겨라. 이건가'였어요. 그러면서 왜 남캐는 이렇게 예쁘장하게 만들었어요? 네? 아니 다 떠나서 알록달록한 화장들은 대체 왜 넣은 거에요? 이런 거나 신경 쓰니까 사람들이 게임은 안 하고 커스터마이징으로 알레브리헤나 만들면서 놀고 있는 거죠.

▲ 진짜 다들 이러고 놀아요. 이게 제일 재밌거든요.

매스 이펙트 시리즈에서 동성애에 대한 묘사가 있는 건 꽤 유명해요. 심지어 외계인들하고 동성애가 가능해서 그 일로 매스컴을 탄 적도 있었죠. 근데 이번 작품에선 유독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묘사가 약합니다. 못생기게 만든 여성 주인공은 온갖 다른 여성들과 다 연애를 하고 다니는데, 남성 주인공은 상대도 두 명밖에 안 되는데다 주요 인물들도 아니에요.

솔직히 전 그쪽 취향이 아녀서 두 명이든 0명이든 상관없습니다만,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면 좀 균형을 맞췄어야죠. 이거도 보면 못생긴 여성 캐릭터에는 본인을 투영하고, 타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미형의 남성 캐릭터는 동성애를 시키기 싫은 개발자의 시선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솔직히 저는 게임에서 이런 부분을 크게 신경 안 쓰는 편인데, 안드로메다는 무신경한 저로서도 꽤 심기가 불편한 게임이었어요.

▲ 처음에는 그냥 개발진이 인물 모델링을 잘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은 나쁘지 않아요. 근데 그걸 보편적 시각에서 접근해야지, 개발자 본인만의 생각으로 접근하면 게임이 이렇게 됩니다. 이건 '유비소프트'가 굉장히 잘해요. 그 친구들은 개발 과정에서 성역도 없고, 편견도 없고, 그냥 그럴싸한 고증과 현실성을 따라가기 때문이죠. '와치독2'봐요. 주인공이 흑인이라고 누가 뭐라 했나요? 신선하고 좋더만요.


이렇게 이름값 못 할 수가 있나...
또 만나고 싶은데 또 만나기 싫어


마지막으로 정리해 봅시다. 매스이펙트 안드로메다는 '성공할 운명'을 타고난 게임입니다. 전작 3부작은 게임계의 전설이라 할만한 작품들이었어요. 삼부작 세 편이 전부 다 메타크리틱 90점을 넘겼으니까요. 3편이 나온 후 공백이 5년이었고, EA가 빵빵하게 자금도 대 줬어요. 개발진이 운명을 거부한 거죠.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 이걸 어떻게 그렇게 한 번에 날려먹어요?

혹시나 해서 외신을 뒤지다 보니 3년 반 정도를 개발한 후 프로젝트를 완전히 갈아엎고 다시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결국, 말이 5년이지 안드로메다의 개발 기간은 1년 반 정도에 불과했다는 거에요. 근데 그게 무의미한 변명인 건 개발진도 잘 알 거에요. 말이 1년 반이지 팬들이 기다린 시간은 5년이라고요. 정 그랬다면 EA에 부탁해서 개발 기한을 늘리든가 했어야죠.

물론 EA가 더럽고 치사한 퍼블리셔인 건 저도 알고 개발진도 알고 세계 모두가 알고 있어요. 그래도 이런 일을 바로잡을 기회는 너무 많았습니다. 일선 개발자들 처지에서야 1년 반 만에 이 작업을 다 했어야 하니 억울 또 억울한 일이겠지만, 결정권자들은 실수를 너무 많이 했어요.

실제로 게임이 나오고 1.05, 1.10 패치를 겪으면서 기술적인 문제들은 많이 해결됐어요. 이거 칭찬받을 일 아니에요. 아직 발견 못했던 점들이 고쳐지는 건 잘한 거지만 누가 봐도 문제인 것들이 출시 후에 고쳐진다는 건 미완성 본을 출시했다는 뜻이에요. 적어도 게임을 다 만들고 냈어야죠. 외신을 뒤지다 보니 더 기가 찬 얘기가 있네요. 이러고도 메타크리틱 점수 80점은 받을 거라고 예상했다고요? 이런 걸 두고 우리는 쉬운 말로 근자감이라 하고 더 강하게 말하면 오만이라고 해요. 세상 사람들이 게임 잘 만든다 잘 만든다 하니까 대충 만들어도 평작은 나올 줄 알았나 봐요.

▲ 고칠 수 있는 걸 왜 그냥 내요?

그렇게 바이오웨어의 오만 속에서 나온 게 이 안드로메다입니다. 지난 3부작이 세계관을 다 만들어주고 IP파워도 만들어주고 시스템도 정돈해주고 매스 이펙트라는 브랜드를 다 만들어놨어요. 그야말로 완벽한 무대를 만들어 둔 거죠. 5년 동안 노래 딱 한 곡만 연습해서 부르면 되는 건데 3년 반 동안 동요만 부르다가 뒤늦게 분위기 파악하고는 1년 반 있다가 와서 부르는 노래가 각설이 타령이에요.

겉보기엔 그럴싸해 보여도 가까이 가서 코를 킁킁대면 냄새가 납니다. 만들어지다 만 오픈 월드는 무의미한 반복만 주고 급하게 날림으로 쓴 시나리오는 누가 봐도 뻔해요. 전투와 운전은 지루하고, 적들은 전작의 자가복제 수준인데다 주인공은 갑작스레 인류의 최고 중요인물 중 하나가 되고선 '그렇다. 난 패스파인더였던 것이다. 우주여행이나 가야징.' 하고 맙니다. 주변 이들은 그걸 또 '어 네가 됐어?'정도로 받아들이고요. 친구가 대기업 입사만 해도 놀라는 게 사람인데 우주엔 어지간히 놀랄 일이 많나 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모든 과정에서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하나같이 못생겼습니다.

이게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의 불편한 단면입니다. 얼마나 반응이 안 좋았으면 EA는 발매 당일에 20% 할인을 때려버렸어요. EA가 아무리 가격 방어라는 개념 머리가 없다 해도 나온 지 하루 만에 할인은 아니잖아요. 이렇게 예약구매까지 했던 팬들은 또 한 번 빅엿을 먹었어요. 일부러 캐릭터 못생기게 만들 시간에 다듬을 게 이렇게 많았는데 얼굴 뭉갤 시간에 그런 거나 좀 고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제 다시 또 어디서 매스 이펙트 시리즈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참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입니다. 제대로 된 작품으로 다시 보고 싶은데, 이 사람들이 또 망칠까 봐 겁이 나요. 그래서 제 마음속에서 그 기억만이라도 온전히 간직하고 싶어요.

▲ 제 기억 속 아사리는 이 모습으로 유지하겠습니다. 잘가 안드로메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기사를 쓰다 보니 또 화가 나서 더 쓰다가는 다음 글은 경찰서에서 쓰는 반성문이 될 것 같아요. 그러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아 말하다 보니 또 화가 나네요. 한국어화도 안 해준 게임 자막 또박또박 읽어가면서 했는데 말이죠. 이 게임을 플레이하고 나서 저는 바이오웨어 PTSD에 걸려 버렸어요. 자각증상이 없어서 몰랐는데 신작이라고 들고 온 '앤섬'을 보니 괜히 불쾌하더군요. 이유도 없이 말이죠. 어쨌든, 저는 다음 주에 또 다른 게임으로 찾아오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는,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