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찾아낼 것이다. 찾아내서, 다 죽일 것이다"

서막은 여기였다. 중후하게 깔리는 목소리와 190cm 넘는 우월한 '기럭지'에서 나오는 시원한 액션. 영화 '테이큰'은 액션 스타 리암 니슨의 시작이다. 그때 그의 나이가 55세였으니 이르다고는 절대 못 할 때다. 뭐, 이르든 늦든 확실한 건 이때부터 니슨의 꾸준한 자기 복제가 시작됐다는 거다.

중년이 된 배우는 이 영화에서 물불 안 가리는 뒤 없는 성격과 굵직한 액션으로 통쾌함을 전달했다. '테이큰' 후 딱 10년. 다음 영화, 그다음 영화, 그리고 또 다른 영화도 비슷했다. 무대는 다르지만 무표정한 얼굴의 니슨이 분노하고, 정갈한 액션이 이어지며 죽고 죽이고. 테이큰 3부작과 '언노운', '커뮤터' 등을 거치며 가슴 후비는 통쾌함은 날이 무뎌졌다. 작품은 많았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건 없다. 이름만 다른 '여러 테이큰 중 하나'일 뿐이었다.

▲ 첫 작품의 충격은 반복될수록 무던하게 다가온다. (영화 '테이큰' 중)

게임도 자기 복제라면 리암 니슨에 지지 않는 분야다. 만남만큼 이별도 중요한 시대라지만 성공한 시리즈를 아름답게 끝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시퀄이니 프리퀄이니 하며 이야기를 끌어오고 모바일과 PC를 넘나드는 건 예사다. 클래식 시리즈로만 무려 10편을 낸 록맨도 이런 자기 복제가 관통하고 있었고.

'록맨9'이 딱 그랬다. 10여 년 만에 시리즈 신작이었던 게임은 25년 전 출시된 기기에 맞춘 그래픽으로 만들었다. 패미컴 시대의 영광을 되살리겠노라는 게 그 이유였다. 설명이야 그럴듯했지. 다만 되살릴 영광에 새로운 건 굳이 필요 없었나 보다. '록맨' 하면 떠오르는 가슴 쫄깃한 레벨디자인은 별다를 게 없었다. 죄다 이전 시리즈 중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것들로 이루어졌다. 상점 외에 편의 기능도 하나둘 삭제해 가뜩이나 어려운 게임을 더욱 힘들게 했다.

아, 새로운 게 있긴 하다. 슬라이딩과 차지샷을 없앴다. 이를 이용하려면 DLC로 블루스 캐릭터를 구매해야 했다. 감성은 패미컴이지만 비즈니스만큼은 최첨단이었다.

그래도 나름 추억팔이에 성공해서인지 '록맨10'은 또다시 패미컴 스타일을 고수했다. 변화 없는 그래픽과 보스만 바뀐 게임. 한 번은 몰라도 두 번, 세 번까지는 추억으로 보듬기 어려웠다. '록맨10'과 이후 공개된 출시 예정의 비슷한 록맨들은 20년 역사의 시리즈를 기어이 끝장내버렸다. 록맨의 아버지인 디자이너 이나후네 케이지는 캡콤을 떠났고 캡콤은 개발 중이던 록맨 시리즈의 모든 톱니바퀴를 뽑아버렸다. 영광마저 무너진 '죽은 콘텐츠'가 됐다.

▲ 1996년 PS1으로 출시된 '록맨8(좌)'과 2008년 Wii 다운로드 게임으로 출시된 '록맨9'.
순서를 잘못 적은 게 아니다.

이후 새로운 록맨이 나오는 데는 무려 8년이 걸렸다. 예전 시리즈에 기댄 작품들이 쓴맛을 봤으니 이번에는 정말 새로운 록맨이 나오겠지? 틀렸다. 출시 전 '록맨11' 개발자 츠지야 카즈히로는 당당히 밝혔다. 그 어느 때보다도 록맨답다고. 뿌리로 돌아왔다고.

그런데 록맨 다운 록맨이 이번에는 마냥 부담스럽지 않다.

시리즈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트릭인데 오묘하게 비틀었다. 가시고 낙사 구간이고 어디서 본 것 같은 함정들. 게임을 진행하면 여기에 스테이지만의 특색이 더해진 기믹이 등장한다. 보스에 가까워지면 스테이지는 머리를 싸매고 다음 진행을 고민할 만큼 복잡하고 기괴해진다. 굳어버린 손은 머리를 따라주질 않으니 이걸 어떻게 깨라고 만든 거냐 싶어진다.

그런데 이게 참 신기한 게 몇 번 답답한 가슴을 억누르고 반복하다 보면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영 깨지 못할 것 같은 스테이지는 다른 보스 먼저 깨고 다시 와보면 또 다르다. 시간을 느리게 하거나 강력한 공격을 하게 해주는 신시스템 더블 기어를 쓰면 다른 해법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픽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록맨11'은 플레이스테이션, 세가 새턴의 8편 이후 퇴화 수준이던 전작들과 달리 완전 3D화를 채택했다. 다만 3D가 클래식 스타일의 파괴를 말하는 건 아니다. 가로로 긴 플랫포머 형식은 그대로다. 2D, 그것도 도트를 3D로 옮긴 게임에서 으레 느껴지는 이질감도 없다. 고전 만화책에서 튀어나올 법한 과장된 캐릭터 디자인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최근 AAA급 게임에 비길 만큼은 아니다. 하지만 시리즈 전체를 보면 분명 괄목할 진화다.

▲ 그래픽, 레벨 구성은 새롭지만, 원작 그대로의 느낌을 전하고 있다.

'록맨11'을 플레이하는 내내 드는 감정은 이거다. '이게 록맨이지'라는 거.

결국 '록맨다운 록맨'은 지금 보기에 후줄근한 도트 그래픽도 아니고 유저를 괴롭히는 불편한 시스템도 아니었다. 8명의 보스와 그 특징이 살아있는 레벨 디자인, 그리고 끔찍하지만, 도전 욕구를 자극하고 결국은 성취할 수 있는 수준의 합당한 난이도였다. 지금 돌아봐도 대대로 록맨을 맡아오던 이나후네가 매너리즘에 빠졌던 건지, 아니면 그의 뒤를 이어 신작을 개발한 캡콤의 개발자들이 이나후네의 심중을 제대로 파악했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록맨을 가장 제대로 이해하고, 가장 새롭게 풀어낸 게임이 '록맨11'이라는 거다.

▲ 대들보였던 이나후네 케이지 없는 록맨은 진짜 록맨이 되어 돌아왔다.

리암 니슨은 지난해 액션 스릴러 은퇴를 선언했다. 미리 제작이 결정된 2편의 영화 중 하나인 '커뮤터'가 개봉했으니 이제 하나 남은 셈이다. 과감한 선택이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처럼 연기해온 '테이큰'식(式) 액션은 머리 아파질 걱정 없이 시간 보내기를 바라는 팬들에게는 '나름 먹힐' 영화니까.

'나름 먹힐 게임'이라는 이유로 반복되는 게임의 자기 복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박수받을 때 시리즈를 끝낸 건 CDPR의 위쳐 게롤트 사가나 락스테디의 배트맨 아캄 버스 정도. 그렇다고 유통, 사업, 개발사, 개발자 등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게임 업계에서 잘나가는 프랜차이즈를 니슨처럼 쉬이 포기하라 강요할 수도 없다.

다만, 자기 복제로 프랜차이즈의 수명을 늘리려면 적어도 '여러 테이큰 중 하나' 같은 게임이 되지는 않길 바란다. 원작의 핵심을 완전히 새로운 오늘날의 것으로 채운, 록맨 같은 게임이 아니라 당당히 단 하나의 록맨11로 부를 수 있는 이 게임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