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블리자컨2019 현장]

"장인에서 기업의 길을 택한 블리자드" 2018년 12월 28일, 한 해의 마무리가 3일 남은 시점 동료 기자가 숙고 끝에 작성한 기사가 포스팅되었다. 오랜 시간 블리자드 게임을 전담으로 맡아왔고, 스스로 `블빠`라고 칭할 정도로 블리자드를 사랑했던 기자였으니만큼, 기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은 없었다. 2018년 말, 블리자드가 몇 달간 보여준 행보는 그만큼 낯설었다. 그리고 2019년이 시작되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이렇게까지 될 수도 있구나` 싶었다. 우리나라에서 게임 좀 했다 하는 사람 치고, 블리자드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생각해보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대중은 어설픈 게임을 만드는 게임사를 욕할 때 `블리자드같이 좀 만들어라`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팬들은 더는 블리자드에 전과 같은 `필터 없는 애정`을 보내지 않는다. 블리자드가 무엇을 했다는 기사가 뜰 때마다, 응원과 걱정, 비판이 섞인 댓글들이 뒤를 따랐다. 23년 간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게임개발사가 심판대 위에 선 채 1년을 보냈다. `블리즈컨 2019`를 통해 한숨 돌렸지만, 아직도 `예전의 블리자드`는 아니다.

걸어가는 방향을 보면, 그 사람의 목적지를 유추할 수 있다. 기업 또한 마찬가지. 무엇을 하는지 보고 있노라면, 어딜 향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 서두에서 언급한 기사 또한, 행보에 기반을 둔 유추로 이뤄진 기사다. 2018년 한 해, 블리자드의 나침반은 게이머의 곁을 가리키지 않았다. 올 한 해도 이와 같았을까? 지난 1년, 블리자드는 어떤 길을 걸어왔고, 지금의 블리자드는 어디에 있는가?



■ '과한 체질 개선의 결과 - 쓴맛 가득했던 상반기

▲ 블리자드 CS EU 공식 트위터

2019년, 블리자드의 시작은 인사구조 개편으로 시작되었다. 1월 4일, 최고재무책임자(CFO)였던 `암리타 아후자(Amrita Ahuja)가 블리자드를 떠났으며, 공동 설립자이자 대표를 맡았던 바 있고, 당시 전략 고문을 맡던 `마이크 모하임`의 퇴사 소식이 알려졌다. 이보다 앞선 2018년 12월 말엔, 유럽 지사의 CS팀 100여 명이 줄지어 퇴사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에 따라 유럽 지역은 24시간 라이브 채팅이 종료되었다.

2월에 들어서는 수백 명의 인원이 감축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액티비전 블리자드의 `코디 존슨` COO는 작년 한 해를 돌아보는 컨퍼런스콜에서 전체 인원수(비개발 및 행정 분야)의 8%를 감축하는 대규모 계획을 시행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개발 인력을 20% 늘린다는 발표도 함께 이뤄졌지만, 이 시점에 블리자드의 신뢰도는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아니, 그간의 블리자드에 비춰 보면 사실상 최악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러니한 건, 그간 보여온 블리자드의 행보가 가져온 결과다. 작년 한 해, 블리자드는 누가 봐도 `친게이머` 성향보다는 `친자본` 성향을 보였다. 히어로즈 인력 축소와 리그 폐지는 물론, PC게임만 주야장천 만들다 뜬금없이 글로벌 트렌드에 맞추는 느낌으로 내놓은 `디아블로 임모탈`이 모두 그랬다.

이렇듯 노골적인 행보를 보였다면, 매출이 늘었어야 옳다. `이윤 추구`는 기업의 목적이자 덕목이다. 블리자드가 아무리 이상한 행보를 보였다 해도 유의미한 이익 증대를 보였다면, 게이머들은 아쉽고 안타까워할지언정, 블리자드를 이해할 수 있었을 테다. 어찌 됐건 블리자드도 기업이니 말이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드러났다.


5월 발표된 1분기 실적에서 블리자드는 3억 4,400만 달러(한화 약 4,025억 원)의 매출을 올렸고, 이는 2018년 1분기 매출인 4억 8,000만 달러보다 29% 감소한 수치다. 심지어 순이익은 1억 2,200만 달러(한화 약 1,427억 원)에서 5,500만 달러(643억 원)로 55% 하락했으며, 영업 이익률은 16%를 밑돌았다.

올해 상반기, 블리자드와 관련된 좋은 소식은 참 찾아보기 힘들었다. 4월에 `마이크 모하임`이 계약 종료로 완전히 블리자드를 떠난 후, 마이크 모하임과 함께 블리자드를 창업했던 공동창업자이자 수석 부사장 `프랭크 피어스`도 7월경 퇴사 소식을 알렸다. 이로써, 3인의 공동 창업자 중 앨런 애드햄만이 블리자드에 남게 되었다.

2018년에 여러 격변이 일어났다면, 2019년엔 그 결과가 드러났다. 블리자드에는 뼈아픈 결과였지만, 게이머들에게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 블리자드는 수뇌부를 통으로 갈아치워 가며 체질 개선을 시행했다. 게이머 친화를 모토로 삼아 포기해온 이익 요소를 다시 되살리고, 수많은 `다른 게임사`들과 같은 길을 걷겠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최악이었고, 마찬가지로 블리자드의 상황도 최악이 되었다.

▲ 7월 19일부로 퇴사한 공동창업자 겸 수석 부사장 '프랭크 피어스'(제공: 블리자드)

`블리자드가 나빴다`라는 뜻의 최악이 아닌, 정말 기업 상태가 그랬다. 베테랑, 원로들이 회사를 떴고, 기업 노선 수정을 가했으나 암초에 부딪혔다. 이쯤에서는 블리자드도 깨달았을 것이다. 남들이 다 가는 길이라고 무조건 옳은 길은 아니다. 쾌속선들을 위해 만들어둔 항로로 들어가기에 블리자드는 지나치게 큰 유람선이었다. 유람선의 목적은 빠른 도달이 아니다. 이 시기를 겪은 후, 블리자드의 행보는 미세하게 달라졌다. 무리하게 틀었던 방향을 바로잡고, 본래 가던 길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유람선의 목적. 승객의 즐거움이다.



■ '분위기 반전' 노린 여름 - 하지만 영 쉽지가 않다

▲ 한국 방문 당시 J.알렌 브랙 대표(제공: 블리자드)

여름쯤에 이르러, 블리자드는 이와 같은 과거 1년간의 행보에 대한 청산의 움직임을 보였다. 신임 대표인 `J.알렌 브랙`이 한국을 찾은 것도 이즈음이다. 당시 알렌 브랙 대표는 국내 매체들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우리의 근본은 PC 게임에 있다"라고 말하며 블리자드가 과거 찬란했던 시기의 개발 기조를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아직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하수상한 시절이었던 만큼 PC게임이 그 PC가 아니라느니, 그저 변명이라느니 하는 반응도 심심찮게 나왔지만, 인터뷰 답변은 꽤 고무적인 편이었다.

코어 게이머 위주의 PC게임, 게이머 경험을 중시하는 개발, 그리고 새로운 콘텐츠와 신작에 대한 약속까지. 알렌 브랙 대표는 게이머들이 원하던 많은 대답을 준비했다. 작년 블리즈컨 이후, 블리자드엔 하나의 프레임이 씌워졌다. "모바일 지향의 게임사". 그간 블리자드가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 꽤 어이없는 정의지만, 모든 프렌차이즈에 모바일을 결합하겠다는 발언과 디아블로 이모탈의 임팩트는 이 프레임에 설득력을 실었다. 그러나 올해 여름에 이르러, 알렌 브랙 대표는 이를 전면에서 부정했다.

이쯤 되어 2분기에 대한 실적이 함께 발표되었는데, 그래도 최악이었던 지난 분기보다는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2분기에 블리자드는 3억 8,4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고, 7,500만 달러의 영업이익을 보였다. 다만, 이 매출의 구조는 당시 블리자드가 가진 숙제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하스스톤의 신규 업데이트였던 `어둠의 반격` 덕분에 단기적 매출 상승은 꾀할 수 있었으나, 이후를 끌어줄 신규 타이틀이나 콘텐츠가 너무나 부족했다. 지난 블리즈컨에서 이렇다 할 신규 콘텐츠를 보여주지 못했기에 2년의 콘텐츠 공백이 생겨버린 것이다.

하지만 생각했던 만큼 분위기가 쉽게 반전되지는 않았다. 10월경, 블리자드에 한 번 더 치명타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블리츠청(Blitzchung) 사건`.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홍콩 혁명과 결부된 이 사건에서 블리자드는 경기 규정에 따른 매뉴얼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그 조치는 규칙상의 정당성은 갖고 있었으나, 민중이 생각하는 정의와는 반대에 있었다.

▲ 하반기 큰 사건 중 하나였던 '블리츠청' 사건

10월 초 일어난 이 사건은 여러모로 블리자드엔 뼈아픈 일이었다. 당시 미국은 중국 자본에 종속된 자국 기업들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이는 국회에서도 다뤄질 정도로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NBA, 디즈니 등이 이 프레임에 쌓여 비난받는 상황이었는데, 블리자드도 한데 묶여버린 것이다. 블리자드 입장에서야 매뉴얼에 따른 조치를 취한 것이었으니 억울하다 할만한 상황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게이머들과 소통이 이뤄지지 않았음은 명백했다.

이제, 블리자드에게 남은 기회는 단 하나, 채 한 달이 남지 않은 `블리즈컨 2019`뿐이었다. 블리자드는 그간 E3에 불참하는 대신 자체 게임쇼인 블리즈컨을 열고 유럽 최대 게임쇼 `게임스컴`에 참석해왔는데, 올해는 게임스컴에도 불참했다. 이는 모든 힘을 블리즈컨에 집중하겠다는 제스쳐였고, 그런 와중 블리츠청 사건은 또 하나의 부담이 되었다.



■ '반전의 기회' 블리즈컨 -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다

11월, 블리자드에게는 결전의 달이었다. 블리즈컨 현장은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로 들썩였지만, 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홍콩 혁명을 알리는 전단과 티셔츠를 나눠주는 이들도 있었고, 약간 비틀린 웃음을 보이는 관객들도 보였다. 시진핑 중국 주석을 조롱하는 곰돌이 푸 의상을 입은 사람들도 간혹 눈에 띄었는데, 블리츠청 사건이 한 달 전 일이다 보니 블리즈컨에서도 그 영향을 느낄 수 있었다.

▲ 블리즈컨 당시 홍콩 혁명을 알리는 티셔츠를 나눠주던 현장

관객들의 시선에 깔린 기저 심리는 `의심`이었다. `이번엔 무엇을 보여줄까?`라는 기대가 기저에 깔렸던 전과 달리, 이번 블리즈컨의 관객들은 `과연 블리자드가 분위기를 반전할 수 있을까?`하는 의심을 한 채 현장으로 향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보자면 꽤 흥미로운 상황이라 할 수도 있었다.

본 행사는 알렌 브랙 대표의 사과와 함께 시작되었다. 사태 회피와 변명으로 뭉뚱그리는 흔한 사과와 달리 블리즈컨 오프닝에서의 사과는 꽤 모범적인 편이었다. 알렌 브랙 대표는 "우리는 세상을 하나로 모을 기회가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우리의 결정은 너무 섣불렀고, 여러분과의 소통은 너무 느렸다"라고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했으며, 블리자드가 가진 소명의식과 목적을 이번 블리즈컨을 통해 제시하겠다고 말했다.

▲ 사과의 말을 전하는 알렌 브랙 대표

그리고 곧, 블리자드가 게임스컴에 불참하면서까지 힘을 모아온 이유가 드러났다. 블리즈컨에서 블리자드는 모든 프렌차이즈의 새로운 콘텐츠를 소개했다. 디아블로4, 오버워치2, 하스스톤과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확장팩을 비롯해 히어로즈오브더스톰, 스타크래프트2의 새로운 콘텐츠도 선보였다. 사실상 게이머들이 바라던 모든 것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눈에 띄는 건, 두 가지였다. 먼저, `조심스러움`이 보였다. 블리즈컨 기간 중 블리자드는 거의 모든 행사와 발표에서 말을 조심스럽게 했으며, 게이머와 자신들의 심리를 동일시하려 노력했다. 게이머 관점에서 미비해 보일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인정했고, 자신들이 만든 결과물에 대해 불필요한 약속을 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조급함`이었다. 새로운 콘텐츠는 많이 공개되었지만, 원래대로라면 더 묵혔어야 할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행사에서 블리자드는 어떻게든 만든 부분이라도 공개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디아블로4와 오버워치2 모두 정확한 출시일을 공개하지 못했지만, 플레이 가능한 수준으로 선보일 수 있었다.

완벽한 행사였다고 볼 수는 없었다. `워크래프트3: 리포지드`에 대한 약속 중 지키지 못한 부분도 있었으며, 작년의 메인타이틀이자 애증의 대상인 `디아블로 이모탈`도 어찌 되었건 출품작일진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블리자드가 보낸 제스쳐는 관객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었다. 비록 완전하진 않지만 `우리도 이런 것들을 준비하고 있다`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움직임, `원하는 대로 게임을 만들어 갈 테니 다시 믿고 응원해줄 수 없을까?`하고 묻는 듯한 행사 진행까지 말이다.

블리즈컨 2019는 그런 의미에서 성공적이었다. 디아블로4는 아직 1년도 더 남은 미완성작이며, 오버워치2또한 많은 변화를 노렸으나 생각했던 것만큼 신선하진 못했다. 하지만, `게이머들이 원하던 것`에 대한 해답은 될 수 있었다. 인력 조정부터 모바일 지향 게임사라는 프레임, 그리고 최근의 블리츠청 사태에 이르기까지 블리자드는 근 2년간 차곡차곡 쌓여 온 과거의 청산을 시작했다.

[사진=블리즈컨 현장, 팬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블리자드는 알아야한다]

물론, 이 말이 곧 `과거의 블리자드가 되었다`라는 뜻은 아니다. 1년을 시험대에서 보낸 블리자드는, 또다시 1년짜리 시험대에 섰다. 하지만 분위기가 다르다. 지난 1년이 `어디 한 번 어디까지 망가지나 보자`였다면, 앞으로 다가올 한 해는 `앞으로도 쭉 잘하나 보자`에 가깝다. 그것만으로도, 블리즈컨은 성공적이었다. 과거와 같은 높이에 올라서진 못했지만, 그래도 2년간 꾸준히 이어지던 가치의 곤두박질은 막아섰기 때문이다.



■ 앞으로 1년의 블리자드 - 다시 옆에 앉아도 될까요?

[사진=그래도 믿음을 잃지 않고 블리즈컨을 찾아준 팬들]

간혹,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잘못된 분기점으로 나갈 때가 있다. U턴 지점을 찾아 다시 고속도로로 돌아와야 하니 꽤 귀찮은 실수지만, 숙련된 운전자들도 간혹 하고는 하는 실수다. 2년 전의 블리자드는 방향을 착각했다. 수많은 차가 가는 길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그것이 맞는 길이라 착각하듯, 가야 할 곳이 아닌 `남들 가는 곳`을 목적지로 잡았고 2018년 블리즈컨에 이르러서야 그 길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올 한 해, 블리자드는 U턴 지점을 찾아 헤맸다. 비포장도로를 지나며 차가 망가지기도 했고, 연료도 계속 소모되었지만 적어도 자신들이 `잘못된 길`위에 있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다시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을 찾기 위해 헤맸고, 올해 블리즈컨에서 드디어 본래의 목적지를 향한 U턴에 성공했다.

오늘날 블리자드를 바라볼 때, 여전히 예전과 같지 않다고 느낀다면 당연한 일이다. 이제야 방향을 똑바로 잡았을 뿐, 아직도 블리자드는 본래 목적지에서 많이 벗어난 지점에서 달리고 있다. 다음 한 해는, 다시 고속도로로 오르기 위해 달리는 한 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차가 다시 고속도로에 올라 달리는 날, 아마 우리는 `이제야 블리자드가 제자리를 찾았구나` 하고 느끼게 될 것이다.

게임 개발, 그리고 게이머들과의 신뢰를 쌓아가는 일은 끝나지 않는 여정이다. 멈추는 순간 개발사의 생명은 끝이 난다. `게이머들과 같은 시선에서 게임을 바라보고, 게이머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주는 것`이라는 방향을 위해 블리자드는 끊임없이 달려야 하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아마 우리와 같은 게이머들의 응원과 믿음일 것이다.

내년 이맘때 쯤 블리자드는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을까? 팬들의 기대와 함성이 있는 곳이 곧 블리자드의 길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제공=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