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벤팀

인벤은 지금..

[후기] 블리자드가 잘나갈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 악마적 매력은 여기에서 나온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블리자드에 7년이나 다닌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좀 더 깊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건지, 단지 옛 추억을 떠올리는 건지 그는 서서히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봤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나에게 눈을 맞췄다.

여기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한 달 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 근처의 일본식 선술집이다. 초밥과 회, 꼬치, 그리고 일본 술 '사케'가 주요 메뉴. 동양인이 많을 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얼굴이 상기된 채로 사케에 흠뻑 취해있는 금발 남녀가 가득했다. 우리 일행은 가게 제일 안쪽 넓은 자리에 둘러앉아 안주와 맥주를 즐겼다. 그리고 블리즈컨의 모든 취재 일정이 무사히 끝났음을 자축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유일한 블리자드 본사 직원이 그였다. 디아블로3의 아티스트이자 한국인 개발자, 이름은 "제프 강".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국내 기업을 다니다 2000년에 미국으로 넘어온 토종 한국인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더 각별한 느낌이 있다.


이전에도 공식 인터뷰를 여러 번 했었기 때문에 첫 만남은 아니었다. 그래도 약간의 어색함은 남아 있었던 게 사실. 하지만 주거니 받거니 하는 술잔 속에서 마음의 경계는 급속도로 풀리기 시작했다. 이런 틈을 노려 나름 크리티컬한 질문을 던져본 것이다. 그는 왜 2004년부터 지금까지 머나먼 타지 생활을 이겨내며 7년 동안 블리자드에 올인하고 있을까? 제프 강 특유의 솔직함이라면 의외의 대답이 나올 것 같다는 기대도 있었다.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 와서 보니까.. 이 회사가 잘 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를 발견하게 됐어요... 그걸 지금 말씀드릴게요."

하지만, 나는 이때만 해도 제프 강의 대답이 이 정도로 내 가슴을 움직일 거라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 2011 블리즈컨 현장에서 인벤 팬아트 작가들과 함께한 제프 강 ]




#1

제프 강의 후임으로 신입 아티스트가 한 명 들어왔다. 나이가 자그마치 54세. 한국 같으면 이제 서서히 은퇴를 준비해야 할 나이다. 하지만, 블리자드 본사의 그 누구도 나이로 태클을 걸거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 거리낌 없이 같이 일하고 밥 먹고 웃고 이야기하고. 나이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그 신입 아티스트가 가진 인성과 능력만이 블리자드팀의 한 멤버로 존재하게 만들었다.

제프 강의 눈이 더욱 동그래진 이유는 신입 아티스트 본인도 자신의 나이를 전혀 개의치 않게 생각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작게는 십 년, 많게는 수십 년이나 나이가 어린 고참 직원들과 일을 하면서도 배우려는 열정은 전혀 모자라지 않다는 설명이다. 오히려 뒤처질까 더 열심이란다.

사실 제프 강도 이제 갓 40을 넘었다. 미국에 있는 그의 친구 대부분이 골프를 치지만 그는 힙합 음악과 스케이트보드에 열중한다. 친구들이 놀려도 그는 자기 취미가 아주 좋다. 취미만 놓고 보면 십 대와 다를 바 없는 그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패션도 약간 아이돌 삘이다. 같은 남자가 봐도 멋진.) 그런 제프 강이 화들짝 놀랐을 만큼의 사내 문화는 도대체 어떤 수준일까. 우리가 예상할 수는 있을까.



[ ▲ 블리자드 본사 입구의 전경, 정말 학교 같은 분위기다. ]




#2

제프 강이 2004년 처음 블리자드 노스에 입사할 때다.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제출하고 면접을 두 번이나 봤다. '이제는 합격인 걸까.'라는 기대를 하던 도중 블리자드로부터 전화가 왔다. 세 번째 면접을 봐야 한다는 것.

면접에 나가보니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임원진, 직원들과 함께 어울리며 같이 식사도 하고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그야말로 지원자의 사람 됨됨이, 즉 인성을 보는 면접이었다. 하지만, 그 면접을 성공적으로 치른 이후에도 바로 합격은 안 됐다.

그 후로도 오랜 시간이 지나야 결국 합격 통보를 받을 수 있었는데 입사 후 나중에 알고 보니 블리자드 노스 50명 전 직원의 "오케이"가 있어야 합격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사무실 안내 데스크에서 근무하는 직원의 허락까지도 반드시 필요했다.

재밌다며 우리가 마구 조르자 제프 강이 디아블로2 시절 이야기를 좀 더 해줬다. 디아블로2 개발팀이 콘텐츠 추가에 대해 회의를 하고 있을 때였다. 사무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지나가다 우연히 회의실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디아블로의 열렬한 팬이었던 그 아주머니는 문을 노크하더니 갑자기 회의실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아이디어를 개발팀에게 막 설명하기 시작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종종 보던 장면이다. 경비원이 뛰어나와 아주머니를 말린다. 억지웃음과 함께 아주머니를 데려나가고 다시 원래대로 회의가 진행되는 스토리.

하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은 정반대였다. 디아블로2 개발팀원 전부가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그 아이디어는 그대로 채택되어 디아블로2의 출시 버전에 실제 적용되었다.



[ ▲ 디아블로2의 정식 출시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




#3

블리자드가 리치왕의 분노를 공개하는 시점이었다. 기자가 초청을 받아 블리자드 본사를 방문했었다. 그때 처음으로 월드오브워크래프트 개발팀이 있는 곳을 견학했는데 개발자마다 독립적인 사무실 공간을 가진 것에 매우 놀랐다. 거의 중소기업 사장실 수준의 규모였다. 그래서 이 마지막 에피소드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블리자드의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혹시 '샘 와이즈 디디에'라는 이름을 들어봤을지 모르겠다. 블리자드 수석 아트 디렉터이며, 1991년에 블리자드를 공동으로 창립한 멤버 4명 중 한 명이다. CEO 마이크 모하임도 있는 사내 밴드의 보컬로 매 블리즈컨의 폐막식을 장식하는 그다. 그는 처녀작 블랙 쓰론(Black Throne)부터 워크래프트, 디아블로, 스타크래프트에 월드오브워크래프트까지 블리자드의 모든 작품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다. 군대에서 흔히 말하는 ‘짬밥’으로 치면 블리자드 마사장님과 완전 동급이다.

그런 샘 와이즈 디디에의 일하는 자리가 만약 사무실 복도 바닥이라면 어떻겠는가. 블리자드 사무실 구조를 보면 양옆으로 개발자 개인 사무실들이 줄지어 있고 중앙으로 큰 복도가 나 있다. 복도 벽면에 주로 블리자드 게임들의 아트 액자가 걸려 있다. 샘 와이즈 디디에가 그 복도의 중앙에 겨우 책상을 놓고 근무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 ▲ 블리자드의 전설급 아트디렉트 샘와이즈 디디에(좌) ]




도대체 왜 그럴까? 본인의 대답은 이렇다. 직책도 직책이고 큰 사무실에 들어가서 일하고 있으니 아무도 와서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는 것. 갓 들어온 신입 아티스트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고 평가받고 같이 토론도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조바심이 났고 결국 짐을 챙겨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복도에 정착하게 됐다는 서글픈(?) 고백이다.

그의 자리를 보면 블리자드에 장기 근속하면 포상으로 받는 ‘칼’과 ‘방패’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단다. 그에게 있어서는 20년 동안 블리자드를 통해 얻은 명예와 직책보다 신입 아티스트와의 커뮤니케이션이 더 중요한 것이다. “솔직히 이런 회사의 게임이 잘 안 될 수가 있겠습니까?” 제프 강의 말이 이제야 제대로 이해가 됐다.



[ ▲ 이것이 바로 샘와이즈 디디에의 작품 ]







같이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불러보고 여러 가지 이야기도 나눠봤지만 제프강은 정말 가공할만한 솔직함과 순수함을 보유하고 있는 남자다. 1996년에 총을 맞아 사망한 힙합 뮤지션 2pac(투팍)이 아직도 살아서 활동한다고 믿고 있으며 서슴없이 가장 기대하고 있는 게임이 최대 경쟁사 EA의 ‘배틀필드3’라고 말한다.

그래서 술잔이 오고 가며 서로 미소를 짓는 틈을 타, 분위기상 진실을 말해주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길 수 없는 틈을 타, 또 하나의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이런 용기에는 사케로 인한 가벼운 취기가 한몫했다.

“블리자드 노스때부터 지금까지 근무하셨잖아요. 디아블로2부터 디아블로3까지 개발에 모두 참여하고 계신 데, 우리 솔직히 털어 놓죠. 개발자로서 디아블로1,2,3 중에 어떤게 제일 재밌을까요?”

누군가 그때 내 얼굴을 봤다면 분명히 악마 같다고 했을 거다. 뜬금없는 질문에 제프 강, 또 천장을 응시한다. 이번엔 좀 반응이 빠르다. 하지만 그가 내뱉는 말은 언제나 그렇듯이 굵고 느릿느릿하다.

“기자님.. (한참을 있다가) 저 거짓말 잘 못하는 거 아시죠... (다시 뜸을 들인다.) 디아블로 1,2,3를 놓고 봤을 때 3가 무조건 최고입니다. 이건 진짜..진짜 해보면 미칩니다, 미쳐...”

“지금 베타는 극히 일부분이거든요. 내부적으로는 거의 완성된 버전으로 테스트하고 있는데 다들 집에를 안 가요... 진짜 미쳐요.”

그의 입에서 '미친다.'는 표현이 수차례나 나왔다. 질문한 나도 더는 들을 말이 없었다.

깊은 밤까지 이어졌던 술자리가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애너하임의 밤거리를 터벅터벅 걸으며 생각해봤다. '아무리 옆집 형 같은 이미지의 제프 강이라지만 블리자드 직원 경력 7년에 철통 보안 교육을 받은 그의 말을 100% 다 믿기는 어렵다. 자기 새끼가 제일 이뻐 보이는 건 부모라면 다 같은 마음 아닌가. 이렇게 벌써 흥분할 필요가 없는 거야.'

그렇게 홀로 숙소에 들어 갔다. 그리고 옷도 갈아 입지 않고 노트북을 켜서 디아블로3 한정판의 가격과 구성품을 확인하는 나를 발견했다. 이게 내 뒤늦은 블리즈컨 후기의 끝이다. - V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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