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신우균 (1889.06.12 ~ 1921.01.25) 사망



신우균은 1889년 경기도 양평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요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하였는데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될 무렵, 신우균 역시 3~4월 양평에서 양평교회 장로인 한덕리, 신도 이용준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했다.

1919년 4월 3일. 신우균은 동지들과 함께 양평군에서 약 4,000명의 주민들 속에 뛰어들어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이후에는 군중을 이끌고 읍내를 향해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운동 후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서울로 도피한 그는 1919년 10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등의 혐의로 태형 90도를 언도받았다.

신우균은 그 후 상하이로 건너갔으나 1920년 5월 초순경 비밀리에 양평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는 동지인 한덕리 장로를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현재 상황, 서울의 독립운동 상황과 전망 등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 당시 신우균은 같은 양평군 출신으로 임시정부에서 일을 하고 있던 여운형의 휘하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신우균은 그들에게 양평 내에서 인망이 두터웠던 한덕리를 대한독립단 경기도지단장으로 임명해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키자고 추천하였다.

신우균은 뜻을 수락해준 한덕리 장로에게 같은 해 6월 16일 서울에서 독립단의 인장 2개·『독립신문』 등의 문서·지단장 임명장·등사판 등을 가지고 와서 건네주었다.

(1920년 5월. 신우균의 추천을 받은 한덕리 장로는 경기도지단을 조직하여 지단장이 되었다. 임시정부로부터 받은 격문을 인쇄, 배포, 친일파들에게 사형집행선고문 우송, 군내 유지들로부터 군자금 모집 활동 등을 했다.)

한덕리 장로에게 문서를 건내주고 상하이로 돌아온 신우균은 얼마 후 병에 걸려 1921년 1월 25일에 사망했다.


2018년. 독립운동가 신우균에게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919년 양평군 만세운동에서 사용되었던 태극기)
(양평군의 3.1 만세운동 기념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