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너무 부끄러워서 보수도 진보도 말해주지 않는
지금은 백범 김구에게서 뺏아간 '국부'호칭으로 우상화 하려하는
임정을 와해시킨 하와이 한인 갱단두목 출신 대통령의 
한국전쟁 극초반 한국군 지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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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국군은 맥없이 무너져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날 밤 9시경 이승만 대통령은 존 무초 주한미대사를 경무대로 불렀다. 두 사람간의 대화가 재미있다. 무초 대사의 회고를 들어보자.


"이승만 대통령은 내가 공산군 손에 들어가게 되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곤란하게 되고 방어능력이 이러하다 보니 내가 서울을 빠져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한국군이 이런 불의의 기습을 받고도 잘 싸우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단 하나의 부대도 공산군에 항복하지 않고 있지 않냐고 되물었다. 

나는 '만일에 대통령이 피신하고 그 사실이 밖에 알려지면 한국군 병사들은 한 명도 북쪽을 향해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군 전체가 전쟁을 포기할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래도 이 대통령은 피난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알아서 하십시오. 나는 머물러 있겠습니다.' 이러한 강경한 태도에 대통령도 서울에 머물러 있기로 작심했다. 최소한 그날 밤이라도..."

언쟁을 끝낸 두 사람은 각기 바쁘게 움직였다. 무초는 미국인을 철수시키고, 이승만은 도망갈 길을 찾았다.

대사관으로 돌아가는 무초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승만이 서둘러 피난가겠다고 한다. 그러면 한국에 머물러 있는 우리 미국인들을 어떻게 할까? 무조건 일본으로 피신시키자."

미국은 이미 1년 전에 대사관이 중심이 되어 모든 미국인들을 일본으로 피신시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 안에는 남녀, 아이들 할 것 없이 모든 비전투 미국인과 영국인, 프랑스인, 유엔한국위원단 임원과 중화민국대사관원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비상연락을 받고 인천항에 집결해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 이렇게 해서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오는 6월 28일까지 한 명의 실종자를 제외한 2,500명에 달하는 주한 미국인 전원이 안전하게 일본으로 대피했다.









이승만은 무초와 정반대로 행동했다. 

주한 미국인들이 인천으로 모이고 있는 6월 27일 새벽에 이승만 부부는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을 포함한 4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서울을 빠져 나갔다. 

국무위원은 물론 국회, 군 지휘관, 미국대사관 등 어디에도 탈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서울역에 도착한 이승만은 파나마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아무도 몰라봤다고 한다.

새벽 4시에 출발한 기차는 대구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대전으로 되돌아갔다. 이미 대전에는 이승만이 도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시민들을 버리고 탈출한 3부 요인과 고위관료들이 상당수 도착했다. 

이들 가운데 누구도 서울시민의 보호계획을 세운 이도 없었고, 은행권도 그대로 두고, 정부의 중요 문서도 그대로 둔 채 자신과 가족들만 데리고 왔다.




대전에 머물던 이승만은 여기서 또다시 기이한 행각을 벌인다. 

이승만은 7월 1일 새벽 3시 3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대전을 빠져나갔다. 아직 대전이 안전할 때였다. 인민군은 이승만이 대전을 떠난 지 20일이 지나서야 대전을 점령했다. 서울을 빠져나갈 때처럼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탈출했다.

부산을 향해 출발했는데 가는 코스가 불가사의했다. 대전-대구-부산으로 가지 않고 전라북도의 이리까지 승용차로 이동한 뒤 거기서 기차를 타고 목포로 갔다. 비밀리에 떠났기 때문에 이리역에 기차가 있을 리가 없었다. 대통령 일행은 역에서 8시간이나 기다리다 겨우 3등 객차를 두 칸 단 기관차를 구해 출발할 수 있었다.

오후 2시에 목포에 도착했으나 또다시 배를 구할 수 없어 2시간 기다리다 겨우 작은 소해정을 타고 부산으로 출발했다. 5백 톤급의 작은 소해정 제514함에 올라 19시간의 항해 끝에 부산에 도착했다. 다들 배멀미 때문에 구토를 하는 등 고통을 겪었다.

이승만이 도주하자 전쟁지휘부는 4개로 쪼개졌다. 
△수원의 야전사령부 
△대전의 정부 
△부산의 이승만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으로 나뉘어진 것이다. 
이승만이 이렇게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동안 대한민국의 통치권은 사실상 공백상태를 맞게 되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피난길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뛰어난 역사서인 <한국 1950 전쟁과 평화>에서 이승만의 행태를 이렇게 비판했다.

"6월 25일 전쟁 시작 이후, 특히 6월 27일 서울 탈출 이후 부산을 거쳐 7월 9일 대구로 이동하기까지 서울-대구-대전-수원-대전, 그리고 다시 대전-이리-목포-부산-대구에 이르는 15일 동안의 이승만의 행적은 한마디로 의문투성이였다. 단순히 우왕좌왕이라고 부르기에는 국가원수로서 너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누란의 위기에서 이승만은 두 번의 통치 공백, 사실상의 통수권 유고사태를 빚었던 것이다. 처음엔 대구로 혼자 도망갔다가 대전에 도착할 때까지 열차에 머문 시간이 12시간 30분이었고, 두 번째는 훨씬 더 길어서 대전-부산 간 이동에 소요된 시간은 32시간이었다. 이 시간 동안 그는 아무런 군대통수 기능을 행사할 수 없었고,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의 입만을 바라보던 각료들이 황망히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동안 정부로서는 아무런 정상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최근 일부 언론에서 "이승만 정부가 6.25전쟁 직후인 6월 27일 일본 정부에 망명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과연 그럴까?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이승만이나 정부각료는 이날 서울을 탈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저 인민군을 피해 남으로 남으로 달리던 시점이었다. 망명정부설이 나왔다면 아마 그 시점은 낙동강 전투에서 유엔군이 위기에 처한 8월 중순 경으로 추정된다.

당시 대구 북쪽에서 인민군 2개 사단이 낙동강을 건너 방어선 북서쪽을 무너트렸다. 심한 압박을 받은 한국군 1사단과 6사단은 미 1기병사단 뒤까지 후퇴했다. 할 수 없이 워커 장군은 8군 사령부를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길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이 위기 상황에서 '정부를 일본으로 옮기자'고 주장을 했던 인물은 최악의 국방부장관으로 평가받고 있는 신성모로 추정된다.

무초 미국 대사가 1950년 6월 27일에 국무부에 타전한 전문을 읽어보자.

"신성모가 아침 7시에 나를 찾아와 대통령은 새벽 3시에 진해를 향해, 그리고 내각은 아침 7시에 남쪽 지방을 향해 특별열차를 타고 떠났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과 내각을 일본으로 보내 망명정부를 세울 수 있는지 여부를 내게 타진했다. 이에 대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https://www.nocutnews.co.kr/news/4441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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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방장관 신성모도 글 한편 나오게 하는 사람인데, 북한군 한국전 관련 최고무공훈장은 신성모에게 줘야 마땅할 정도임.
1950년 6.25 일요일, 전쟁이 발발하자 경악한 채병덕이 국방장관 공관에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이에 채병덕은 가회동에 살고 있던 비서실장 신동우 중령에게 전화를 걸어 신성모의 소재를 물었는데, 이때 신동우 중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관님은 숙소에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장관님은 영국에서 오래 사셨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아무도 만나시지 않고 또 전화도 받지 않으십니다."


결론
1. 대통령이 피난을 갈 수 있지. 
   근데 군 통수권자가 지휘는 하면서 이동해야지.  이 국부새꺄.

2. 이런 인간과 국방장관을 가지고도 멸망하지 않은 한국인의 저력.
   
3. 한국전 초반 이승만과 똥별들의 짓거리로 뒷목잡던 미쿡은 
   50년대에 한국군에 전작권을 절대로 주면 안되겠다고 다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