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백작

(1858~1926)

매국노,부일민족반역자의 대명사로 알려졌는데 매국노들 중 유일하게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포함되어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한다.
(더블을 달성한이는 여럿 있어도 트리플 크라운은 이완용이 유일함.)
이런 행보때문에 매국노, 부일민족반역자의 대명사로 꼽히면서 
다른 매국노들이 먹을 욕까지 다먹는 역효과도 발생.

1909년 이재명의사의 의거로 중상을 입고 간신히 살아나 후유증으로 뒤질때까지 고통받다 죽음.

이지용- 백작

(1870~1928)
세종대왕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 후손.
1904년 일본공사 하야시에게 돈을 받고 한일의정서에 서명 및 을사늑약 서명으로 을사오적에 등극한 매국노.

그러나 한일의정서 서명, 을사늑약 서명으로 받은 은사금을 몽땅 화투에 꼴아박고 파산을 여러차례 당하였고
이에 일제로부터 구제금도 받고 했으나 이마저도 화투에 꼴아박고 탕진하여 백작 작위를 정지당하기도 하였다.
"일본에게 속았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뒤짐.

박제순- 자작

(1858~1916)
을사오적, 경술국적에 포함되어 더블 달성.
상술한 이완용이 매국노의 대명사로 꼽히면서 각종 어그로를 끌면서 상대적으로 욕을 덜 먹을뿐 
대표적인 매국노의 대명사 중 한명. 독립운동가 나철, 오기호의 암살시도가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실패로 끝남.

이근택 - 자작

(1865~1919)
을사오적, 친형 이근호와 동생 이근상도 각각 남작 작위를 받은 매국노.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자기집 노비에게조차 개무시당한 썰이 수록되어 있으며 
1906년 기산도 의사(1878~1928, 의병장, 호남 대표 의병장 고광순의 사위, 이근택 암살시도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타계)의 암살시도로 13군데의 자상을 입고 사경을 헤맸으나 운좋게 살아나 1919년 뒤짐.

윤택영- 후작

(1876~1935)
순종의 장인으로 나라팔아먹고 받은 돈으로도 부족해서 순종 이름 팔아 여기저기 빚을 내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
파산, 중국으로 야반도주함. 오죽하면 별명이 채무왕이었다.
순종 승하때는 그래도 사위가 왕인데 설마? 하고 몰래 귀국하여 장례를 참석하려다 빚쟁이들에게 딱 걸려 고초를 치르다 다시 중국으로 야반도주하였고 후일 객사함.

덕영-자작
(1873~1940)
위의 윤덕영이 동생, 즉 형제사이이며 경술국치 당시 조카였던 순명효황후가 치마폭 속에 감췄던 옥새를 강제로 빼앗아 한일합병조약을 승인시킨 장본인. 기이한 두상을 가져 별명이 대갈대감이었다.
경제관념이 병신같았던 동생과 서울 한복판에서 금전문제로 치고받고 한 일도 있으며 한때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렸던 서양식 저택 벽수산장의 주인.

<벽수산장, 광복이후 한국통일부흥위원단 본부로 쓰이다 1966년 화재로 폐가가되었고 차후 도로정비 사업으로 철거, 현재는 간신히 흔적만 찾을수 있는 상태>

이병무 - 자작

(1864~1926)
정미칠적, 대한제국군 장교 재직 시절 일본에 정보를 팔아먹다 걸려 유배를 당하기도 했으며 고종 강제 퇴위 당시
칼을 들이대며 협박을 하기도 함. 군부대신 재직 당시 대한제국군 강제해산때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대한제국군 강제해산에 대한 반발로 박승환 참령등 여러 장교가 자결로서 항거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제국군 강제해산에 대한 여파에 대비하여 일제와 협의, 용산 등지의 대한제국군 무기고의 통제권을 일제에게 넘겨주었고 그 결과 벌어진 남대문 전투에서 남상덕,이준영 참위 이하 많은 장교들과 장병들의 희생을 야기시킨 인물.

이하영-자작

(1858~1929)
이름에서 눈치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독립운동가 이시영,이회영과 먼 친척뻘이다.
(백사공파 같은 항렬)
물론 이시영 이회영 선생님 집안과는 달리 벼슬과는 인연이 없어 동자승, 떡장수,부산에서 무역업 등으로 생계를 연명한다. 그러다 부산에서 무역업을 하면서 익힌 일본어와 영어(현재로는 초중생 수준이라고...)로 미국선교사 알렌과 인연이 닿게 되어 한양으로 상경하게 된다. 얼마지나지 않아 갑신정변에 휘말리게 되는데 이때 민영익과 연이 닿게 되면서 고종을 알현하게 되었고 고종의 개인통역관까지 오르면서 그야말로 신분이 수직상승하게 된다.
이러다보니 방약무인해졌고 적극적으로 나라 팔아먹는데 앞장서게 된다.
일제가 요구하던 서해의 어업권을 낼름 가져다 바치질 않나, 그것도 모자라서 내륙하천 항행권. 치안권등을 몽땅 일제에 가져다 바치는 추태를 부리게 된다.

이일 때문에 격분한 의성의 선비 우용택(독립운동가, 1868~1943)이 상경하여 이하영을 대면, 시원하게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하영은 엄청나게 쳐맞다 하인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간신히 도망침)

법부대신 시절에도 개 버릇 남 못준다고 온갖 부정부패를 벌이다 초임검사에게 탄핵을 당하는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 물론 권력으로 자신을 탄핵한 초임검사를 파면시켜버렸지만.

법부대신 (오늘날의 법무부장관)을 탄핵했던 용감한 초임검사는 바로 헤이그 특사 사건때 순국한 이준 열사이다.

을사늑약 체결 때도 아주 적극적이었던지라 일부 학자들은 을사오적에 이하영을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민영린 - 백작

<맨 왼쪽 관복 입은 놈>
(1872~1932)
민씨 일족으로 나라 팔아먹는데 일조하여 작위를 하사받았다.
하지만 상습적인 마약복용으로 여러차례 구속되었고 일제에서도 답이없다 판단하여 작위를 박탈당하고 만다.
도박으로 파산을 밥쳐먹듯이 하던 이지용도 작위가 일시정지되었을뿐이었는데 작위가 박탈되었을정도면
아주 심각한 약쟁이 그 자체.

번외

김가진 - 남작

(1846~1922)
경술국치당시 남작 작위를 일제로부터 받았다. 하지만 상술한 매국노들과는 다르게 독립운동가이다.
을사늑약 반대파 중 한 명이며 독립운동단체 대동단의 총재, 의친왕 망명을 기획하였더가 실패하자
가족들을 이끌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북로군정서 고문을 역임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는 큰어르신으로 모셨던 분.

아쉬운점은 공식적으로 서훈을 받지못한 대표적인 미서훈 독립운동가라는것.
서훈을 받지 못한 사유는 남작 작위를 반납하지 못했다는 이유인데 행보로 미루어볼때는 서훈이 되지 않은점이 매우 부당하다는 의견이 절대적이며 차후 서훈이 유력시 되는 독립운동가 중 한 분.


<동농 김가진 가족 사진>

아들 김의한(독립운동가, 1900~? 한국전쟁 납북으로 사인 불분명,임시정부 활동 및 광복군 활동)
며느리 정정화 (독립운동가, 1900~1991, 일명 임시정부의 안주인,살림꾼으로 불리던 독립운동가)

그나마 다행인것은 아들 부부는 공식적으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았다는것.

민태곤 - 남작
(독립운동가, 1917~1944)
고조부 민종묵, 아버지 민규현으로부터 남작을 습작받았다.
그러나 일본 도호쿠대학 유학시절 비밀독립운동결사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으며
후유증으로 출옥 1년여만에 별세한다.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

박승유
(독립운동가, 1924~1990)
을사오적 자작을 받은 박제순의 친손자, 이를 습작받은 박부양의 아들.
태평양 전쟁 당시 아버지 박부양의 권유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중국전선에 배치되었으나 탈영, 
광복군에 합류하게 된다.
음악 쪽에 소질을 가졌기에 광복군 활동 시절 선전, 심리전 요원으로 활약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음대교수를 역임하게 된다. 

한때 매국노 후손이 잘된 케이스로 엄청나게 욕을 먹기도 하였는데 1990년 위암으로 별세하기까지 본인이 광복군 출신이라는 것을 내세우지 않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매국노 행각을 반성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별세이후 광복군 행적이 재조명되면서 1990년 애족장을 추서받아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