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아나운서 - 리춘희)

북한 특징이라면 지식인이고 뭐고 죄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만세만 주구장창 부르짖는다는거임

 

걔들도 나름 대가리가 돌아가니까 여기서 말한 것처럼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만세" 원툴로 밀어붙히는건 아니긴 한데 큰 맥락을 보면 저거로 대동단결하고 있음 ㅇㅇ

 

이게 시발ㅋㅋ 우리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잖아? 어떤 병신같은 동네가 체제 찬양만 시키고 비판하면 주둥이 봉인을 시키냐고

 

근데 쟤들도 나름 대가리가 돌아가는 사람이잖아? 솔직히 조선노동당 걔들도 나름 대가리 썡썡하게 돌아가는 놈들 모아놓은 집단일텐데 북쪽에 지능 저하 디버프가 걸린 것도 아니고 나름 이유는 있겠지?

 

지금부터 함께 알아보자

 

1. 사람이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는게 세상 이치라더라

북한의 인텔리 탄압을 알아보려면 한국전쟁에 대한 북한의 기억을 먼저 짚어야 함.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부모잃은 김일성은(드립이 아니라 실제로 그때는 죽어있었음) 38도선 전역에 걸쳐서 기습남침을 실시함. 북한은 마오쩌둥과 스탈린을 오랫동안 물고 빤 덕분에 든든한 지원을 받고 있었고, 이에 힘입어 쾌속진격함

 

그렇게 김일성이 목표한 대로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서 "남조선 해방"의 꿈이 이루어지나 했지만,, 그건 김일성 대가리 속에서나 가능했음. 실제로는 국군과 UN군의 사투로 인해 인민군의 공세는 낙동강 전선에서 돈좌되고, 9월에는 인천 상륙작전을 기점으로 시작된 대대적인 반격작전으로 인해 인민해방군이 이승에서 해방되는 결과를 맞이함

 

이후로 북한은 ㄹㅇ 좆망 직전까지 밀렸다가 마오쩌둥의 개입으로 겨우 살아남. 중공군의 대공세로 전선은 다시 밀리기 시작하고... 그러다 연합군의 반격으로 다시 밀리고 이후로 고지전에서 대규모 인력 손실을 겪다가 휴젼함.

 

한국전쟁에서 한국은 산업 인프라가 개박살났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인적 자원이 전쟁으로 소모되었고. 자원과 경제의 개념을 넘어서 누군가의 부모이자 형제였던 수많은 호국영령들께서 조국을 지키다 전사하심.

 

근데 우리가 이러는 동안 북한은 어땠을까? 아무리 그래도 선빵친 애들인데 우리보다는 피해가 덜하지 않았을까? ㄴㄴ 아님. 전쟁이 끝나고 진짜 좆된건 북한이었음.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북한 전역에 대해 무차별적인 폭격을 진행함. 단순히 폭격기를 동원한 폭격 뿐만 아니라 전투기들도 네이팜 들고 다니면서 보이는 족족 구워버렸음.

 

 '폭격'(창비 간)을 펴낸 김태우 서울대 평화연구소 HK연구교수는 "어린 시절 강원도 출신인 할머니에게 전쟁 때 제일 무서운 경험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폭격이었지.굴뚝에서 연기가 날 때마다 폭격하는 것 같더라. 그 이후로 제대로 밥을 해먹을 수 없었어'라고 회고하셨다"고 밝혔음.

 

비유가 아니라 ㄹㅇ 보이는 족족 조져놨던거. 그리고 그 결과가 이거임.




제철소(이었던것) (사진출처 = 창비)



평양 시가지(철거됨) (사진출처 = 창비)

 

전쟁이 끝나고 북한 주민들에게 미국과 남조선은 증오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음. 당연하지 시발ㅋㅋㅋ 저렇게 쳐맞았는데 안무서워할리가. 우리 이상으로 북한도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중임 ㅇㅇ

 

한반도에서 가장 친미적이고 기독교가 번성했던 평양 일대 서북지역은 '반미'의 중심지가 되었음. 지들이 먼저 매를 벌었다는걸 생각해보면 존나 어이가 없긴 한데ㅋㅋ 하여간에 쟤들은 그럼. 이런 반미 기조는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음.

 

중요한 점은 이 증오심의 이면에는 저렇게 쳐맞은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오는 공포감이 있다는거. 이게 좀 골때리는 부분이긴 함. 아니 시발ㅋㅋ 매를 벌었잖아 시발련아. 어쨌거나 북한의 마인드는 저럼. 쳐맞은 것에 대한 증오와 공포가 있음 ㅇㅇ.

 

휴전 이후부터 지금까지 북한의 정책에는 이러한 역사의식이 자리잡고 있어왔음.

 

2. 좆된거 같은데요?

 

휴전 이후 북한 내부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름. 그러다 60년대로 가면 북한은 내외부적 위기에 봉착함.

 

일단 경제가 좆망함. 왜? 물주가 돈을 안주고 있었거든. 북한은 1961년 제1차 7개년 계획에 앞서 소련에 지원을 받으려 했으나 실패함. 외부로부터의 자원 수급이 끊긴 상황에서 북한은 기술혁신으로 대응함. 이에 더해 모든 생산 단위에 대한 기사장의 역할 확대, 노동당의 지도 강화와 같은 경제 시스템 개편이 이루어짐. 또한 경제학자들에게 북한 경제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이론화를 주문함.

 

근데 왜 소련이 지원을 끊었을까? 왜냐면 이때부터 사회주의 진영에서 분열이 일어나서 그럼. 1950년대 후반부터 사회주의 진영 내부의 갈등은 첨예화되었음.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소련은 평화공존론을 주장하고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함. 이에 대해 중국은 불쾌감을 표시함. 마오쩌둥은 스탈린 따라하고 있었거든 ㅅㅂㅋㅋ 결국 1959년 중인 국경분쟁에서 소련이 인도를 두둔하며 갈등이 표면화됨. 중국은 소련을 수정주의로 소련은 중국을 교조주의로 비판함.

 

큰형님 둘 사이에서 북한은 1961년까지는 표면적으로는 중립적이고 실리적인 입장을 취함. 그런데 앞에서 7개년 계획 원조 못받았다고 말했지? 그걸  기점으로 북한은 소련의 노선을 비판하며 자력갱생 노선을 밟음.

 

 북한과 소련의 갈등은 62년 코메콘의 경제통합론과 쿠바 사태를 계기로 악화됨. 코메콘에서 소련은 비교 우위에 입각한 사회주의 국제분업이라는 원칙을 채택함. 이게 무슨소리냐면 소련이랑 동유럽은 공업이 발달해있고 아시아 애들은 농업 잘하니까 소련은 중공업 트리 올릴테니 아시아 애들은 땅이나 퍼먹고 살라는 내용이었음. 당연히 북한은 중국, 베트남과 함께 좆까라고 선언함.

 

이런 상황인데 북한이 소련에서 돈을 받을 수 있곘음? 당연히 못받지 ㅇㅇ 덕분에 경제는 좆망함 ㅋㅋ 자기들은 자력갱생이라고 얘기하긴 한다만 이 시기 북한 경제가 좆망한건 숨길 수 없음.

 

외부적으로도 좆되기 직전이었음. 쿠바미사일 위기 당시 소련이 보여준 미국에 대한 태도에 북한은 충격을 받음. 뭐가 되었든 간에 북한입장에서 보기에는 소련이 미국에 굴복하고 동맹국을 버린거니까. 그래서 북한은 경제뿐만 아니라 군사 문제 역시 소련에 의존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함. 그래서 62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 경제와 국방 건설을 함께하는 경제 국방 병진노선을 채택함.

 

이게 뭐냐면 국방에 돈좀 쓰겠다는거임. 그런데 중요한게 국방이 중요하긴 한데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자원을 그냥 버리는거랑 다를게 없거든? 전차를 만든다고 해서 그게 쌀을 생산하는건 아니잖아? 덕분에 안그래도 간당간당하던 북한의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짐. 63년부터 북한의 경제성장률은 급속히 둔화됨. 식량 생산도 1962년을 정점으로 감소세를 보임.

 

이런 경제 좆망 루트를 가속한건 대외 위기였음. 1966년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의는 경제국방 병진노선을 공식화하고 7개년 계획을 3년동안 연기하기로 결정함.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이 강화되고 미국과 한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하며 안보위기가 격화되었기 때문임. 북한 내부 자원을 긁어모으고 기술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버티던 북한 경제는 경제 국방 노선의 실제적인 추진으로 치명타를 입음. 66년에는 공업생산액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함.


어쨌거나 이 시기 북한은 내외부적 위기에 봉착했고 경제적으로도 좆망함. 진짜 국가가 붕괴된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떄임. 그런데 아까 말했잖아 미국에 대한 공포와 증오를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이 위기가 쟤들 입장에서는 생존의 문제였던거임. 약해지면 다시 처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거 ㅇㅇ

 

3. 좆같은 놈들이 살기 좋은 세상

한 1950년이었으면 북한은 중국이나 소련에게 살려달라고 했을 것임. 그런데 그럴 상황이 아니었음. 아까 말했던 것처럼 사회주의권이 쪼개지고 있었거든. 북한 입장에서는 소련이든 중국이든 다 좆같은 새끼들 뿐이었음.



(소련 정치인 - 니키타 흐루쇼프)

일단 북한은 소련을 수정주의라고 비판함. 왜? 일단 흐루쇼프가 주장한 평화공존론이 문제였음. 흐루쇼프는 쿠바에서 인류 멸망 3분 전까지 가보고 평화공존론을 들고옴. 다른 부분에서 경쟁하되 평화롭게 공존하겠다는 내용임. 근데 이 내용은 북한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음. 왜냐면 얘들은 존나 쳐맞았고, 언제든지 쳐맞을 수 있는 위치였거든. 소련이 내놓은 평화공존론은 북한 입장에서 소련이 자신들에 대한 안전보장을 때려치우고 미국 가랑이로 기어들어간거랑 다를게 없었음.

 

그리고 스탈린 격하운동도 문제였음. 중국도 그렇지만 김일성도 스탈린이 하던걸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거든 ㅋㅋㅋ 이걸 부정하는 소련의 태도는 북한 정권의 내부를 뒤흔드는 행위였음.

 

그리고 소련이 내놓은 평화적 이행론과 자본주의적 요소의 도입도 문제였음. 61년 10월 소련 공산당 22차 대회에서 소련 공산당은 계급문제가 완전히 소멸되었고 자본주의 부활의 가능성도 사라졌다는 판단 하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폐기하고 “전 인민적 국가”를 선언함. 흐르쇼프는 소련의 향후 과제로 급속한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한편 경제관리 분야에서 물질적인 자극과 이윤 등 자본주의적인 요소를 적극 도입하고자 함.

 

북한은 이를 자본주의를 부활시켜 사회주의를 내부적으로 와해시키는 행태로 간주함. 북한은 사회주의 승리의 수단으로 혁명이 아닌 자본주의와의 평화적 공존, 평화적 경쟁, 평화적 이행이라는 주장을 수정주의 노선의 이론적 기초로 지목하고 경계함.

 

다른걸 다 떠나서 내정간섭이 제일 문제였음. 앞서 말한 것처럼 코메콘에서 소련은 사회주의적 국제 분업을 기본 원칙으로 채택하고 분업에 기초한 생산 전문화와 경제 통합을 북한에게 강요했음. 이에 대해 북한은 연을 끊을 정도로 강하게 반발했음.

 


(홍위병의 소녀들)

소련이야 그렇다 치고, 중국은 믿을만 했냐면 그건 아니었음. 당시 소련이 수정주의였다면 중국은 교조주의였음. 문화대혁명이라며 홍위병들이 나라를 조지고 있었기 때문임. 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으로 혁명 1세대가 숙청됨. 그리고 북한이 베트남 전쟁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중국을 비판하며 북중관계가 냉각됨. 중국의 이런 상황은 북한에게 혁명의 미래에 대한 문제의식을 안겨주었음.

 

60년대 들어서 사회주의 진영의 노선은 각개 약진의 방식으로 분화하고 있었음. 소련은 실용주의, 중국은 급진적인 방식으로 나아감. 북한의 입장에서 소련의 방식은 자본주의가 부활할 위험이 있었고 중국의 방식은 계급 갈등을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혁명의 연속성을 파괴하고 국가의 역량을 경제건설에 집중하지 못하게 할 위험성이 있었음.

 

결국 북한은 자신의 길을 찾아나서기 시작함. 북한은 당과 수령, 대중을 단결시킴으로써 사회주의의 위업을 계승하고 경제를 건설하는 한편 자본주의적 요소를 철저히 제거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려 했음. 하지만 이 노선이 관철되기 위해서는 내부의 논쟁과 투쟁을 거쳐야 했음.

 

4. 너 왜 눈깔을 그렇게 떠?

 

소련과 관계가 악화되며 북한은 61년부터 62년까지 소련과 동유럽으로 파견했던 유학생들을 소환함. 그리고 수용소에 집단으로 수용해서 40일간 정치사상 교육을 받게 함. 소련과 동유럽에 널려있는 수정주의의 요소를 세탁해야 했기 때문임.

 

그런데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수정주의는 외부에 국한된 문제로 간주되었음. 그런데 경제가 좆망하면서 상황이 달라짐. 수정주의의 위협이 올라간거임. 김일성도 이걸 알고 있었고, 63년을 "수정주의의 위험성이 대단히 큰 해"로 지목하고 경제성장에 총력을 다함. 물론 좆망함. 북한의 공업 생산액 성장률은 62년까지만 해도 20%였지만 63년으로 가면 8%로 떡락함.

 

김일성은 이 과정에서 내부의 문제도 신경쓰기 시작함.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 인텔리였음.

 

원래 인텔리는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큰 기대를 받던 계층임. 일단 사회주의자들은 맑스-레닌주의를 과학적인 사상으로 이해했고 사회주의 건설에도 과학이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음. 이에 더해 일제강점기 시기 일제의 억압 속에서 인텔리들이 지주와 자본가의 편이 아니라 인민의 편에 섰다는 사실은 인텔리들이 반제국주의적 혁명성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졌음.

 

그래서 김일성은 과학과 생산의 결합을 강화하면 과학기술이 급속히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음. 그런데 과학기술 인텔리들은 생산현장에서 대두되는 과학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를 적극적으로 수행하지 않았음. 심지어 일부 과학자들은 자립적 과학기술 발전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음.

 

그래서 64년부터 김일성은 인텔리를 비판하기 시작함. "왜 너네 인텔리 시발롬들은 보수적이고 소극적으로 구냐, 니들은 노동 안하고 펜대만 존나게 굴려대니까 부르주아 사상을 못벗는거 아니냐"는게 그 내용이었음.

 

김일성은 북한에 소극주의와 보수주의, 이기주의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북한 사회 내부에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잔재가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음. 그리고 그 두 사상이 외부로부터 유입되고 있기도 하고. 그런데 김일성은 여기서 나아가서 경각심을 높이지 않는다면 내부에 남아있는 사상 잔재가 되살아날 수도 있고 밖에서 들어온 수정주의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했음. 그리고 그 결과는 북한이 좆망하는 것이고.

 

인텔리가 주목받은 이유는 이 낡은 사상 잔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존재로 생각되었기 떄문임. 특히나 대외적 위기가 고조되고 북한이 고립되면서 이 점에 대한 걱정은 더욱 커져갔음. 이전까지만 해도 인텔리의 혁명성이 강조되어서 사회주의 혁명의 선봉으로 생각되었다면 이제는 언제 변절할지 모르는 잠재적 배신자 집단으로 취급되기 시작한거임.

 

5. 어디로 갈까

앞에서 중국과 소련이 병신이 되가는 중에 북한은 자기들만의 노선을 찾기 시작했다고 말했었지? 북한은 당과 수령, 대중을 단결시킴으로써 사회주의의 위업을 계승하고 경제를 건설하는 한편 자본주의적 요소를 철저히 제거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려 했음. 그리고 이 노선을 만드는 일은 경제학자들의 몫이었음.

 

김일성 정권은 경제학자들에게 7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당의 정책을 충실히 뒷받침하고 사회주의 건설에서 나오는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라고 요구했음.

 

이런 요구는 경제 위기에 봉착하면서 "반수정주의 이론의 체계화"라는 화두로 발전함. 경제가 좆망하면서 수정주의의 침투를 우려한 김일성은 사회과학 부문의 인텔리들에게 북한이 사회주의 건설에서 봉착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창조적인 이론을 내놓으라고 요청함.

 

여기서 핵심 쟁점은 3개였음. 1. 경제성장의 속도와 균형 문제 2. 사회주의 건설에서 물질적 자극의 활용 문제 3.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였음.

 

경제 성장의 속도와 균형에서는 균형론과 속도론이 있었음.

 

균형론자들은 공업 간 균형을 보장해 기업소의 생산을 정상화하는 것이야 말로 계획경제의 발전에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주장함.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원료와 자재, 생산도구의 예비가 적어지니 초고속 성장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목표를 적당히 조절하자는거임.

 

이에 대해 속도론자들의 반응은 좆까라였음. 속도론자들은 사회주의 경제에서 균형은 경제 발전의 높은 속도를 보장하는데 있다고 주장함. 균형이 중요한게 아니라 빨리 성장하는게 관건이라는거. 그리고 불균형 자체에 대해서도 사회주의 사회의 계획경제에서는 불균형이 생길 수 없다고 반박했음. 나아가서 높은 속도를 보장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균형론자들이 주장한 생산 예비가 중요한게 아니라 "사람들의 높은 혁명적 열의"와 같은 주체적 요인이므로 정치적 동원을 더 강력히 해야 한다고 주장함.

 

자본주의적 요소의 활용에 있어서는 물질적 자극 배합론과 정치도덕적 자극 우선론이 대립했음.

 

물질적 자극 배합론자들은 노동자들의 생산 의욕 고취를 위해 물질적 자극을 정치도덕적 자극과 배합하자고 주장함. 계획경제에서 가치 법칙을 적극 이용하고 물질적 자극을 경제관리 영역에 적극 도입할 것을 주장함. 이게 무슨 소리냐면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자본주의 사회가 그러하든 상금과 가격 등을 통해 생산에 인센티브를 부여해야 한다는 말임.

 

정치도덕적 자극 우선론자들은 물질적 자극 배합론자들을 비난했음. 이거 시발ㅋㅋㅋ 딱 봐도 자본주의 냄새나잖아. 물질적 자극 배합론자 말대로 하면 사회주의 경제가 자본주의 경제로 돌아간다고 보았음. 오히려 정치도덕적 자극을 위주로 인민대중의 혁명적 열의와 생산의욕을 높이는 것이 답이라고 주장했음.

 

이 문제는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와 연결됨. 사회주의에 따르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 동안에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해야 했음. 그런데 문제가 언제까지가 과도기냐는거지.

 

여기서 과도기 종결론자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완화론자들은 북한의 사회주의 제도가 수립되었으므로 과도기가 종결되었다고 주장함.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과도기가 마무리 되었으므로 완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함. 계급 대립이 소멸되었으니 소련처럼 경제 균형을 맞추며 물질적 자극을 배합해 경제 성장에 주력하자고 제안했음.

 

반면 과도기 지속론자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강화론자들은 과도기를 사회주의 건설이 완성되는 시기까지로 상정함. 얘들 입장에서 과도기에는 사회주의 제도가 수립되어 있긴 하지만 과거의 낡은 사상 잔재가 남아있으니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과도기의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봤음. 그래서 과도기의 중요한 과제는 속도전으로 빨리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인민들을 정치도덕적으로 성장시키며 자본주의 사상 잔재를 반대하는 사상투쟁을 벌이는 것이었음.

 

그리고 북한의 선택은 속도론, 정치도덕적 자극 우선론, 과도기 지속론자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강화론으로 기울었음. 대내외적 위기에 내몰리고 있는 북한의 입장에서 반대의 선택지는 체제 붕괴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선택이었기 때문임. 그리고 이 선택은 갑산파 숙청으로 굳어짐.

 

6. 갑산파 숙청과 인텔리 길들이기

 

1967년 북한 내부에서 갑산파가 대규모로 숙청됨. 8월 종파 사건 이후로 있었던 대규모 숙청이었음. 갑산파의 등장은 북한에게 충격적이었음. 왜? 8월 종파 사건으로 소련계, 연안계 다 숙청해서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파만 남아서 이제 안정되나 싶었더니 또 내부 투쟁이 발생한거임. 특히 대내외적 위기는 이러한 위기감을 증폭시켰음. 내부에서는 경제가 좆망해서 수정주의 기류가 흐르고, 외부에서도 위협이 들어오는데 북한 내부에서 투쟁이 벌어지면 다 죽는다는거임.

 

그래서 북한에게 갑산파의 등장은 위기의식을 강화하는 사건이었음. 당 중앙위원회가 지목한 갑산파의 죄목은 크게 3가지였음.

1. 김일성의 혁명사상에 반대한 점, 수령의 권위와 위신을 훼손한 행위

2. 자립적 민족경제 노선과 경제-국방 병진 노선, 대안의 사업체계 천리마 운동 등 당의 노선과 정책을 비방하고 집행을 방해하는 행위

3. 봉건유교사상과 수정주의 사상, 부르주아 사상 등 반동적인 사상을 유포시킨 행위

 

여기서 핵심적인 내용은 수령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음. 다만 김일성과 김정일은 갑산파 숙청을 계기로 인텔리들을 손보려고 했음. 당 정책에 대한 비판, 균형론에 대한 강조, 가치 법칙을 강조하면서 물질적 자극을 배합하려는 행위, 과도기 종결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완화 주장 등 그동안 인텔리들이 경제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제안한 진단과 처방이 반당 수정주의로 지목되면서 인텔리들은 크게 위축됨.

 

갑산파 숙청 후 김일성은 함흥에 대한 현지지도를 시작으로 인텔리에 대한 집중지도사업을 전개함. 그 시작은 함경남도와 함흥에 대한 현지지도였음. 김일성이 함경남도와 함흥을 인텔리 지도의 시작점으로 삼았던 이유는 이 두 장소가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핵심인 화학공업이 집중된 도시이자 과학원 분원이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었음.

 

여기서 김일성은 무연탄가스화 공사와 제1요소비료공장 건설 이후 자재가 준비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경남도와 함흥시가 노동자들의 혁명 열기를 추동해서 곧바로 제2요소비료 공장 건설을 하지 않은 행태를 문제삼음. 결국 왜 생산 활동에 그렇게 소극적이냐는 거임.

 

이런 현지 지도는 단순히 인텔리 개조에서 그치지는 않았음. 이후 김일성은 생산현장들을 방문하며 내부 예비를 최대한 동원하고 기술혁명을 벌임으로써 보수주의와 소극성을 버리고 생산력을 최대한 증진시키자고 노동자에게 촉구함.

 

1968년 4월과 5월에는 전국청년총동원대회와 제2차 전국천리마작업반운동선구자대회도 소집됨. 이에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생산력 증진 운동이 벌어짐. 이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 건설에 적극적인 노동자와 사회주의 건설에 소극적인 인텔리는 대비되었고 인텔리는 더 큰 압박을 받음.

 

이런식의 생산 부분에 거친 인텔리에 대한 압박은 앞서 말한 경제노선에 따른 결과임. 앞서 말한 것과 같이 60년대 북한은 대내외적 위기에 봉착했고, 특히 경제 부분에서 총체적인 실패에 이르렀음. 북한은 이에 대응해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을 갈궈서 기술혁명, 정치적 도덕자극을 통해 생산력을 늘리고자 했던거임. 사실 그때 고립된 북한 입장에서 다른 선택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북한의 시민들의 모습  (매경DB - 사진)

인텔리 길들이기는 단순히 갈구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음. 김일성은 인텔리들이 혁명화되지 못하고 낡은 사상 잔재를 갖게 되는 이유를 정신노동에서 찾았음. 정신노동은 개별적으로 하는 노동이므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가 나타날 수 있고 규율과 통제를 싫어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거임. 따라서 인텔리를 붉은 인텔리로 만들기 위해 사상과 사고방식, 일하는 습관과 생활방식을 모두 노동계급의 것처럼 개조해야 했음.

 

이 방법으로는 크게

1. 조직생활의 강화와 자아비판, 상호비판의 일상화

2. 혁명전통 교양의 강화

3. 혁명 사적지 답사

가 쓰였음. 조직생활을 강화해 개인주의 성향을 개조하고 혁명전통 교양의 강화와 혁명사적지 답사를 통해 붉은 인텔리의 기본 소양을 다진거임.

 

이 인텔리 개조사업은 유일사상체계가 확립되는 1972년에 마무리 단계에 들어섬. 이 때 72년 4월 11일 김일성의 생일을 맞아 개최된 전국사회과학자대회에서 사회과학부문 인텔리들은 <우리 당과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 드리는 맹세문>을 발표함. 여기서 나온 자아비판의 핵심은 수령과 당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제대로 된 이론과 학설을 내놓지 못했다는 것임. 해당 맹세문에서 사회과학자들은 수령의 사상과 의도대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붉은 과학전사가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임을 결의함.

 

이제 북한의 인텔리들은 자유로운 사고 속에서 당과 수령의 정책과 노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집단이 아니게 되었음. 지식과 기술로서 당을 정치사상적으로 결사 옹위하는 친위대로 변모한거임.

 

7. 생존의 논리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북한의 지식인들의 모습은 60년대에 그 기틀이 잡힘. 대내외적 위기 속에서 북한은 강력한 통제로 대응했음. 그리고 그 중에서 인텔리는 위험요소였음. 특히나 위기 속에서 당과 수령의 노선에 반기를 드는 인텔리들의 모습은 좋지 않게 보였을 것임. 이에 따라 북한은 인텔리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작업에 들어감. 그리고 그 작업은 꽤나 성공적이었음.

 

60년대 북한은 붉은 인텔리 만들기를 통해 당의 정책과 노선에 대한 이견을 제거할 수 있었음. 이에 따라 수령-당-대중의 통일된 정치경제를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함. 그리고 그렇게 위기를 넘김. 물론 그에 따른 폐해도 있었음. 북한은 전문가 집단의 퇴조와 비전문가의 행정대행에 따른 정책 실패의 문제에 시달려왔음. 물론 쟤들도 위기를 넘긴 이후로 80년대부터 과학자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고 과학기술 중시 정책을 강화하기 시작함.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김정은 때에도 계속되고 있음. 여명과학자 거리 올리고 그런것처럼. 다만 붉은 인텔리의 면모 자체는 그대로라 할 수 있음. 아직까지도 북한은 학문적 자유가 크게 제한되고 있음.

 

그렇다면 우리는 한번 쯤 물어봐야 할 것임. 이 모든 조치가 그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그럴 필요가 있었는가? 북한은 그렇다고 답할 것임. 시작에서도 말했지만 북한의 정책은 한국전쟁 시기 형성된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에 기초한 부분이 큼. 60년대, 북한이 인텔리 개조사업에 들어갈 때만 해도 학문적 자유는 생존에 선행할 수 없는 가치였음. 오히려 학문적 자유의 이름으로 수정주의 반동들이 암약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음. 그래서 북한은 생존을 위해 학문적 자유를 거세하는 결단을 내렸던 거임.

 

이게 우리 입장에서 보면 참 그렇긴 한데, 한국도 비슷한 역사를 거쳤던 점을 생각해 보면 의미심장하기도 함.

 

해당 글은 정진아(2020). 1960년대 북한의 '붉은 인텔리' 만들기. 통일인문학, 84, 5-41 의 내용을 요약하고 일부는 덧붙인 내용임.

 

60년대 북한이 처한 대내외적 상황을 바탕으로 북한의 인텔리 개조사업에 대해 분석한 논문임. 좋은 논문이고, 북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봐도 좋을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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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가의 질문에 답변할 정도의 수준이 못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