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원순이형한테 빚진 게 있다고 생각 하기에 이  건에 대해 한번 깊게 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이 그 날인듯 합니다.

굉장히 긴 글이 될 것이나, 그를 마지막으로 추모한다고 생각하고 읽어주셨으면 진심으로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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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는 박 전 시장의 행위를 ‘성적 언동’으로 보고,
부적절한 메시지 전송과 신체 접촉 등을 문제 삼았음. 그리고 중요한 건, 인권위가 내린 핵심 결론이

**“공적 영역에서 이뤄지는 성적 언동은 노동환경을 해치므로 성희롱에 해당한다”**

는 기준을 적용했다는 점임.

다시 말해, 성희롱이라는 건 단순히 의도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수위가 어느 정도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이나 행동이 권력관계 안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따지는 구조적 문제라는 것.

하지만 이런 맥락은 다 잘라내고,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박 전 시장을 ‘성범죄자’ 프레임에 쑤셔 넣은 뒤, “추악한 위선자”라는 자극적인 타이틀로 소비해댔고, ‘죽은 사람에게는 항변할 기회도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정치적 이득과 클릭 장사를 위해 죽은 사람을 생포된 죄인처럼 다뤘음.

단 하나의 맥락도 없이, 구조도 없이, 단지 “너무 충격적이지 않냐?” “이게 진보냐?”는 식의 자극적인 문장만 남발했음. 이건 보도도 아니고, 해설도 아니고, 그냥 사람 하나 조리돌림해서 잿더미로 만들고 그 불구경으로 돈 번 악의적인 행위라고 봐야 함.

결국 죽은이는 불길에 휩싸여 오랫동안 타오르다 잦아들었고, 우린 또 하나의 민주당의 얼룩 하나가 ‘잊혀진’ 듯 쉬쉬하며 넘어갔음. 근데 그게 끝난게 아니었음.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성희롱에 대한 사회 전체의 이해도는 여전히 바닥 수준임.

이 사건은 단순히 “한 남자의 일탈”로 마무리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언론의 탐욕이 어떻게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가를 보여준 사례임.

성희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게 단순히 ‘선 넘은 말 한 마디’가 아니라 어떤 권력관계 안에서, 어떤 구조 속에서 벌어졌는지를 따지는 고도의 사회적 인식이 필요하다는 걸 모두가 배워야 함.

그런데 지금은 대법원 판결을 들먹이며 ‘성추행범이 공식적으로 인정됐다’는 식으로 박 전 시장에 대한 부관참시를 또다시 반복하고 있음.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는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는 거임.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등 여성 인권 투쟁의 최전선에서, 그리고 서울의 도시 행정과 복지정책을 통해 시민의 삶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만들고자 고군분투했던 그의 생은 분명 고단하고도 고결한 여정이었음.

하지만 그는 생의 마지막 존엄조차 지키지 못한 채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죽은 뒤에도 그 한 번의 낙인으로 인해 정치적 먹잇감이 되어 날카롭게 다듬어진 수많은 펜과 손가락질에 난도질 당했음. 그리고 그 이후에도, 보궐선거를 앞둔 민주당 내 동지들에게 차게 식어버린 등을 찔렸음.

그런데 이제는 대법원 판결을 들먹이며 ‘성추행범이 공식적으로 인정됐다’는 식으로 박 전 시장에 대한 부관참시, 굴묘편시를 또다시 반복하고 있음. 초평왕과 크롬웰 저리가라 할 정도의,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는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는 거임.

그 모든 소란을 지나 오늘 이 자리에서, “박원순 동지”에게 조용한 위로를 보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15년 박근혜 정권 당시 광화문에 모인 시위자들을 향한 경찰 물대포의 수원을 서울시 소화전에서 공급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그 결정! 그 한 장면만큼은 분명히 기억되어야 함.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분명한 빚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