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참전자 인터뷰 사이트 frontstory.ru에서 작년에 진행한 인터뷰로, 번역한 것을 저장만 해 놓고 그냥 두었다가 최근 부고가 들려온 관계로 업로드해 봅니다.

본문 : http://frontstory.ru/memoirs/germany/otto-carius/

편의상 인터뷰어는 Q, 카리우스는 A로 표기하겠습니다.
독일어 인터뷰를 러시아어로 번역한 것을 중역했기 때문에 원래의 내용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A : 안녕하세요? 오, 내 옛날 사진을 가지고 있군요! 오첸 하라쇼! (역주: 카리우스는 인터뷰 도중에 러시아어 표현을 가끔 사용하였습니다. '아주 좋다'는 뜻) 화석을 찍어놓은 사진이나 마찬가진데 말입니다!



Q : 연세에 비하면 아주 정정하십니다. 화석이란 표현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걸요.

A : 이게 전부 녹음되고 있는 건가요? 말을 조심해서 해야겠군.



Q : 지금부터 드릴 질문은 저희가 준비한 것만이 아니라 러시아의 여러 전쟁사 연구가들이 선생님의 책을 읽고 알고 싶어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전쟁 초기 부분이죠. 우선 처음에는 말리나바 전투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은데요. 여기 사진 두 장이 있습니다.

A : 오, 말리나바 말이군요.



Q : 이날 소비에트 연방 영웅 두 명이 전사했습니다. 둘 다 대대장이었고요. 이게 그 사람들 사진입니다. 혹시 아는 얼굴이 있으신지 알고 싶습니다. 한 명은 자기 전차 안에서 불타 죽었고, 다른 한 명은...

A : 이 두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건 확실히 기억합니다.



Q : 자살한 다른 한 명은 보신 적 있습니까?

A : 아니요. 다른 병사들이 봤지요. 직접 본 적은 없어요.



Q : 책에는 이 사람들이 달고 있던 메달들을 보셨다고 쓰셨는데요.

A : 이야기만 전해들었습니다. 직접 본 사람들도 거기에 그대로 두고 왔고요. 아무도 그걸 가지고 오진 않았어요. 우린 그런 짓 하지는 않았습니다. 미군들이면 모를까. 그 치들은 뭐든지 다 떼가더군요.

저는 죽은 사람이나 포로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적 전차가 무력화되고 나서 승무원들이 전차에서 탈출할 때 쏘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독일연방군에서는 신입 전차병들이 도망치는 적 전차병들을 사살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중대에서는 아무도 그런 짓을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두나부르크에서 발 한 쪽을 잃은 소련군 포로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담배를 한 개피 권했는데 사양하고는 한손으로 자기 담배를 말아서 피우더군요.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모르겠어요. 마호르카(독한 담배의 일종)였지요. 좀 구식인 친구들이었어요. 물론 일반 보병들 이야기고 기술병과 사람들은 전혀 달랐습니다.

당시 많은 러시아 병사들이 전투에 밀어넣어져 헛된 죽음을 당했습니다. 나르바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5~600명이 죽었어요. 얼음판 위에 배를 깔고 있었죠. 완전히 미친 짓이었습니다.

우리 쪽에는 이런 경우가 좀 적기는 했지요. 그렇게 죽을 병력마저도 남지 않았으니 어디 그런 일이 가당키나 했겠습니까. 헌데 한번은 공세가 끝난 뒤 남은 대대 병력이 10명밖에 되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1개 대대에서 고작 10명만 남았단 말입니다.





Q : 1940년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있었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장전수 훈련을 받으셨다고요.

A : 그래요. 징집병이었습니다. 장전수가 알아야 할 것은 뭐든지 배웠습니다. 그 외에 기초군사훈련도 있었지요. 행진이나 경례 같은 것들이요. 생존법도 배웠는데 그 덕분에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Q : 전차장에게서 어떻게 명령을 전달받았습니까? 수신호? 육성? 아니면 뭔가 통신장비가 있었나요?

A : 무전기가 있었습니다. 소련은 이 부분에서는 기술 면에서나 인력 면에서나 우리보다 약간 떨어졌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1942년에 이미 전쟁에 지고 말았겠지요. 그리고 승무원 개개인들의 훈련에도 헛점이 있었습니다. 전투중에 해치를 열고 바깥을 살피는 소련 전차장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우리에게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소련에게는 아니었을 겁니다.



Q : 이동중에 장전수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A : 장전수는 포가 항상 장전된 상태로 유지하고 기관총이 고장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기관총에서 탄걸림이 일어나면 고쳐야 했지요. 장전수는 참 고달픈 보직이었어요. 바깥도 안 보이고 전투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체코제 Pz 38(t) 전차의 장전수에게는 관측장비가 전혀 없었고, 티거 전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Q : 장전하기 전에 포탄에 묻은 그리스를 닦아내셨나요?

A : 그런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보급받은 포탄은 그냥 그 상태로 장전했습니다.



Q : 보급된 포탄을 적재하는 게 장전수의 일이었죠?

A : 예. 내가 전차에 실었습니다. 티거는 98발이었고 체코 전차는 그보다 많았지요.



Q : Pz 38(t)에는 철갑탄과 고폭탄이 각각 몇 발씩 적재되었나요?

A : 체코제는 철갑탄과 고폭탄의 단 두 종류만 실렸는데, 보통 50대 50으로 적재했습니다. 비율은 전차마다 달랐고 전차장이 결정했어요.





Q : Pz 38(t)가 러시아에서의 전투에 잘 맞았나요?

A :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승무원이 전부 해서 네 명이었는데, 전차장이 지휘에 사격, 관측까지 다 해야 했어요. 너무 많은 일을 부담해야 했던 겁니다. 소대장이나 중대장쯤 되면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사람은 머리가 하나밖에 안 달려있지 않습니까? 다만 기동력 하나만큼은 좋았습니다. 시쳇말로 '허리 아래'는 튼실했다는 겁니다. 반자동식 유성기어 차동장치나 성능 좋은 현가장치 같은 부분 덕에 주행능력은 아주 좋았습니다. 그것뿐이었지만요.

장갑 재질도 그저 그랬고 3.7cm 주포는 T-34에게는 너무 약했습니다. 만일 우리 침공 시기가 소련군 개편 시기가 아니었고 소련이 T-34의 배치를 좀 더 일찍 마쳤거나 운용방법을 더 빨리 터득하기라도 했다면 전쟁은 늦어도 1941년 겨울에는 소련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을 겁니다.



Q : T-34와의 첫 전투가 기억나시나요? 전투가 끝난 뒤에 살펴 보신 적은 있습니까? 직접 타 보았다든가?

A : 그때는 전방부대에 있지 않았어요. T-34하고 붙은 것은 전방부대들이었지요. 아주 무시무시한 이야기들 뿐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소련군이 신형 전차를 보유하고 있다는 게 왜 지휘관들에게 그렇게 큰 충격젓인 일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카잔에서 독일과 소련이 합작해서 전차를 개발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 아닌가 싶었으니까요. 우리들은 T-34에 대해서 전혀 몰라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Q : 승무원을 서로 바꾼 경우도 있었나요?

A : 경우에 따라 달랐습니다. 같은 승무원들끼리 계속 지낼 수 있는 경우는 운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소대장이나 중대장은 계속 전차를 바꿔 탔고 그럼 쫓겨난 전차장은 화를 냈습니다. 그렇지만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지요. 지휘관은 어쨌든 전차를 타야 했으니까요.



Q : 제 말은, 조종수가 포를 쏘거나 포수가 조종을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A : 가능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장전수 시절에는 조종수를 대신해서 조종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계속 이동하기만 했기 때문에 교대가 필요했거든요.



Q : 교전 목표물 지정은 어떻게 했나요?

A : 전차장이 지정했습니다. 숙련된 포수는 그와는 별개로 전장을 계속 살펴보고 있었고요. 주로 전차장이 어떤 목표물을 쏠 것인지 결정했습니다.

지정된 목표 전달 방식을 훈련받을 때에 배우긴 했지만 우리는 그냥 지금 하는 것처럼 평범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말은 별로 많이 하지 않았고 주의해서 외부를 관측했는데 특히 전차장의 역할이 중요했지요. 예를 들어서 제가 포수의 왼쪽 어깨에 손을 얹으면 포가 왼쪽으로 돌아갔고 오른쪽 어깨에 손을 얹으면 오른쪽으로 돌아갔습니다. 말이 필요 없었지요.

요즘 전차들은 전차장이 직접 통제가 가능한데, 우리 때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사실 필요하지도 않았어요. 전차장이 워낙 바빠서 그것까지 할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Q : 기동 중에도 사격을 하였나요? 아니면 정차해서?

A : 정차했을 때만 사격했습니다. 기동간 사격은 명중률이 너무 떨어지기도 했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거든요.



Q : 주행중 정차해야 할 때에는 조종수에게 뭐라고 지시하셨나요?

A : 멈춰Stopp 혹은 정지Halt 같은 말이었는데 특별히 정해진 건 없었습니다. 나는 조종수가 모든 승무원 중 가장 중요한 보직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조종수는 어디서 멈춰서 적절한 장소에 전차를 위치시키고 측면을 숨긴 채 전면만 노출하는 방법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Q : 소련군은 전차호에 전차를 숨기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A : 가끔 했는데 특히 첫해 겨울에 방어전을 펼쳐야 할 때 그랬습니다. 대전차포가 모자랐거든요.



Q : 전차장으로서 다른 승무원들과 함께 전차를 청소하기도 하셨나요?

A : 재미있는 질문이군요. 이전 전차장은... 그 사람이 탄피나 연료통 같은 걸 만지는 모습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탄약이나 연료 보급 때는 항상 거들었어요.

승무원들의 사기 진작에 아주 좋았지요. 작은 수고로 큰 효과를 거둔다고나 할까. 물론 실제로 필요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승무원들만 하면 쉬이 피로해졌기 때문입니다.



Q : 이전 전차장은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A : 그 총 맞은 사람이요. 책에 이름이 쓰여 있을 텐데.



Q : 1941년에 사관학교에 갔다 오셨죠. 돌아오실 때 동계복장을 가지고 오셨나요?

A : 그땐 아직 없었지요. 소련군에게는 이미 있었고요. 많은 병사들이 소련군 시체에서 방한화를 벗겨내려고 끙끙대다 죽었습니다.

어떻게 그 겨울을 이겨냈냐고 묻는다면... 살아남은 건 사실인데 어떻게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허허벌판에서 영하 50도까지 떨어지는 추위를 맞으며 겨울을 보냈어요. 보급품은 도착하지 않고 모든 것이 얼어붙었지요. 음식은 말고기와 얼어붙은 빵조각 뿐이었습니다. 그나마도 잘라낼 수가 없어 도끼로 찍어야 했어요. 따뜻한 음식은 구경도 못 했고 우리 사전에서 '청결'이라는 단어도 사라져 갔습니다. 눈, 얼음 폭풍, 방한복은 없고, 전차도 없고, 까만 전차병 제복 뿐이었지요. 하얀 눈과 정말로 잘 어울리는 색깔의 복장이었습니다. 그렇게 눈 위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면 동계전투에 이골이 난 소련군 스키병들이 하얀 설상위장복을 입고 귀신처럼 나타나서 우리를 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살아남았어요.



Q : 벼룩이 있었나요?

A : 사방이 벼룩 투성이었습니다! 만일 그때 벼룩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동부전선 전방에 있어 본 경험이 없는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100%요!



Q : 집에 들어가 있지는 않으셨고요?

A : 스탈린이 청야전술을 실행하라고 했다는 말은 당신도 들으셨겠지요? 그 첫 겨울에는 집 같은 건 기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긴 전차는 있었고 적어도 그 안은 좀 덜 축축하기는 했지요. 하지만 난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추운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보병들은 사정이 더 나빴습니다. 위생상태도 끔찍했고요. 그걸 어떻게 이겨냈나 모르겠습니다. 그 벼룩떼! 속옷도 못 갈아입고!

우리 승무원들은 중간중간 전차가 고장나서 수리해야 했던 이삼 일을 빼고 1월 20일부터 4월 20일까지는 전차 안에서만 지냈습니다. 면도도 못 해서 수염을 그대로 길렀지요. 내 경우에는 그나마 나았습니다. 정기적으로 본부에 갔었는데 그때 손이라도 씻을 수 있었으니까요.



Q : 소련군은 땅을 파고 위를 전차로 덮은 뒤에 그 밑에서 잠을 잤는데 시도해 보신 적은 없나요?

A : 부대가 잠깐씩 정지할 때는 했었지요. 헌데 폭탄이 어떤 전차 위로 떨어져서 그 밑에서 자던 승무원들이 몰살당한 이후로는 금지됐습니다. 그 뒤로는 그렇게는 못 하고 건물이나 무덤, 아무튼 땅이 조금이라도 움푹 들어간 데라면 어디든 찾아서 숨었습니다.





Q : 사관학교에서 돌아온 뒤에 어떤 전차에 배치되셨나요?

A : 처음에는 전차고 뭐고 없었습니다. 전투공병소대장으로 발령받았었지요. 지뢰나 뭐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직접 부딪쳐 가며 배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의 경험이 나중에 꽤 도움이 되기는 했습니다만. 어쨌든 그리고 나서 상사 계급장을 달고 전차소대장이 되었습니다. 전차는 여전히 체코제였고요. 그 뒤에야 진급해서 7.5cm 포 탑재 4호 전차 소대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Q : 아주 추울 때 전차 시동은 어떻게 거셨나요?

A : 배터리가 살아 있으면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너무 추우면 이따금 시동을 켜서 예열을 해 줘야 했지요. 보병들은 이걸 아주 싫어했어요. 엔진 소리를 들으면 전선 건너편의 '친구'들이 우리가 공격을 시작하려고 하는 줄 알고 사격을 퍼부어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Q : 전차 밑에 불을 피워서 데워 보신 적이 있나요?

A : 그런 것은 해 보거나 들은 적이 없습니다.



Q : 대전차견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A : 들어는 봤는데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Q : 소련의 대전차소총은 얼마나 효과적이었나요?

A : 3호와 4호 전차의 측면은 아주 쉽게 관통되었습니다. 그러다 쉬르첸이 도입되면서 좀 더 가까이 와야 관통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것도 100% 보장은 할 수 없었고요. 티거에는 큰 소용이 없었습니다. 내 말은, 궤도를 파괴하는 등 피해는 입힐 수 있었지만 승무원을 해코지하는 건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Q : 그 티거에 대해서 말인데요. 얼마나 신뢰성 있는 전차였나요?

A : 처음에는 골치를 썩였습니다. 처음 티거를 운용하기 시작한 중대는 볼호프 인근 라도가에 배치되었는데, 지면 상태가 끔찍했던 데다가 겨울이라서 배치된 전차 전체가 고장나고 말았지요! 신기술이라는 게 항상 그렇습니다만.

티거의 신뢰성에 큰 영향을 끼친 요소가 바로 조종수의 숙련도였습니다. 경험이 풍부한 조종수는 고장 빈도를 낮춰줄 수 있었어요. 처음에는 다행스럽게도 고참 조종수를 데리고 있었지만 야크트티거로 옮겨갔을 때는 새파랗게 어린 친구가 조종수로 배치되었던 터라 아주 끔찍했습니다. 내가 탔던 티거 217호차는 단치히 근처에서 자폭시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전 후반기까지 버텨 주었습니다.



Q : 야포나 항공기, 지뢰 따위로 인한 손실이 컸나요?

A : 항공 공격으로 인한 손실은 별로 없었고 야포는 관측반을 대동했을 때만 위협적이었습니다. 관측반이 없으면 맞는 포탄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관측반이 오차를 수정해 주면 급히 해당 위치에서 이탈해야 했습니다. 어쨌든 전반적으로 장사정포는 오차가 너무 커 맞는 경우가 별로 없었습니다.



Q : 소련군의 대전차포와 전차 중 어떤 게 더 두려우셨나요?

A : 대전차포가 더 위협적이었습니다. 전차는 보기 쉽지만 대전차포는 안 보이게 위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련군은 대전차포 위장을 어찌나 꼼꼼하게 했던지 사격하기 전에는 아예 찾을 수가 없었어요. 아주 좋지 않았지요.



Q : 공병으로도 근무하셨다고 했는데 지뢰지대 극복은 얼마나 어려웠나요?

A : 거기에는 그렇게 오래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는 것도 대부분 근접 대전차전투를 하는 대전차반 일이었고요. 그래도 전차장으로서 유익하기는 했습니다. 지뢰의 위험성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공병 일을 하지 않았다면 막연한 공포감을 가졌겠지만 그 뒤로는 특별히 무서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Q : 1942년 10월에 두베르트 사단장이 경질되는 일이 있었는데 이게 올바른 일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A : 1942년이라... 아직 20사단 있을 때 일이군요. 그땐 나는 아직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어요. 아는 사람도 대대장인 폰 게스트 뿐이었습니다.



Q : 소련이 1943년 152mm 자주포를 배치했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A : 아, 15.2 자주포! 포탑을 돌릴 수가 없어서 전차보다 불리했지요. 지휘관 입장에서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요. 몇 번 교전한 경험이 있습니다. 주행속도 뿐만이 아니라 발사속도도 느려서 초탄에 명중시키지 못하면 틀렸다고 봐도 무방했습니다. 상대가 재장전할 때까지 기다려 주질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잘나신 독일인들은 그런 선례를 보고도 야크트티거 따위를 만들었어요. 정신이 나간 게지.

소구경 자주포라면 지원 용도로 유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5.2는 너무 컸습니다. 포신을 통해 밖에서 포수를 쏴 버릴 수도 있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 녀석들 때문에 우리 쪽이 아주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측면을 노린다면 어렵지 않게 격파할 수 있기도 했고요. 하지만 나르바에서는 그 자주포에게 격파된 적이 한 번 있었습니다. 전차를 좌측으로 회전하고 있던 도중에 우측에 포탄을 맞고 우리 전차가 완전히 박살이 나 버린 겁니다. 15.2cm 포탄은 한 발만 맞아도 아주 끔찍했어요.



Q : 소련군 지상공격기가 전차도 파괴했나요?

A : 네. 로켓으로요. 하지만 명중률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부대에서는 공중공격으로 인한 손실은 나오지 않았어요. 확실히 굉장히 무섭기는 했지만 우릴 맞추지는 못했습니다.



Q : 1942년 봄 뱌지마에서의 전투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A : 좋은 기억은 없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쉴 틈이 없었어요. 그때는 대대본부와의 연락을 담당하는 연락장교였습니다. 전령 노릇을 하려고 걸어서 대대본부까지 왕복하면서 참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련군의 공격은 줄기차게 계속되었는데 특히 밤에 더 심했습니다. 우린 항상 경계를 서야 했기 때문에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고, 보급사정도 안 좋았던 데다가 식사도 형편없었습니다.

우린 항상 소련군이 우리처럼 지휘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지휘체계는 임무 기반이었던 반면에 소련 쪽은 명령 기반이었지요. 가령 소련군 부사관이 어딘가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거기로 가서 담배 한 대 피워물면 끝이었습니다. 반면에 독일군 부사관이 그런 명령을 받았고, 도착했는데 적이 후퇴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추격해 나가야 했습니다. 아주 큰 차이지요. 적은 이 사실을 1944년에 알았지만 베를린까지 똑같은 방식을 고수했어요.



Q : 소대장으로서 첫 승리를 거두었을 때는 어떠셨나요?

A : 승리에 대한 건 말할 만한 게 없지만 처음으로 사고 친 건 기억납니다. 소대원들이 저녁을 먹는 동안 내가 경계를 서고 있었습니다. 다들 식사를 마쳤길래 슬슬 내려오려고 했는데 고개를 돌려 보니 우리가 호위하던 보병부대가 이미 공격에 나섰지 뭡니까. 그것 때문에 아주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Q : 그래도 처음으로 적 전차를 격파했을 때는 기억하시죠?

A : 첫 격파? 그게 언제더라... 처음은 내가 아니라 내 포수였지. 그게... 생각납니다. 시냐비노의 라도가 전투에서였지요.



Q : 티거 전차를 타고 계셨나요?

A : 그래요. Pz 38(t)나 4호 전차로는 소련군 전차를 격파할 엄두도 못 냈습니다. Pz 38(t)를 타고 있었을 때라면 소련군 전차병들이 전차 안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어도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을 겁니다.





Q : 소련군 전차병들이 전차에 1단 기어를 놓고 밖으로 탈출해서 전차가 독일군 전선까지 그대로 굴러갔던 사건을 혹시 목격하셨나요?

A : 봤습니다. 네벨에서 있었던 일이지요. 사진도 가지고 있어요! 아주 특이한 일이었습니다.

원래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면 전차는 멈추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뭔가로 페달을 눌러 놓고 나와서 전차가 계속 전진할 수 있었던 모양이에요. 자동차로도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우리는 아주 혼란스러웠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아내는 데 시간을 상당히 허비해야 했습니다.

얼마나 자주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어쨌든 네벨에서 한 번 일어난 것은 분명합니다.



Q : 그것 한 번 뿐이었나요?

A : 네. 그래서 우리가 혼란스러웠던 겁니다. 그런 일은 또 겪은 적이 없었습니다.



Q : 전차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신뢰성이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A : 나는 기동성과 무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 그럼 신뢰성은 어느 정도 중요할까요?

A : 나는 내 중대에서 겪은 경험만 말해줄 수 있습니다. 티거에 대해 묻고 있는 게 맞겠지요? 흔히 신뢰성이 떨어진다고들 하는데 우리 중대에서는 전투중에 고장이 나서 손실된 적은 없었습니다. 보통 이동중에 고장나곤 했지요. 전투중엔 안 그랬고요.

사실 조종수 실력에 달려 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700~800마력짜리 엔진이 달린 60톤짜리 차량이니까요. 주의깊게 조종해야지 아무렇게나 몰면 안 됩니다. 안 그러면 뭔가 망가지게 되 있었지요. 어쨌든 전투중에 고장난 사례는 없었습니다.



Q : 포구제퇴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A : 반동을 줄여 주지요.



Q : 땅에서 흙먼지를 일으키지 않았나요?

A : 별걸 다 물어보시는군! 뭐... 확실히 그랬지요. 그냥 익숙해졌어요.



Q : 소련제 휘발유를 사용하시기도 했나요?

A : 우리 부대에선 연료가 부족한 적은 없었습니다.



Q : 전차 안에 슈납스(증류주)를 싣고 다니셨는데, 어디서 났고 어떻게 다시 채워넣으셨나요?

A : 내 책에서 읽으셨군, 맞습니까? 흥미를 돋우기 위해 넣은 이야기였지요.

적의 손에 넘어가지 못하게 하도록 전차마다 폭약이 항상 한 덩이씩 실려 있었는데, 다들 그걸 보고 기분이 께름칙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 슈납스를 준비해 놨다고 쓴 겁니다. 내 전차 승무원들은 거의 손을 안 댔지만 다른 중대원들 중에서는 마구 퍼마신 축도 있었습니다.

상대편의 경우에는... 뭐, 소련군은 보드카를 많이도 마셨습니다. 좀 지나치게 많이 마셨지요. 그 친구들은 몸을 덥히는 걸 너무 좋아했는데, 이건 어떻게 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소련군 지휘부도 개선해 볼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습니다.

큰 국면에서 볼 때 가장 똑똑하고 교활한 지도자는 스탈린이었습니다. 일이 그가 예상한 대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부크 강에 국경을 설정하기로 히틀러와 맺은 조약이나 기타 여러 가지 협정들이 있었는데, 내가 보기엔 스탈린은 히틀러가 프랑스를 치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을 테니 충분한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프랑스를 제 시간 안에 함락시켰고 그것이 스탈린의 오산이었지요.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그런 잘못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히틀러가 한 것과 같은 실수를 하고 있어요. 그 결과도 같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비스마르크 역시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아니라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동독 시절 어떤 서기장은 연설에서 '모스크바를 배우는 것은 승리를 배우는 것이다'라고도 했고요.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미국과 이스라엘 뿐입니다. 여기에서 무서운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아프리카나 또다른 곳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나면 거기는 예전 그대로 돌아갈 겁니다. 러시아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전에 거기서 싸웠지 않습니까? 거기서 전쟁을 벌여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우리는 11년 만에 알았지요. 이라크도요. 미국의 CIA가 사방에 개입하고 있는 겁니다.



Q : 개인화기를 가지고 다니셨나요?

A : 7.62mm 권총이 있기는 했는데 써 본 적은 없습니다. 8mm 권총은 너무 무거웠고요.



Q : 전차 안에 기관단총이 있었나요?

A : 예. 그렇지만 그걸 썼던 기억도 없습니다.



Q : 장포신형 T-34가 등장했을 때 바로 알아채셨나요?

A : 처음 보았을 때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게 개발됐다는 소식을 이미 알고 있어서 충분히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이전 기종보다도 훨씬 강력한 전차였습니다.

그리고 스탈린 전차는... 내가 보기에는 그다지 필요한 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분리형 장약을 썼는데도 포탄이 아주 무거웠을 겁니다. 그 전차가 실제로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은 없군요.

그렇지만 T-34는 아주 우수한 전차였습니다!



Q : 전쟁 중에 비트만에 대해서 알고 계셨나요?

A : 물론이지요. 비트만은 항상 신문에 실리거나 공장, 학교, 당 회의 같은 데서 화제로 올라오곤 하는 아주 유명한 선전용 인물이었습니다.



Q : 비트만이 올렸다고 하는 전적이 실제로는 과대포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A : 그게 선전용이었다는 건 전쟁이 끝나고서야 알았습니다. 그 전에는 까맣게 몰랐지요.

내가 비트만과 맞먹을 만큼 많은 훈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내가 젊어서였을 겁니다! (웃음) 나도 신문에 여러 번 나왔었는데, 내가 좀 전에 서명해서 건네드린 바로 그 사진이 신문마다 실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수상하기는 했습니다. 전차 승무원 전원이 기사 철십자장을 받았다니. 기사 철십자장 수여 조건은 전투 중 스스로의 판단으로 전투에 관여하여 전술적 성공을 거두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전수가 어떻게 개인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었겠습니까? 조종수는요? 장전수는 또 어떻고? 무전수나 조종수, 장전수가 어떻게 기사 철십자장을 받는다는 겁니까? 심지어 포수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포수 역시 전차장의 명령을 받을 뿐이니까요. 그런데도 승무원 전원이 다 수여받았었어요.



Q : 장교들이 기사 철십자장을 받으려고 몸이 근질근질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A : 그래요. 내 전임 중대장의 경우도 그랬지요. 원래 기사 철십자장 수훈자는 대대장밖에 없었는데, 이 사람은 실제로 전공을 세워서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소대장이 하나 받았고 그 다음이 나였습니다.

대대 전체에 수훈자가 그만큼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전투가 끝나고 그 전임 중대장이 비겁한 행동 때문에 군법회의에 회부될 뻔했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을 전차에서 끌어내고 대신 지휘를 맡아야 했습니다. 책에도 나와 있는 이야기지요. 재판을 안 받은 것은 순전히 슈트라흐비츠가 전출을 갔기 때문이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것입니다. 전투 시작 전에 그 사람은 기갑척탄병 대대장에게 '오늘은 꼭 기사 철십자장을 받겠습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는데, 그 꼴이 난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내 책을 읽었을 테니 내가 어떻게 기사 철십자장을 받았는지는 잘 알겠지요. 대대 전원이 도열해 있고, 나는 오두막 앞에 서 있고... 그때는 무슨 병에 걸렸었는지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습니다.

평시에 나는 절대 훈장을 달고 다니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전시에는 그런 훈장들이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이득을 주곤 했지요. 적어도 우리 중대의 경우에는요.

하라쇼! 기억이 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훈장이고 뭐고 없는 젊은 중위에게 대위가 걸어와서 뭔가 명령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야볼!' 이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중위의 가슴에 기사 철십자장이 떡하니 달려 있으면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그 대신에 '아주 좋은 말씀입니다. 그럼 내일 다시 들어보도록 하죠'라고 말할 수 있었지요. 아니면 아예 '싫습니다'라고 하거나요. 우리 중대에는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휴식 중에는 기사 철십자장을 중대 본부 벽에 걸어 두었었는데, 병사들의 사기 진작에 아주 좋았습니다.



Q : 왜 평시에는 훈장을 달지 않으시려는 건가요?

A : 훈장을 다는 건 우리 중대를 위해서만이었습니다. 평시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어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축구경기에서 나 혼자 세 골을 넣어서 사람들이 내 이야기만 한다면 팀 전체의 평가는 오히려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쁠라호이! (역주: 러시아어로 '좋지 않다') 이건 중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 일입니다. 내가 지금 당신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런 자리에서 훈장을 달고 나오는 건 적절치가 않아요. 훈장을 소중히 한 것도 모두 우리 중대를 위해서였지요. 모두 중대를 대표하는 의미로만 훈장을 착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어요. 만일 내가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전쟁에서 살아남아 이런 자리를 가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진흙 속의 호랑이'에서 내가 참호 속에 쓰러져 있던 부분을 기억하시겠지요. 그리고 장전수가 전차에서 뛰쳐나와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어요. 그리고 의무병 역시 자진해서 나를 도왔습니다. 나를 거기 남겨두고 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Q : 상부에서는 선생님을 기사 철십자장 수훈자로서 어떻게 대했나요? 더 많은 영웅적 행위를 보이기를 기대했나요?

A : 아니, 아니지요. 말도 하고 싶지 않군요. 싸워야 하는 것은 공포 뿐이었습니다. 자기가 영웅이라고 생각한 자들은 모두 죽었어요. 공포와 맞서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공포야말로 용기를 위한 선행 조건이었으니 말입니다.

아, 미안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Q : (위 질문 반복)

A : 위쪽에서는 좀 더 잘 믿어주었습니다. 어느 정도 자유를 보장받았다고 할까요. 가끔씩 명령을 거부할 수도 있었지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내가 부상을 입었을 때는 중대 전체가 불행해졌습니다. 내 대리로 지휘를 맡은 사람은 언제나 전투를 벌이고 싶어 안달이 난 친구였어요. 괜찮은 녀석이고 의욕도 넘쳤지만 순 초짜였지요. 철십자장이고 뭐고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척탄병들에게는 완전히 무시당했을 뿐만 아니라 보병 쪽 대위나 소령이 와서 너 이거 해라 하고 시키면 그 친구는 그 지시가 아무리 말도 안 되는 것이라도 '야볼!'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도와줄 수도 없었지요. 퀴벨바겐에 누워 옴짝달싹도 못하는 상태여서 바깥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훈장이 좋은 점만 있었느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야크트티거 중대를 지휘하게 되었는데, 이 사람들과는 전혀 안면이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조종수인데 백엽검 기사 철십자장을 단 중대장이 새로 부임해 왔다? 그럼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아, 우리는 개죽음을 당할 테고 저 중대장이란 자는 우리 시체를 가지고 훈장을 더 많이 받겠구나!

1945년에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도 그런 식으로 일이 돌아갔습니다. 중대 선임부사관이 넌지시 그 이야기를 해 주더군요. 그래서 나는 중대원들을 모아놓고 이 전쟁은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나는 중대가 입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하겠다고 일장연설을 해야 했습니다. 그제서야 중대원들이 나를 믿어주기 시작했습니다.



Q : 기사 철십자장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 어떤 역할을 했나요?

A : 아주 안 좋은 쪽으로 작용했지요. 우선 나를 쫓는 프랑스인들로부터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종전 후에도 그쪽에 친구들이 좀 있었는데, 몸을 숨기지 않으면 수용소에 잡혀들어갈 것이라고 알려주더군요. 그리고 마인츠 대학교 수강허가를 받았었는데 개강 1주일 전에 취소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거부통지서를 형에게 들려서 프라이부르크의 약국 사장에게 보내 일자리를 좀 찾아주십사 부탁했습니다.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의 좋은 사람이었는데, 형에게 자리가 없거든 자기가 나를 거둬주겠다고 했지요. 운이 좋았습니다.

기사 철십자장 수훈자 모임을 열려고 하면 다들 우리에게 돌을 던집니다. 외국인들은 우리를 좋게 보는데 여기 사람들은 범죄자로 취급해요. 독일 내의 분위기가 이렇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태어나신 뮌스터에서는 기념 명판을 독일연방군 것만 빼고 다 떼서 없애 버렸습니다. 전통이고 뭐고 깡그리 무시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자동차 범퍼에 '살인마'라는 스티커를 붙이곤 합니다. 이게 다 민주주의 덕분이지요. 러시아에서는 독일이 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라고 합니다만, 여기서는 나라를 위해 복무했던 사람이 뭔가 말을 할라치면 이내 입에 재갈이 물려지고 맙니다.

동독의 '모스크바를 배우는 것은 승리를 배우는 것이다' 표어가 있었던 것이 또 생각나는군요. 메르켈 총리가 예전에 모스크바에서 공부했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항상 러시아 문화가 흥미로웠어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추는 그 춤들! 아직도 보곤 합니다. 그리고 그 음악! 아주 매력적이에요.

소련 민간인들은 항상 '스탈린은 좋고, 전쟁은 나쁘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아마 스탈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고 그랬겠지요.

나는 군인이라 민간인들에 대해 나쁘게 말할 것은 별로 없습니다. 진군할 때는 민간인들이 추수하는 걸 돕기도 했고요. 그리고 스탈린이 고안한 '청야전술'이 나왔습니다.



Q : 열등인간(Untermensch)이라는 표현이 전쟁 전에 나왔나요, 아니면 전쟁 중이었나요?

A : 홍보물에 항상 나오는 문구였지요. 요즘 사람들은 우리가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다고들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 표현에 회의적이었습니다. 비웃었지요. 원래는 눈물을 흘렸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전선에는 '열등인간' 따위는 없었어요!

소련군 포로들은 항상 굶주렸습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요. 우리도 배고픈 건 마찬가지였으니까요. 항상 뭐든지 모자랐습니다. 거기다 갑자기 5만, 10만씩 포로들이 생기면 먹을 것을 줄 수 없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보급선이 버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친절하신 서방 연합군들은... 우리에게 남아있던 보급품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습니다. 라인가우에서도 그랬고 그 외에도 있었지요. 나는 동부전선의 소련군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서방 연합군이 가장 끔찍한 자들이었어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에게 남아있던 아주 적은 것들마저 짓밟아 버렸으니 말입니다.



(인터뷰를 진행한 아르템 드랍킨과 오토 카리우스)


Q : 정치장교 명령(역주 : Kommissarbefehl, 포로로 잡힌 소련군 정치장교들을 별도의 절차 없이 즉각 살해하도록 한 히틀러의 명령)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A : 그 명령은 모두들 알고 있었습니다만 실제로 처형하는 것을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나는 우리에게 붙잡혔던 정치장교 한 명이 내 전차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도 가지고 있어요. 최악의 경우에라도 처형은 후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일은 전방에서는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지만, 반대로 후방에서는 어떤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일랴 에렌부르그(역주 : 소련의 작가, 언론인. 전쟁 중 독일에 대해 극도로 공격적인 글을 기고)는 나치들 기준으로도 너무 심했지요. 그냥 말도 안 됐어요. '하루에 독일 놈을 한 놈이라도 잡아죽이지 않았다면 그 날은 헛되이 보낸 것이다'라니!
(역주 : 자극적인 내용으로 화제가 되었던 일랴 에렌부르그의 기사 '죽여라'의 내용)



Q : 에렌부르그에 대해서는 어디서 들으셨나요?

A : 선전물이었지요. '재봉틀'이라고 부르는 선전물 살포 항공기가 뿌리고 다녔습니다.



Q : 선전물은 독일어로 되어 있었나요?

A : 물론입니다.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없었어요.



Q : 소련군을 증오하셨나요? 포를 쏠 때 사람을 쏜다고 느끼셨나요? 아니면 그냥 목표물을 쏘는 것이었나요?

A :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습니다. 자기보존본능이지요. 군인이라면 누구나 다를 바 없었어요. 우리가 저항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쏜 적이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격파한 전차에서 탈출하는 승무원들의 예를 들 수 있겠군요. 우리가 위험할 때만 발포했습니다.



Q : 증오는 어떤가요?

A : 아니오. 말할 수가 없군요. 동정심은 있었습니다. 동정심이요.



Q : 소련군 참전용사들은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이야기를 즐겨 했는데요. 선생님도 동료들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A : 우리는 항상 전쟁이 끝나면 집에 처박혀 있던 자들과 선동가들, 나치당원들을 혼내주자는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던 동기는 '적들이 제국 국경에 접근하는 것을 저지하자'였습니다. 소련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예를 들어 프랑스군은 소련군보다 훨씬 떨어졌습니다. 규율이나 인간성, 전투 준비 수준에 있어서 독일군이 가장 나았어요. 연합군에서는 허용되는 여러 가지 것들이 우리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지요.



Q : 소련군에게서 뭔가 배우신 점은?

A : 따로 새롭게 배울 건 없었지요. 내가 알아야 할 건 다 알고 있었으니까요. 러시아인들의 장점이라면 조국을 위한 충성심과 헌신이었다고 할 수 있겠군요. 시골 마을 사람들까지도 그랬습니다. 내가 살 곳을 골라야 한다면 서쪽이 아니라 동쪽에 살았을 겁니다. 나에게는 차이코프스키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서구 작곡가들과 작가들보다도 더 친숙해요. 그리고 톨스토이! 차이코프스키 전집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라흐마니노프도 좋아합니다.



Q : 전쟁이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이셨나요?

A : 전쟁은 당신의 성격을 망치로 두들기는 일과 같습니다. 혹자는 부서져 버리고, 혹자는 더욱 강해지지요. 우리는 소박했고 요즘 젊은이들처럼 이것저것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젊은이들은 자기중심적인 데다가 물질에 얽매이면서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있어요.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건강과 평화 뿐입니다.

전쟁은 정치의 더 나쁜 대안일 뿐인데 세상은 아직도 그걸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 예전보다도 더 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어요.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가끔은 우리가 중세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될 정도입니다.



Q : 우수한 군인의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 규율입니다. 병사수첩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이행하고 민간인과 포로들에게 적절한 대우를 해 줄수 있는 것. 인도적인 행동. 기본적인 겁니다!



Q : 우수한 장교의 조건은요?

A : 겸손함과 부하들을 생각하는 마음. 모범이 되어 선두에서 이끄는 것! 양심과 충성심, 자신감, 그래도 무엇보다도 겸손함이지요. 말은 줄이고 실천은 더 해서 스스로를 자신이 표현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것이 장교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Q : 저에게는 선생님이 그런 조건에 꼭 맞는 분인 것 같아요.

A : 그랬으면 좋겠군요. 그렇지 않았다면 붙잡혀 있다 돌아온 뒤로 이렇게 많은 분들이 나를 계속 찾아주시지 않았을 테니. 그건 여기 약국에서 같이 일하는 페트라 씨가 보증해 줄 겁니다.

내 밑에 있던 부사관 중 한 명이 비엔나에서 지냈는데, 하루는 그 부인이 전화를 해서 남편이 입원을 했다고 하더군요. 20인 병실에 누워서 제대로 간호도 못 받고 있길래 즉시 비엔나로 달려가 원장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곧바로 2인실로 옮겨줬지요. 그런 것이 바로 동지애입니다! 아니면 케르셔 상사 이야기도 있지요. 그 사람은 러시아 오지나 다름없는 바바리아의 숲 속에 살았어요. 길 따위는 없고 순 진흙탕 뿐인 동네였습니다. 갑자기 찾아가 놀래켜주고 싶어서 1952년에 그 친구가 집으로 돌아간 뒤에 가 봤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한 번씩 찾아가 봤으니까요. 그런데 그 사람 모친은 복도에서 주무시고 닭들이 그 옆을 그냥 지나다니더군요. 아이는 넷이나 있는데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이대로는 아무 것도 벌지 못할 테니 애들을 키우고 싶거든 독일연방군에 입대하라고 말해 주었지요. 본에서 근무하는 독일연방군 장교가 둘 있었는데 하나는 내 감독관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비군 대대장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케르셔를 좀 써 달라고 부탁했더니 교관이 필요하기는 하다고 말하더군요. 그러고는 다른 장교 한 명이 와서 전과나 뭐 그런 것이 없는 깨끗한 사람이냐고 물어보기에 내가 보증을 서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일하게 된 덕분에 케르셔의 아들 하나는 프라이부르크에서 의사를 하게 되었고 다른 하나는 BMW 감사회에 들어갔습니다. 딸 하나는 잉골슈타트에 집 셋과 가게 셋을 샀고 다른 하나는 쇼핑몰 점장이 됐어요. 우리가 그 곳에서 데리고 나와준 겁니다.

독일연방군에서 장군을 하던 다른 동료도 그렇게 사람들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천생 전차병인 사람이라 별까지 달았지요. 지금은 양로원에서 지냅니다. 그 사람도 원래 독일연방군에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렇지만 전쟁이 끝나니 나이를 너무 먹어 대학에서 공부를 할수는 없었죠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내가 이룬 가장 큰 성과는 1945년 4월 18일 중대를 해산시켜서 중대원들이 포로로 잡히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Otto Carius. 1922.5.27~2015.1.24
심혈관질환으로 사망
고인의 명복을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