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얼음왕관 성채에서 떨어졌을 때 느낀 것. 아니면 해방? 괴로움.
아서스는 죽었다. 복수는 이뤘다.
내가, 복수가 아니면 무엇이지? 밴시는 낮게 물었다.
되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미 썩은 육신은 그녀의 영혼을 붙잡기엔 너무나도 여렸다.
실바나스는 얼음왕관 성채에서 떨어졌고, 죽었다.

그녀는 꿈을 꾸었다.
한없이 푸르던 쿠엘탈라스의 들판.
꽃송이 화려하게 피어오르고, 또 짓밟히던 곳.
군마는 지축을 울리고......
몇 번째 화살이 활시위를 떠났나. 텅 빈 화살통의 감촉.
화살이 없다고 탄식하는 궁수가 있더냐.
손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쥔 단도로 돌격하는 자신.
그리고 느껴지는 차가운 칼날의 감촉......
아서스! 아서스! 나를 섬겨라....섬겨라...

뒤얽힌 의식이 돌아오자 그녀는 어느 바위산에 있었다.
용광로마냥 뜨거운 용암이 울컥거리는 장소였다.
죽고나서 행복한 곳으로 갈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건만,
그럼에도 보이는 광경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사슬에 묶여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영혼들.
그녀는 한없이 걸었다.
검은 날개를 가진 것들이 어두운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다 도망치는 듯한 영혼을 꿰뚫었다.
영혼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지고 그들이 쓴 가면 너머에서 킬킬거리는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실바나스는 자신의 등에 있는 활의 감촉을 느꼈다. 그녀는 그것을 꼬나쥐었다.

곧 날개달린 것들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가면 너머에서 일렁이는 안광이 소름이 끼쳤다.
실바나스는 이내 능숙한 궁수의 솜씨로 활에 화살을 먹이고 그대로 쏘았다.
검은 화살이 그대로 뜨거운 공기를 갈랐고, 날개달린 것들은 화살에 맞아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질렀다.
실바나스는 한동안 바위들 사이를 뛰어오르며 화살을 쏘았다.
검은 날개들은 쉽사리 다가오지를 못했고 망설이는 듯 했다.
실바나스는 이 곳에서 탈출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 때, 갑자기 저 너머에서 우르릉 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늘을 뒤흔들 만큼 거대한 짐승의 소리였다.

거수는 실바나스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경로에 있던 바위가 조약돌마냥 박살나고, 미처 피하지 못한 검은 날개들이 부딪혀 날아가고 있었다.
실바나스는 급하게 활을 조준해 거수의 무릎을 맞췄다.
순찰대장이었던 자였던만큼 놀랄 정도로 정확한 솜씨였다.
하지만 거수는 잠깐 휘청거리는 듯 하더니 속도를 줄이지도 않고 그대로 돌격해오고 있었다.
실바나스는 당황했지만 이내 두번째 화살을 쏘았다.
두번째 화살은 미간이었다.
하지만 거수의 갑옷에는 소용없다는 듯, 화살은 그 솜씨가 무색하게 팅겨나가고 말았다. 거수는 그대로 돌진했다.
실바나스는 급하게 옆으로 뛰었고, 거수는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실바나스가 있던 자리를 지나 그 뒤의 바위에 처박혔다.
무너지는 소리를 내며 바위가 바스스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먼지에 가린 거수의 그림자는 움찔거리다 다시금 일어섰다.
거수의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실바나스는 평범한 방법으론 이 괴물을 이길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활에 화살을 먹이고 거수가 움직이는 것을 기다렸다.
거수는 자세를 추스르더니 다시금 실바나스를 향해 돌격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실바나스는 활을 든 자세 그대로 살짝 자세를 낮췄다.
거수가 괴성을 지르며 실바나스에게 달려드는 순간, 실바나스는 기다렸다는 듯 옆에 있던 바위를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거수의 등을 밟고는 거수의 목 뒷부분을 조준했다.
끝이다. 실바나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활시위를 놓았다.
실바나스의 화살이 거수의 목을 꿰뚫었다.

거수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치다 곧 숨이 끊어졌다.
쿵 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 거대한 몸이 볼품없이 쓰러졌다.
실바나스는 가볍게 거수의 몸에서 내려왔지만, 이내 그녀의 주변에 포진해있는 검은 날개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창을 들고서 그녀를 포위하고 있었다.
"데려와라."
하늘에서 어느 목소리가 들렸다.
쇳소리가 섞인듯한 공포스러운 목소리였다.
강압적인 목소리였지만 실바나스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녀라도 이런 대규모의 포위를 뚫고 지나가기엔 힘들었기에, 그녀는 이내 활을 등에 메고 두 손을 들고서 순순히 그들의 명령에 따랐다.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간 곳에는 온 몸에 룬이 새겨져있는 거대한 존재가 있었다.
실바나스는 그 룬을 알고 있었다.
잠에 못드는 몸임에도 언제나 그녀의 꿈에 나타나 그녀를 좀먹던 칼날.
서리한에 새겨진 룬과 같은 종류의 룬이었다.
실바나스는 그것을 깨닫고 그 존재에 대해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사고는 거기까지 닿지 못했다.
그 존재의 발치에는 새하얗게 샌 백발을 가진채, 갑옷을 입고 있는 비루한 남자가 사슬에 묶여 있었다.
발치에는 부서진 검이 놓여있었고, 본인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듯 했다.
한 때 잔인하게 그녀를 보던 눈은 흐리멍텅하게 허공을 보고 있었다.
"아서스!"
그녀는 달려들듯 그 이름을 외쳤다.
그 존재의 발치에 있는 것은 틀림없는 리치왕, 아서스 메네실이었다.
그녀의 목가에 찌르듯 창이 하나 겨눠졌다.
실바나스는 한걸음 물러설 수 밖에 없었지만,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뒤엉키고 있었다.
"나는 간수라고 한다."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던 존재가 입을 열었다.
"여기는 나락이라고 하지. 용서받을 수 없는 영혼이 떨어지는 버림받은 곳이다."
간수는 말을 이었다.
그는 말을 하며 아서스의 주변을 가볍게 걸었다.
"이 영혼은 내 하수인이 되기로 약조한 존재가...나에게 선물로 준 것이지. 이것은 내 것이다."
간수는 그렇게 말하며 아서스에게 묶인 사슬을 쥐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를 팽개쳤다.
실바나스는 한마디 탄식을 외치며 그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다시금 간수의 병사가 창을 그녀에게 겨눴다.
"나에겐 하등 쓸모없는 것이다. 내 계획의 일부였건만, 실패만 하고 말았으니."
간수는 그렇게 말하며 실바나스에게 이글거리는 눈길을 보냈다.
"나는 복수를 원한다. 그러려면  나락으로 수많은 영혼이 흘러들어와야 하지. 그들이 내뱉는 고통어린 비명 하나하나가 나의 힘이 될 것이다."
간수는 손을 들어올려 말했다.
그의 손에 희끄무레한 영혼들이 뭉쳐지다 흩어졌다.
"너와 비슷한 목적이지. 너도 복수를 원하지 않았나?"
실바나스는 고개를 떨궜다.
그녀는 복수를 위해 살았고, 복수를 이뤄 죽으려 했다.
"네 복수의 온전한 끝을 위해선.....이것이 필요할 수도 있지. 영원한 고통을 안겨주고 싶지 않나?"
간수는 어느새 그녀의 옆에 있었다.
"상상해보거라. 그의 영혼에서 영원한 탄식이 피어오르는 광경을. 네가 나와 약간의... 거래를 한다면 이 사슬의 손잡이를 주도록 하지."
"그 거래란 것이 무엇이냐."
실바나스는 고개를 돌려 간수를 보며 물었다.
그녀의 눈은 활활 타오르는 듯 했다.
"영혼을 가져와라."
간수가 속삭였다.
"아제로스에 핏자국을 새기고, 그 영혼들이 모두 나락으로 흘러오도록 흐름을 바꿔라. 필요하면 내 하수인들을 써도 좋다."
간수는 다시금 아서스의 사슬을 쥐었다. 마치 확신을 주고 싶다는 것마냥.
"그럼...이것은 네것이 되겠지."
실바나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대답했다.
"알겠다."

그녀는 눈을 떴다.
주변에는 발키르들이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모든 것들을...죽이고 나서..."
실바나스는 얼음왕관 성채의 바람을 맞으며 말했다.
"나는 복수로부터 자유로워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