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서 태어난 자 -5- <음모의 시작>

 



 티콘드리우스는 침묵을 지키는 아스타르를 꽤 오래 기다렸지만 그의 인내심도 한계에 이르렀다.


  “아스타르, 그대는 내게 조만간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네. 그대의 기다림은 아직도 숙성이 덜 된 것인가?”


  티콘드리우스의 형상을 한 환영은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기다림에 대한 싫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스타르는 티콘드리우스의 환영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기다림에 대한 숙성이 그대를 화나게 만들었나 보군, 티콘드리우스. 하지만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네.”


  “그렇다면 지금 답을 들을 수 있는 건가?”


  티콘드리우스의 목소리에서 미약한 기대감이 흘러나왔다. 아스타르는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난 그대와의 협력을 원하네. 성전을 재개하려면 그 방법이 가장 확실할 것 같으니까.”


  “역시 현명하군.”


  티콘드리우스의 환영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다만 나에게도 조건이 있네.”


  “조건?”


  “난 군단이 내전으로 큰 피해를 입어서 성전을 재개하는데 장애가 생기는 걸 원치 않네. 지금까지 내전으로 발생한 군단의 피해만 해도 결코 적다고 볼 수 없지.”


  아스타르는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티콘드리우스의 환영을 똑바로 보면서 이어 말했다.


  “악마들이 제각각 나뉘어서 피를 흘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왕이면 군단의 피를 적게 흘리면서 내전을 끝냈으면 하네. 피를 흘려야 할 대상은 언제나 우리가 정복하고 정화해야 하는 세계이니까.”


  “그건 우리 나스레짐들도 바라는 바일세. 하지만 저들이 원치 않아.”


  아스타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생각이 맞네. 다른 세력들은 눈앞의 이익과 영광에만 집착한 나머지 대의를 잊고 있지. 그 결과가 바로 이 소모적인 내전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새로운 경쟁 방법을 조건으로 내세우고 싶네.”


  “새로운 경쟁 방법? 그건 뭔가?”


  티콘드리우스는 아스타르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각 세력의 지도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경쟁을 벌이는 것이네.”


  “지금 우리가 필멸자들이나 하는 투기장 싸움을 하길 바라는 것인가?”


  티콘드리우스의 불쾌함은 아스타르의 예상 범주에 있는 반응이었다. 아스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하지만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 그대가 직접 싸우란 이야기는 아니네.”


  “내가 직접 싸울 필요가 없다고?”


  “내전에 참여하고 있는 모두가 그대의 힘을 경계하고 있네. 그들 모두 오만하지만 힘의 차이를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지. 그래서 지도자들끼리만 싸우자고 제안하면 거절할 것일세. 하지만 각 세력의 지도자가 아닌 각 세력이 지닌 뛰어난 투사들을 대표자로 내세워 겨루게 한다면 어떨 것 같은가? 그것도 한 명이 아닌 3명 정도로 말일세.”


  “. 그런 방식이라면 놈들도 가망이 있다고 생각하겠군. 다만 우려스러운 점이 있군. 저들의 투사가 더 강력할 경우 우리의 계략은 실패할 수 있네.”


  티콘드리우스의 지적에 아스타르는 고개를 저었다.


  “적들이 누굴 내세우든 승리는 필연이니 안심하게.”


  “또 다른 안전장치를 생각해둔 모양이군.”


  “내 부관들을 투사로 내세울 것이네.”


  티콘드리우스는 아스타르의 말에 갸웃거렸다.


  “그대의 부관들 중 우리 나스레짐보다 전투에 능한 이들이 있다는 건 나 역시 인정하는 바이네. 하지만 그것 만으로 충분하겠는가?


  “내 계략에는 자네 동족의 역량도 포함되어 있네.”


  “우리 나스레짐의 역량이라?”


  “그렇네. 한 배를 탄 입장으로 솔직하게 답해주게. 저들 사이에 자네 부하들이 얼마나 잠입해 있는가?”


  아스타르가 묻자 티콘드리우스는 잠시 고민을 했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답했다.


  “벨리스라 휘하를 제외하면 다 잠입해 있네.”


  “이상하군. 왜 벨리스라를 제외한 건가? 그녀와 손을 잡았나?”


  아스타르는 이미 답을 예상했다. 벨리스라가 티콘드리우스와 손을 잡았을 가능성은 적다. 보나 마나 벨리스라에게 침투하기 어려운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 형제들이 조금 애를 먹는 모양이더군. 하지만 곧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네.”


  티콘드리우스는 이유까지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스타르는 굳이 더 묻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녀석들이 누굴 투사로 내세울지 사전에 파악하기 용이하겠군.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투사들은 미리 배제할 수도 있을 것이고. 나스레짐들이 그 일을 담당해주게나.”


  아스타르는 미소를 지으면서 티콘드리우스와 통신을 끊었다. 그의 음모는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