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서 태어난 자 -6- <벨리스라>




  잠입을 시도했던 나스레짐들 대부분을 처리했지만 하나는 의도적으로 남겨두었다. 나스레짐들이 아스타르 자신을 여전히 감시하고 있다고 믿도록 하면서 그들이 모든 것을 알 수 없도록 수를 쓴 것이다


  물론 감내해야 할 일도 있었다. 나스레짐의 감시를 받으면서 일을 꾸미는 건 아스타르에게도 그동안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을 기만하기 위해서 더 많은 수고를 기울여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수고를 덜어도 되었다.


  하메라의 주문은 아스타르의 기대한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이런 주문에 그동안 아스타르 자신도 얼마나 속았을까? 그는 하메라의 주문을 이용해서 나스레짐 첩자를 손쉽게 속일 수 있었다.


  덕분에 에레다르의 유력한 지도자 중 하나인 대학자 벨리스라와 접촉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벨리스라의 본래 이름은 벨리라였다. 그녀는 한때 아키몬드가 이끄는 아우가리의 2인자였고, 악마가 된 이후에도 아키몬드의 유능한 집행관 중 하나로 활약했다. 그 오만한 자락서스조차 한때 그녀의 부하에 불과했었던 걸 생각하면 그녀는 가장 파멸자의 자리에 근접한 에레다르 군주였다.


  “뜻밖이군, 아스타르. 네가 내 제안을 거절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벨리스라는 아스타르의 연락이 의외라는 듯 말하면서도 제안을 거절당했던 일을 여전히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대학자 벨리스라. 그대가 내 거절에 아직도 상심하고 있는 줄은 몰랐군.”


  “그날 네놈을 지옥불꽃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다짐했었지.”


  벨리스라의 말에 아스타르는 웃음을 터트렸다. 벨리스라의 오만한 자존심에 자신이 깊은 상처를 안겨준 것 같아서 꽤 만족스러웠다.


  “나에 대한 그 마음은 지금도 유효한가?”


  “네놈이 연락을 취해온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겠지.”


  벨리스라는 오만해도 아둔한 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아스타르가 자신에게 연락해온 의도를 파악하고 싶어했다.


  “협력할 의사가 있네. 난 그대가 아키몬드님의 직위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네.”


  “저번과는 태도가 완전 다르군. 무슨 속셈이냐, 기만자의 아들?”


  벨리스라의 모습은 환영에 불과했지만 아스타르는 그녀가 눈을 치켜뜨는 모습에서 자신에 대한 불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다른 오만방자한 에레다르 군주에 비해 사리 분별을 확실하게 할 줄 아는 자였다.


  “그때는 내게 붙은 첩자가 날 감시하고 있었네.”


  “... 나스레짐 녀석들 말인가?”


  “잘 알고 있군. 녀석들은 수차례 나를 감시하려고 첩자들을 심었지. 대부분은 내가 선사한 고통과 죽음의 희생자가 되었지만 하나는 남겨두었네. 물론 안심해도 괜찮네. 지금 녀석은 내가 그대와 연락을 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니까. 그대의 휘하에도 첩자들이 숨어있나?”


  “어리석은 놈들이 내 방어결계를 우습게 여기고 여러 번 침투를 시도했었지만 이미 망각의 길로 사라졌다.”

 

  벨리스라는 한껏 오만한 태도로 자신의 영역에 침투했던 첩자들이 어떤 말로를 겪게 되었는지 잠깐 설명했다. 아스타르는 그녀의 잔혹함과 철두철미함을 고평가했다. 파멸자를 대신할 자는 그녀 뿐이다.


  “그런데 참으로 궁금하군, 왜 다른 녀석들이 아닌 이 몸과 손을 잡길 원하지?”


  벨리스라는 여전히 불신을 품고 있었지만 처음보다 호의적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불타는 성전을 계속하는 것이지. 공허와 가치 없는 자들이 자리 잡을 세계가 없다는 만족감만이 나를 나답게 만들지.


  “그게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인가?”


  벨리스라는 김이 빠진다는 투로 말했지만 그 정도 대답이면 그녀도 이해할 것이다. 그녀 역시 지긋지긋한 내전 대신 버러지 같은 필멸자들을 불태우고 싶을 것이니까.


  “네놈이 날 기만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어쩌겠나?”


  “난 믿음까지 선물해줄 생각은 없네. 믿고 말고는 그대의 명석한 두뇌로 판단하게. 다만 내 물음이 그대에게 확실한 답은 되겠군. 파멸자가 기만자를 불신하는 모습을 상상이라도 해본 적이 있었나?”


  벨리스라는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아스타르를 그동안 우습게 여겼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스타르는 태생이 에레다르가 아니어도 가장 에레다르다운 자였다. 파멸자가 기만자를 불신하는 모습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 이 자는 기만자의 빈 자리를 채울만한 자다. 그녀 자신이 파멸자의 자리를 대신할 자라면 기만자를 대신할 자를 의심할 수 없다.


  “좋다. 함께 군단을 지배하고 성전을 지휘하지. 이미 생각해둔 계략이 있다면 서로 공유하는 게 어떤가?”


  “그건 내가 정말로 바라던 바일세.”


  벨리스라는 아스타르의 목소리에서 기만자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