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가 진짜 유명한 분야는 따로 있다. 김용하 PD는 젊은 시절, 호기로운 TV 출연을 통해 이름을 알렸으며, 현재는 덕업일치를 이룬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 덕업일치 - 덕질과 생업을 함께 추구하는, 인생이 덕질인 사람들을 존중해 일컫는 말.)
서브컬쳐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인생의 승리자로 여겨지는 인기인, 김용하 PD가 NDC의 강연에 섰다. 강연의 주제는 제목부터 범상치 않게 느껴지는 모에론.
모에(萌え)라는 단어의 본래 뜻은 '(식물이나 나무의) 싹이 트다'. 일본의 오타쿠 문화에서 비롯된 은어이기 때문에 한국어로 번역이 힘들고 사용하는 사람들 역시 정확한 설명이 어려운 묘한 단어. 다만 굳이 설명하자면 '특정 대상이나 요소에 대한 기호와 애정'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안경 모에라고 한다면, 안경을 쓴 캐릭터를 특별히 좋아하고 끌린다는 뜻과 비슷하다.)
독특한 주제 때문인지, 김용하 PD는 본격적인 강연에 앞서 "강연의 내용이나 예제가 양성 평등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여성분들께 미리 양해를 부탁드린다. '로리'라는 단어가 나온다면 '쇼타'로 자체 번역해서 들어주시기를 바란다."는 말로 시작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1. 왜 만들어진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는가?
김용하 PD는 본격적인 모에론에 앞서 왜 서브컬쳐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이런 모에 요소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지에 대해 먼저 설명했다.
그의 강연에 의하면, 진화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볼때 인간의 마음은 생존에 필요한 여러 회로로 구성된 컴퓨터와 같으며 각각의 회로들은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으로 반응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런 본능은 인간 외에 동물도 마찬가지이며 '초정상 자극(Supernormal Stimulus)'이라는 개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틴버겐의 거위' 실험에 의하면, 새에게 실제 알이 아니라 알의 특징을 극대화한 가짜 알을 가져다줄 경우 새는 진짜 알을 버리고 가짜 알을 품게 된다. 이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로, 진화를 통해 각인된 본능에 의해 선호되는 요소들이 있다는 것. 충분한 영양이 있음에도 더 달고 기름진 음식에 끌려 비만이 되는 이유도 초정상 자극에 끌리는 인간의 본능이다.
김용하 PD는 '인간은 왜 위험한 자극에 끌리는가?'라는 저서를 소개하며, 모에의 구성 요소 2가지를 설명했는데, 첫번째는 S 회로 (Sexy) - 짝짓기에 대한 자극이며, 두번째는 C 회로 (Cute) - 양육에 대한 자극이다.
여성의 가슴이나 도톰한 입술, 남성의 강한 턱과 어깨, 생활력 등은 S 회로에 해당하며 상대적으로 큰 머리에 큰 눈, 애교나 무능력 등은 C 회로에 해당하는 자극. 이는 진화적으로 형성된 본능이기 때문에 인간 뿐 아니라 사냥감의 새끼를 돌보는 표범 등 포유 동물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요소라고 한다.
다만 주의할 점도 있다. 모에는 일반적으로 섹시한 S 회로보다 귀여운 C 회로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되는데, 너무 귀여움만을 강조하다보면 부자연스러워지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문화나 트렌드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해도, 일반적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매력의 요소를 조사해볼 경우 S 회로가 7, C 회로가 3 정도로 분포된다. 즉 70%의 섹시함과 30%의 귀여움이 혼합된 얼굴을 가장 매력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서브컬쳐 계에서는 섹시함보다 귀여움의 비중이 좀 더 강해지기 때문에, 똑같이 본능에서 비롯된 감정이라도 일반인들이 선호하는 캐릭터와 차이를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김용하 PD는 모에 역시 본능의 산물이며 반응하는 부분의 비중이 다른, "일본 만화/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한 서브컬쳐 씬에서는 C 회로를 자극하는 캐릭터를 발전시켜왔으며, 이런 'C 회로 중심의 매력'이 곧 모에"라고 정의했다.
2. 캐릭터를 각 요소로 분석해보자.
본격적인 강연에서는 다양한 인기 캐릭터의 예시를 통해 어떤 모에 요소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분석이 이어졌다. 김용하 PD가 예시로 든 모에의 요소들은 "학교 수영복, 크고 둥근 눈동자, 소녀앉기(유사품 체육 앉기), 고양이귀, 꼬리, 스타킹, 레이스, 누님계, 롱 부츠, 가터벨트, 리본, 트윈테일 등" 이다.
다만 이렇게 모에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요소들을 무작정 배합한다고 해서 모에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김용하 PD는 "이런 요소들을 단순히 합쳐놓는다고 해서 모에로 연결되지는 않으며,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통합적인 맥락(Context)가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모에 요소 역시 패션과 비슷하게 유행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이 있으며 반복적으로 노출될 경우 매력이 떨어지게 되는 한계 효용에 주의해야 한다. 비슷한 자극이 반복될 경우 무뎌지기 때문에 어디서나 통하는 '최고의 레시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지나간 트렌드인 마법소녀나 천사소녀 등을 예로 들며, "캐릭터를 만드는 사람은 항상 신선한 모에 요소를 발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래서 더 어렵다"고 설명했다.
3. 모에 요소의 확장
앞서 언급했듯이 모에는 패션과 비슷하기 때문에 기존의 요소들과 차별화되는 강화 요소 역시 존재한다. 김용하 PD가 예로 든 캐릭터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 캐릭터, 에반게리온의 아야나미 레이.
그는 '갭(GAP) 모에'라는 말로 강화 요소를 설명했는데, 간단히 표현하자면 반전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즉 기존의 모에 요소가 비주얼(하드웨어)이라면 갭 모에는 상황(소프트웨어)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이는 비주얼로는 평범한 캐릭터에게 상황적인 모에의 요소를 부여해 반전의 매력을 주거나, 미성숙하고 보케(어리버리)한 캐릭터에게 헤드폰을 착용시켜 똑부러진 모습을 부여하는 등 상호의 특징과 매력을 극대화하는 방법이다.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던 모에선 역시 이런 반전의 일종으로,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나 소프트웨어 윈도우즈를 여성 캐릭터로 만드는 등 기존에 대중들에게 익숙한 캐릭터를 변화시키는 방법 역시 이와 비슷하다.
김용하 PD의 설명에 의하면 호감 역시 중요한 요소. 이는 앞서 설명한 S 회로와 C 회로에 이어 세번째 요소인 L 회로에 해당한다. 심리학 용어로 누군가에게 호감을 받을 경우 받은대로 갚아주고 싶은 의무감을 느끼는 '상호성의 법칙'이 있는데, 이렇게 캐릭터의 호감을 표현해주어 시청자나 플레이어들이 가상적인 호감을 형성하도록 만들어준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어로는 새침떼기로 번역되는 츤데레가 있다. 이는 갭 모에에 호감을 더한 방식으로 외형적으로는 츤츤하지만 나에게는 데레데레한 (나는 차가운 도시 여자, 하지만 내 남자에게는 따뜻하겠지), 겉으로는 퉁명스러워도 나에게는 호감을 표하는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앞서 소개된 에반게리온의 아야나미 레이 역시 이런 매력이 극대화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평소 아무런 감정 표현이 없던 레이가 '이럴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하자, '웃으면 돼'라는 신지(시청자의 대변자)의 말, 그리고 레이가 살짝 미소를 짓는 장면. 이는 서브컬쳐 매니아들에게 심장이 쿵! 하는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명장면이라는 것이다.
(다만 김용하 PD는 곧 자신이 아야나미 레이보다는 아스카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강연의 마무리에는 다양한 매력을 갖춘 캐릭터를 배치하는 방법에 대해 예시를 들기도 했다.
김용하 PD는 동생계 - 친구계 - 누님계로 섞을 경우 '골든 트라이앵글'로 불리며, 사람들의 취향이 아무리 다양해도 이중 하나는 걸릴테니 그만큼 캐릭터의 조합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누님계는 성숙한 타입이다보니 섹시하지만 귀여움을 넣을 여지가 적어 마이너한 편이고, 밸런스형인 친구계는 귀여움과 섹시가 공존하고 입체적이어서 자유도가 높으며, 동생계는 말썽쟁이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지만 보호 본능을 자극하고 갭 모에를 노리기 쉽다.
한편 강연에서는 그가 직접 제작에 참여했던 '큐라레:마법도서관'에 등장하는 사서를 예로 들어 캐릭터가 어떤 매력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판정하고 설명하기도 했다. 아래는 강연 현장에서 청중과 오고 간 질문과 답변의 내용이다.
Q. 방송 출연은 후회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주말에 잠깐 논다는 생각이었는데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될 짤방을 만들게 되었다. 그냥 평생의 멍에로 안고 가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Q.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고 하는데...
"의지의 문제 아닐까? 다만 개인적인 경험으로 볼때, 탈덕을 하신 분들도 이 바닥에 한번 발을 들여놓았으면 끝까지 간다. 주변을 보면 덕성인자도 유전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Q. 최근 유행하는 오토코노코 같은 작품의 경우 모에와는 좀 다른 것 같다.
"모에 요소를 발굴하다 못해서 뭔가 극단으로 이어진 것 같다. 성적인 요소가 반전된 것으로 남자가 좋아하는 모에의 요소를 다 갖추고 있는데, 그 캐릭터가 남자니까.
이걸 보는 사람들은 갈등을 겪게 되는데, 보통 순응을 하더라. (웃음) 논란의 여지는 있을 것 같고, 이런 추세가 메이저로 갈지 아니면 일시적인 트렌드가 될지는 모르겠다."
Q. 아청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일단 떠오르는 단어는 철컹철컹? (웃음) 두렵지 않다. (청중 박수 및 환호) 범죄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앞서 강연에서 설명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본능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이번 세션의 목적도 그것이다."
Q. 모에를 문화 현상의 하나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미래에도 모에가 살아남을까?
"당연하다. 이미 설명했지만 모에는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요소이기 때문에 귀여움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계속 있을 것이다. 유전적으로 코딩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이어질 것이다."
Q. BL(Boy`s Love)을 선호하는 것은 진화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당장은 정확하게 설명드리기 힘든데, 진화 심리학적으로 보면 동성애 역시 이점이 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본다. BL이 꼭 진화적으로 설명할 수 없거나 한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Q. 제작에 참여한 큐라레:마법도서관은 혹시 모에를 노리고 제작하신건지 궁금하다.
"당연히 노렸다. 왜 그런 게임을 만들었겠나? (웃음) 많이 즐겨주셨으면 좋겠다."
Q. 인간의 본성이라면 왜 유독 서양과 달리 일본이나 한국 등에서만 인기가 있을까?
"두가지 관점이 있다. 첫번째는 제가 검증을 할 수는 없는데 동양인들이 좀 더 모에를 선호하는 것 같다. 체형도 다르고, 일반적으로 서양인들이 좀 더 섹시함에 가까운 것 같다. 물론 밑도 끝도 없는 나만의 추측이니 신뢰하긴 힘들다.
두번째는, 서양인들이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본다. (웃음) 서양인들도 재패니메이션을 많이 좋아하고 수요도 분명히 있다. 다만 워낙 미디어에서 섹시한 자극이 많다보니... 아마 개화가 덜 된 것 같다. 자기 자리를 못 찾은 것 아닐까."
Q. 최근 화제가 되었던 힙합 가수 데프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일단 에반게리온의 작가님에게 사인을 받았다는 것이 부럽다. 앞으로 더 능덕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디어에 나와서 부정적인 분위기가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를 돕는다고 생각해서 긍정적으로 본다."
Q. 최애캐(최고로 애정을 가진 캐릭터)가 누구인가?
"전 옛날 사람이라... 아직도 린 민메이를 잊지 못하고 있다. 이외에는 아까 강연에서 소개해드린 캐릭터 중에 있다. 다만 첫사랑은 역시 민메이. 딸 이름도 린 민메이를 따서 지었으니..."
Q. 최근 아이들에게 인기있는 타요나 뽀로로 등의 캐릭터에도 모에 요소가 있을까?
"없다. 애들은 단지 귀여운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인데, 모에는 귀여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성인을 위한 섹시의 요소가 어느 정도 내포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타요나 뽀로로는 그냥 팬시 캐릭터이지 모에의 요소로 보긴 힘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