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에 있어서 스토리텔링, 즉 시나리오는 중요하다. 게임에 자연스럽게 흥미를 느끼고 부드럽게 진행을 이끄는 역할을 시나리오만큼 잘 수행할 수 있는 요소는 거의 없다고 할 만하다. 그래서 단순한 시나리오가 아닌 수준 높은 시나리오를 게임에 넣으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지만 쉽지가 않다.

게임에서 시나리오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위협은 바로 '스킵'이다. 아무리 정성껏 쓴 시나리오라 할지라도 유저들은 스킵 버튼을 누르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유저들이 글을 읽는 것을 불편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저들이 시나리오를 스킵하지 않고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해답을 전하기 위해 비주얼샤워의 정하경 작가가 KGC 강단에 섰다. 그는 '하얀 섬' 등 자신이 제작에 참여한 작품들과 더불어 기억에 남는 게임, 영화의 예시를 들어 시나리오에서의 몰입감을 구성하는 방법에 관해 설명했다. 그는 먼저 몰입감을 장기적인 관점과 단기적인 관점으로 나누었다.

▲ 시나리오의 최대의 적, '스킵'


■ 단기적인 몰입감 - 독특한 시작과 미지의 전개, 그리고 '자극'
"일단, 어떤 게임이든 간에 세계관을 시작할 때 보면 우리와 상관이 없는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많은 편이죠. 그리고 항상 세계는 위험에 처해있어요. 멋지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게임들은 많지만…뭔가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많죠. 대부분의 게임은 튜토리얼을 완료해서 정해진 카드를 받거나 캐릭터를 얻는 경우에도 엄청난 칭찬을 해주곤 합니다. 유저들을 좀 더 효과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더 독특한 시작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는 '푸른돌 조사단'에서 그동안 제작해온 어드벤처의 기법을 카드게임 장르에 녹여내는 방법을 선택한 것을 예시로 들었다. '푸른돌 조사단'에서는 주인공이 기절한 상태로 게임이 시작된다. 그리고 주요 캐릭터들은 주인공과 같이 잡혀있는 상태. 이후 깨어난 주인공이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튜토리얼을 진행하도록 구성했다.

그는 분위기가 다른 접근법을 시도했던 이유는 '본능적인 경제원칙'이라고 설명했다. 유저들이 튜토리얼과 텍스트를 스킵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함축성이 낮고 몰라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되는 튜토리얼, 시나리오는 귀신같이 스킵당한다. 유저들이 새로운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미지의 전개'가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게임에서 첫 동료는 미녀, 혹은 미남캐릭터가 나오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푸른돌 조사단'의 첫 동료는 미녀가 동료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냐고 물어본 후 할아버지가 나옵니다. 그리고 다른 선택지를 선택해도 비슷할 거라는 메시지로 유저들에게 실망을 줍니다. 예측에서 좀 벗어난 거죠.

유저들이 스토리를 읽는 이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재미와 흥미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전 좀 다르다고 생각해요. 텍스트를 읽는 것 자체가 정보의 수집과 추리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모든 이야기가 예상대로 돌아가면 절대로 스토리를 읽을 이유가 없어요.

일단 기본적으로 유저들은 텍스트에서 단서를 얻고 이후 상황을 예측합니다. 다 맞으면 안 되지만 또 전부 다르면 안 된다고 봅니다. 반은 맞고 반은 예상과 다른 이야기를 보여주는 형태가 가장 베스트라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전개가 미지의 영역이 되고, 유저들은 계속 시나리오를 읽습니다."

그는 게임에서의 전개는 굉장히 한정적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게임의 전개는 '누구와 이야기하세요.', '뭔가를 잡아오세요.', '어디를 조사하세요.'등등 선택과 행동의 연속이 되고, 반복적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복은 재미가 없다.

전개의 반복을 막기 위해서는 뭔가 갑작스러운 사건이 필요하다. 하지만 개연성이 없는 사건은 불협화음을 만들고, 유저들이 게임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갑작스러운 전개를 자연스럽게 둔갑시킬 무엇인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는 보편적인 방법을 사용하면 의외로 쉽다고 말했다. 바로 '캐릭터'를 활용하는 방법이다.


▲ 무성 : "하하하! 막내야, 또 속았구나!"

"'블레이드&소울'을 예로 들어보죠. 해보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지만…일단 게임을 하면서 누구도 '무성'의 배신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쟤는 원래 저런 캐릭터구나.', '아 쟤는 배신의 아이콘이구나.'하고 거부감없이 받아들이잖아요? 이건 하나의 보편성이 있는 인간의 원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살면서 누구나 배신을 당해보기 마련이잖아요. 보편성에 따른 캐릭터의 특징은 많은 사람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죠.

그래서 사천왕이 계속되는 겁니다(웃음). 캐릭터마다 개성을 부여하고 배신과 끔살, 동료화, 내부갈등, 알고 보니 착한 녀석. 이런 바리에이션들이 쉽게 작용할 수 있고 강력한 텐션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사천왕이 없고 마왕만 있으면 굉장히 단순해져요. 그래서 저희도 푸른돌 조사단에서 사천왕으로 이야기를 풀었습니다."

▲ 사천왕은 중요하다. 이렇게 죽으면 안된다-_-;

그가 단기적인 몰입감을 제공하는 요소로 꼽은 또 하나는 '지속적인 자극'이다. 정하경 작가는 이 부분은 인간의 뇌 구조와 연관이 있다고 설명했다. 인간이 자극을 느끼는 부분은 3가지. 위협, 식욕, 성욕 등을 느끼는 '파충류의 뇌'와 애정, 기쁨, 슬픔을 느끼는 '포유류의 뇌', 그리고 논리와 기억, 이상을 담당하는 '인간의 뇌'.

높은 단계의 자극일수록 그만큼 사전준비, 밑밥이 필요하다. 따라서 시작은 간단한 성욕, 위협, 식욕을 느낄 수 있는 '파충류의 뇌' 부분부터 자극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는 퇴행이론을 덧붙이며 상위 욕구의 충족이 좌절될수록 하위 욕구들이 점점 강해진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이를 잘 조절하지 못하면 단순히 캐릭터의 노출만을 추구하게 되는 등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당부했다.

"그리고 하나 더. 저희는 '3클릭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3번의 터치 내에 뭔가 변화가 있어야 유저들이 스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캐릭터의 표정변화라던가, 흔들림, 이미지의 확대와 축소, 강조선, 텍스트 효과라던가 무엇이던가 액션이 있어야 유저들이 좀 더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장기적인 몰입감 - 자아실현의 단계…그리고 시나리오 라이터의 역할
이어서 정하경 작가는 유저들이 장기적으로 게임에 몰입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설명했다. 그는 장기적인 몰입감의 첫 번째 요소로 바로 '캐릭터의 트라우마'를 꼽았다. 그리고 그 예시로 '헤비레인'과 '파이널 판타지 7'을 들었다.

"파이널 판타지 7에서 클라우드가 세피로스를 죽여야 하죠. 세피로스가 에어리스를 죽였으니까요. 이는 클라우드의 트라우마로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아있고, 공감하고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죠.

가까운 작품을 들어보면 '헤비레인'입니다. 아버지가 실종된 아들을 찾는 과정이 엄청나게 고됩니다. 하지만 그 아들을 찾는 이유가 뭘까요. '아버지'라는 이유를 제쳐놓고, 그는 첫 번째 아이를 차 사고로 잃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아이가 실종되는 걸 절대 그냥 넘길 수 없죠. 이는 일종의 트라우마입니다."

▲ 클라우드가 세피로스를 죽이는덴 반대하지 않는데...
왜 내 기억에는 '티파'만 있는가...(...)

그는 우리의 기억 속에 남는 게임과 영화의 캐릭터들은 하나씩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라스트 오브 어스'는 딸의 죽음, '갓 오브 워'는 가족살해, '스파이더맨'의 경우는 삼촌의 죽음 등등…이런 트라우마에 대한 강렬한 공감은 바로 '거울 뉴런'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학자 외젠 이오네스코는 '꿈과 고통이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고 말했다. 그리고 거울 뉴런의 연구결과 사람들은 즐거움과 기쁨보다 고통이 훨씬 더 빠르고 강렬한 공감을 일으킨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는 캐릭터의 트라우마는 아주 강렬한 몰입감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헤비레인'을 보며 참 감탄했던 부분이 자극을 잘 조절했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처음에는 레이싱이라는 간단한 미션을 요구하죠. 역주행이긴하지만…이어서 유리조각이 잔뜩 널브러진 통로를 기어가야 합니다. 여기서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더라고요. 패드의 진동부터 붉은 화면의 연출, 캐릭터의 대사까지도요.

처음에는 고통으로 파충류의 뇌를 자극하고, 이어서 점점 그 강도가 올라갑니다. 스스로 손을 자르거나 다른 사람을 죽여야 아들을 찾을 단서를 준다고 하죠. 내적 갈등과 감정까지 들어간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캐릭터는 자기도 딸이 있다고, 사진까지 보여주면서 플레이어를 더욱 괴롭게 합니다.

마지막 시험은 종이접기입니다. 병에 든 독을 마시면 60분 후에 죽는데, 독을 마시고 힌트를 얻어 60분내로 아들을 찾을 것인지, 아니면 아들을 포기하고 그대로 살아갈 것인지 선택을 하게 합니다. 자아실현의 단계까지 자극을 구성해 큰 공감을 이끌어냈죠."

▲ 아들을 찾으려면 이자를 죽여야한다. 하지만 그도 딸이 있다. 그것도 둘.


이어서 그는 강력한 IP가 궁극적으로 위력을 발휘하는 과정의 필수가 '자아실현'의 단계라고 설명했다. 캐릭터가 자아실현의 단계에 빠져들면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들의 '인간의 뇌'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파충류의 뇌를 자극하면 바로바로 리액션이 나오지만, 유저들은 여기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 궁극적으로는 자아실현의 단계까지 이끄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마지막으로 2003년 제작된 '원더풀 데이즈'와 '창세기전 3'를 비교하고, 시나리오 작가의 역할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제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는 누구나 현실적인 제약을 받게 된다. 이는 피해갈 수 없으며, 생략이 없는 스토리텔링은 없다. 생략된 부분을 채울 수 있느냐, 없느냐는 바로 몰입과 공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창세기전 3'에서 주인공 '살라딘'은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하지만 유저들은 그것에 거부감이 없다. 그는 창세기전이 기존의 틀을 부숨으로써 이런 효과를 얻었다고 평가했다.


"이전의 RPG에서 공들여 키운 동료가 죽는다는 건 일종의 금기였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전은 '시반슈미터' 시나리오에서 키운 동료, 함께한 친구들이 죽어버립니다. 비극은 끝나지 않고 연인까지 이어지죠. 과감하게 기존의 틀, 클리셰를 깨뜨림으로써 유저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원더풀 데이즈도 기존의 클리셰를 과감히 깨뜨리면서 전개가 됐다면 좀 더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아쉬운 작품입니다. 전반적인 긴 시점, 즉 강력한 IP를 생성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자아실현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강력한 IP의 생성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나리오는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는 PD, 기획자들도 다 이해하고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역할은 시나리오 작가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 비주얼샤워의 정하경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