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주의


충격적인 비주얼. 가장 아름다운 폭력.


이렇게 크라이텍의 새로운 FPS 게임 크라이시스(Crysis)가 출시되자 해외 웹진들은 더 이상의 표현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극찬과, 만점을 주면 빠소리를 들을까봐 낮춘 것으로까지 보이는 최고의 점수를 제출해 마지 않았다.


특히 게임화면이 얼마나 실사와 같았는지는 실제 풍경을 촬영한 사진과 게임 속 화면을 나란히 비교해놓은 이미지들이 네트를 타고 전해지면서 공전절후의 그래픽을 인정받았다. 어느 쪽이 실사고 어느 쪽이 게임 화면인지 눈을 비벼야 했던 게이머들은 과연 내 컴퓨터에서도 돌아갈지, 돌아간다면 얼마만큼의 그래픽을 보여줄지 알고 싶어 안달이 났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큰 그림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최고급 그래픽으로 게임할 수 있는 사람은 1% 정도? ]



이런 상황이니 역대 최고로 불리는 게임들이 비엔나 소시지처럼 줄줄이 이어진 2007년임에도 크라이시스의 올해의 게임 수상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못받아도 올 해의 그래픽상은 받지 않을까. 아무데도 그래픽 분야에 주는 곳이 없다면 사재를 털어서라도 상장을 주려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그 정도로 진짜 같나? 그 정도로 진짜 같다.


게임의 배경이 되는 열대지방의 섬은 나무 잎사귀 하나하나를 딸 수 있을 것만 같고 적진을 향해 포복을 할 때는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풀잎들이 눈 옆을 스쳐지나간다. 스크린샷을 찍어보면 사진이 된다는 관상용 리얼리티가 아니다.



[ 풍경 묘사는 감탄의 연속 ]



[ 포복 상태에서 뺨을 스쳐지나가는 풀잎. 풀냄새가 느껴지는 착각에 빠질 정도 ]



기관총 세례를 받은 나무는 딱 그 부분이 부러지며 쓰러지고 해안에서 짝을 찾아 기어다니는 게 한마리도 주먹질에 납작하게 변하니 할 말 다했다. 왠만한 대부분의 물체를 들어서 던질 수 있다거나, 총을 맞은 위치나 각도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부서지는 오브젝트들은 이쯤되면 당연. ‘크라이실사’라는 애칭이 붙은 건 다 이유가 있다.


몬스터라고 불러서 미안한 우리의 동포 북한군들의 AI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심지어 잠시 짬을 내서 후미진 곳에 가서 볼일을 보는 센스를 갖추기까지 한 NPC 들은 군인의 본분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었던지 조그만 발자국 소리에도 경계태세에 들어간다. 심드렁한 목소리로 ‘화랑, 담배’를 주고받았던 보초병 시절을 생각하면 역시 이래서 북한군이 쎄다는 건가 싶을 정도.



[ 영상과 게임의 매끄러운 이음새는 는 절정의 그래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부대를 지키고 있던 병사 1인의 눈에 띄기라도 하는 날에는 난리가 난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적들은 주인공이 있을 법한 위치를 포위하기 시작한다. 거리를 두고 서로 총을 쏘아대는 교전이 벌어지면 멀리 떨어진 바위 뒤에서 이마만 살짝 내놓고 총을 쏘는데 보이지 않는 사람의 손이 NPC 를 조종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은폐, 엄폐 능력이 뛰어나다.


벙커에서 기관단총을 쏘고 있는 적을 간신히 죽이고 숨을 고르고 있으면 어김없이 주변에 있던 다른 북한군이 기관단총에 걸터앉아 동료의 자리를 대신하는데 저 놈들은 임무카드를 정말 잘 숙지하고 있구나 싶기까지 한다.



[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썼다. 자판기를 사용해 음료수가 나오는 장면 ]



극도의 사실성만이 크라이시스가 가진 장점은 아니다.


주인공이 소속된 델타포스 요원들이 착용한 나노수트는 나노물질을 이용해 은신, 방탄, 급속이동, 근육강화의 특수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첨단전투복. 총을 좋아한다면 총으로 해결할 수도 있지만 나노수트를 이용하면 조금 더 다양하고 뽀대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오프닝 영상에서부터 보여주는데.





적이 다가올 때까지 은신해 있다가 갑자기 총을 쏜 후 급속도로 접근해 목을 움켜잡고 던져버린다. 건물 건너편에 있는 적에게 근육강화를 하고 건물 지붕으로 올라가 기습을 한다. 멀리서 달려오는 자동차의 타이어를 맞추고 전복되는 자동차를 손으로 잡아 던진다.


나노수트의 모드 전환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은신해서 헤드샷으로 한 방에 적을 보내버린 뒤 재빨리 다시 숨거나, 은신, 급속이동, 근육강화 모드를 빠르게 바꿔가며 접근해 조용히 적의 목을 꺾어버릴 수도 있다.



[ 포복해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 ]



[ 재빨리 다가가 초크슬램! ]



미국 델타포스 대원인 주인공의 닉네임은 노매드(NOMAD). 노매드는 유목민이라는 뜻인데, 최근에는 노트북, 휴대폰, PDA 등 첨단 무선장비를 이용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을 노매드족이라 부르기도 한다. 인공위성과 연결되어 있는 ‘나노수트 (Nano Suit)’ 특수강화복이 게임에 삽입됨으로써 단순하게는 총을 쏴서 적을 죽인다고 요약될 게임의 내용이 좀 더 풍부한 자유도를 가지게 되었다.


크라이시스의 크라이맥스는 그런데 여기까지.


이렇게 게임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의 플레이 시간동안은 그래픽? 죽이네. 사실성? 죽이네. 나노수트? 죽이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눈에 익숙해지고 손에 익고 나면 언제까지 감탄만 이어지지는 않는다.


극도의 사실성과 멋진 나노수트를 손에 넣은 게이머가 앞으로 벌어질 흥미진진한 사건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 게다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북한군과의 전투는 어떻게 끝맺을 것인가 하는 부분도 한국인 게이머로서 관심이 가는 부분이다.



[ 한글을 보니 반갑다 ]



그런데 북한군은 생뚱맞게 갑작스러운 폭발에 몰살해버린다. 섬의 중앙에서 몇 만년 전에 지구에 내려왔던 외계인들이 깨어났기 때문이란다. 우주전쟁에 나온 낙지, 매트릭스에 나왔던 센티넬 같은 외계인들로 갑작스럽게 주적이 바뀌지만 천재적인 박사님이 마침 외계인을 물리칠 수 있는 적절한 무기를 건네준다. ‘지금이에요. 쏘세요.’


몇 만년 동안 얼음 속에서 잠을 자다 깨어난 것이 아기공룡 둘리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실사 영화를 보는 것 같다’는 감탄을 적었던 노트 밑에 괄호치고 ‘너무도 전형적인 캐릭터, 극적 긴장감이 없는 시나리오를 가진 영화’라는 글귀를 덧붙이고 싶어진다.



[ 고지식하지만 우국충정을 보여주는 인물 ]



[ 입이 거칠지만 든든한 동료 ]



[ 외계인이 있는 줄은 어떻게 알고 무기를 만들었지! ]



‘노매드! 시간이 없어! 빨리와!’라는 분대장의 다급한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뽀글이를 끓여먹고 닝기적 닝기적 이동해도 될 만큼 플레이의 제한이 없다는 것도 극도의 사실감에 끓어오르는 탄성을 내뱉은 과거에 대한 배신으로 느껴졌다. 항공모함을 격침시키려는 외계인 보스는 자신을 죽여주기 전까지는 싸우는 척만 하고 있고 게이머는 어떻게 하든 간에 게임사가 마련해 놓은 엔딩을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게임계의 트랜스포머랄까.


사양이 모자라 중 옵션으로 돌렸음에도 최고의 그래픽이라는 찬사(엘더스크롤4은 잠시 잊자)가 전혀 아깝지 않을 리얼리티를 만끽하게 해주는 크라이시스. 그러나 ‘최고의 그래픽’이라는 수사를 달고 나왔던 이전의 엔터테인먼트 컨텐츠들이 그래픽에 너무 신경쓰던 나머지 외나무 다리에서 균형을 잃듯 기우뚱했던 전례를 답습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 파이널판타지가 그랬다. 컴퓨터 그래픽만으로 실사와 같은 영상을 만들어 내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과 피부의 여드름까지 볼 수 있다던 당대 ‘최고의 그래픽’에도 불구하고 재미없는 내용은 덮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컴퓨터그래픽 기술력을 업그레이드 시키면서 순수 ‘국내 기술 최고’라는 면에서는 인정을 받았던 디워도 스토리를 위시로 한 작품성 면에서는 논란을 면치 못했다.


그러고보니 마침 크라이시스와 비슷한 영화가 하나 생각난다. 몇 만년 전 지구에 온 나쁜 외계인들이 나오고, 산 밑에서 잠자고 있는 외계인을 발견한 인간들이 연구를 시작하고, 어쩌다가 깨어난 외계인들이 인간을 공격한다는 스토리. 거대 로봇이 변신하는 장면을 실사와 같은 그래픽으로 표현해 받은 ‘당대 최고 그래픽’의 칭호도 비슷하다. 재미있게 구경했지만 집으로 돌아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현란한 그래픽에 잠시 정신이 팔렸던 게 아닐까 싶은 기분이 드는 것마저도...



[ 외계인의 본거지로 들어가면서 ]



[ 무중력 상태의 공간. ]



크라이시스를 얼마의 해상도에서 어떤 화면으로 플레이했는가로 컴퓨터 성능을 말할 수 있다는 점을 포함해, 게임의 역사에서 크라이시스는 그래픽이 어디까지 실사에 가깝게 구현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내어놓았다는 점에서 분명 이름이 새겨진 가죽을 남길 것이다. 그래서 해보란 말인가 하지 말란 말인가? 그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반문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집에 있는 텔레비전으로 트랜스포머를 봐도 재밌다면!"


Inven Niimo - 이동원 기자
(Niimo@inv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