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빛이 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겠는가

                                                                                   - 니 체 -

2015년 한 해는 이지훈에게 가장 빛나는 시기였습니다. 소속팀인 SKT T1은 이지훈과 함께 스프링, 섬머 두 시즌을 제패했고 모든 LoL 프로게이머들의 꿈의 무대인 롤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프로게이머 이지훈은 섬머 시즌 결승전을 통해 '황제'로 등극했으며 '페이커' 이상혁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정상급 미드라이너로 거듭났습니다.

이지훈과의 인터뷰 후, '어쩌면 올 한 해가 이지훈에게 있어서는 가장 어두운 시기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지훈이 말해준 그의 고민은 그가 누린 영광만큼 어두웠고 쉽사리 어떤 말을 하기보단 스스로 계속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선수의 인터뷰를 철학가의 명언으로 시작하는 것은 꽤 낯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를 사용한 것은 이지훈의 인터뷰가 우리가 보지 못했던 어떠한 면을 떠올려줬기 때문입니다. 이지훈이 들려준 빛에 가려진 어둠이야기. 함께 듣고 그의 고민을 나눠보는 건 어떨까요?


"올해 초, 형제팀 체제가 한 팀으로 개편되면서 꽤나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어요. 많은 프로 선수들이 좁아진 1군 엔트리에 고민이 많던 순간이었죠. 당시 열렸던 공청회에서 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어요. '실력을 갖추었지만 주전 자리를 보장받지 못한 선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대답은. '어느 정도의 희생이 필요하다'였어요."

첫 눈이 내린 후 며칠 뒤 어둑해질 무렵, 잠실에 위치한 한 커피숍에서 이적을 결심한 계기를 묻는 질문에 이지훈은 꽤 오래전 이야기부터 꺼냈습니다. 새로운 도전이라던지 명예, 금전과 같은 조금은 비슷한 이야기를 예상했지만 이적에 대한 이지훈의 고민은 그가 생각한 시간만큼 깊었습니다.

"SKT T1에 남아있었던 건 최병훈 감독님과 김정균 코치님 덕분이었어요. 두 분은 나를 선수 개인으로서 격려해주시고 지지해주시고 '내가 팀에 있으면 좋겠다. 내가 팀에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항상 말씀해주셨거든요. 덕분에 저는 저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가 오가더라도 팀에 남아있겠다고 마음먹었죠."

이지훈은 팀원과 코칭 스태프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스프링시즌, (이)상혁이와 제가 주전자리를 두고 경쟁했고 엔트리 선발의 기준은 해당 경기를 승리로 이끌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어요. 제가 기회를 잡기도 했고 상혁이가 기회를 잡을 때도 있었죠. 주변에서는 우리 팀의 주전 경쟁에 대해 여러 가지 소리를 냈지만 감독님, 코치님, 팀원 모두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마음의 동요는 없었어요."

"제가 비교적 출전을 하지 못했던 섬머시즌에도 별다른 불만을 갖지 않았어요. 상혁이가 상대적으로 실력이 올라오면서 제가 출전기회를 잡지 못했지만, 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코치진의 판단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담담하게 말하는 이지훈의 목소리에는 평소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침착함이 어려 있었고 이내 조금씩 그의 말이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적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팀원이나 코칭 스태프 때문이 아니에요. 그 결심은... 롤드컵 4강전 경기를 치르고 나서 들었어요. 큰 무대에서 제가 기회를 잡고 경기를 뛰었고 1,2 경기가 모두 만족스러웠어요. 그래서 3경기도 출전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제가 강판을 당했죠. 제가 무대를 내려가고 상혁이가 등장하니 모두들 '페이커'를 연호하더군요.

경기장을 내려오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과연 이 팀에서 어떤 의미를 갖을까', '결국,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페이커'가 아닐까'..."


당시의 심경을 전하는 이지훈은 평온했고 차분하게 이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어나갔습니다. "마이클 샌댈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좋아해요. 그 책에서 공리주의에 대해 이야기하죠.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소수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물론, 그 책에서도 소수의 희생이 정의라고 말하진 않아요. 하지만 모두가 행복할 수 없다면 최대 다수가 행복하기 위한 차선책은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이 일을 겪으면서 EDG의 (허)원석이가 생각났어요. 14년도에 그 친구가 삼성 갤럭시 소속으로 롤드컵에서 우승을 기록했고 무대에 올랐죠. 전용준 캐스터가 허원석을 위해 '세계 최고의 미드라이너는 누굽니까?'라고 물었는데 대중들은 '페이커'라고 외쳤어요. 2014년을 기준으로 세계 최고 미드라이너에 가장 가까운 퍼포먼스를 보여줬음에도 대중들은 세계 최고 미드라이너의 영광을 '폰'에게 돌려주지 않았죠."

"저는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를 응원하는 것이고 객관적인 기준으로 '페이커' 이상혁이 최고가 아니라 해도 '페이커'를 응원할 수 있고 그래서 올해 상혁이가 다시 최고의 자리에 올랐을 때 더 많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잖아요. 저나 원석이가 그런 것에 대한 피해자라고 말할 수는 있어요. 그래도 이상혁을 응원하면서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할 수 있으니 그게 맞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느낀 감정은 원석이에 비하면 훨씬 작기도 하고.."



이지훈의 이야기를 들으며 두 가지 걱정이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두 번째는 이지훈의 인터뷰에 언급된 다른 선수들이 다시 이 것 때문에 상처를 받지 않을지 걱정이 들었습니다. 이지훈은 이내 눈치를 챈 듯 이들에 대해서도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상혁이나 원석이 모두에게 어떤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리고 원석이가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 이상혁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상혁이의 그런 특별한 퍼포먼스를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저는 상혁이와 가장 가까이 지내면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다시 한 번 느꼈고 앞으로도 많은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앞으로 롤판의 발전을 위해서도.

리그오브레전드가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던 건 상혁이가 보여준 괴물적인 퍼포먼스와 이를 사랑하는 대중들 덕분이에요. 그 친구는 어깨가 무겁고 그만큼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어요. 앞으로도 잘해줬으면 좋겠고 큰일을 해낼만한 존재라고 생각해요."


'페이커' 이상혁을 이야기하는 이지훈의 입가에는 미소가 묻어있었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이내 웃으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제가 조금만 어렸다면 다른 국내 팀에 가서 이상혁과 대결하고 싶었을 것 같아요. 선수로서 욕심 때문에. 상혁이와 다시 붙어본다면 제게 의미 있는 도전이겠죠.

그렇지만 제 나이가 많은 편이고 앞으로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제는 다른 것을 생각해야되지 않을까요? 저도 어느새 프로게이머 4~5년차에 접어들었고 대중들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관심 혹은 냉대가 이제는 힘들어요. 그런 대중들의 관심에 멀어져서 프로 생활을 조용히 하고 싶네요."



이적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묻는 단 한가지 질문에 그는 많은 것을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과연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들이 잘 전달됐는지 웃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전한 듯 이지훈은 감사의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언급한 사람은 다시 코칭 스태프와 팀원들이었습니다.

"감독님, 코치님, 매니저님, 팀원들에게 정말 고마웠어요. 제가 팀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그 분들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저를 좋아해주는 팬분들께도 감사하단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 많고 매력적인 선수들 중에 저를 좋아해주시니 제가 보답할 것은 앞으로도 좋은 모습 보여드리는 것 밖엔 없네요. 그렇다고 지금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말은 못할 것 같아요. 항상 최선을 다해왔거든요(웃음)."

인터뷰를 끝낸 이지훈의 얼굴엔 많은 감정이 어려 있었습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전한 홀가분함과 그가 가진 어두움을 고백한 부끄러움. 인터뷰를 마치고 잠시 동안 함께 걸으며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커피숍 밖은 달이 떠오른 완연한 밤이었습니다. 하늘을 보며 이지훈은 달과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뜻 보면 항상 차갑고 변함없는 듯 보이지만, 달이 차고 기울듯 계속 변화하고 많은 생각을 지닌 사람이라는 생각이.

제가 보는 달을 이지훈이 함께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을 회상하며 이야기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올 한해 치른 경기는 모두 가시밭길이었어요. CJ 엔투스 전, 롤챔스 결승전, 롤드컵... 그 중요했던 경기에서 단 한 판이라도 못했다면 '페이커'와 비교될 제 모습이 어땠을지... 이제는 그 짐을 덜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