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왔다. '생존'이라는 목적 하나로 전장에 뛰어든 지도 어언 2주. 처음 네 명에 불과했던 인벤 생존전문가팀은 어느새 8명으로 불어났고, 각각의 인원들이 각자, 혹은 둘이 호흡을 맞춰가며 전장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익혔다. 이른바 '생존전문가 김병철'팀 인벤에 가끔 방문해주시는 모 웹툰작가님의 영향을 받아 이름 지어진 이 팀에서, 우리는 그간 실력을 갈고닦아왔다.
어느덧 인벤 내에서도 전설 같은 이름이 된 우리 생존전문가 김병철팀. 이젠 베테랑 전사가 된 네 명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게임을 켰다. 순식간에 모인 네 명의 용사들. 각각 개인전에서 1등 한 번쯤은 해본 생존전문가 4인이 뭉쳤다. 목표는 1위. 그 밑은 수치로 여기기로 했다. 떠나자 전장으로.(사실 전설 뭐 그런건 아니다. 그냥 우리끼리라도 자랑하고 싶었다...)
■ 세상에 이런 운이...! 이번 판, 뭔가 될 것 같다.
어느새 시작된 게임. 비행기 이륙까지 59초가 남은 상황에, 우리의 제물이 되어줄 참가자들이 하나둘 섬으로 모였다. 물론 우리가 제물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낙관적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우린 네 명 다 아비규환의 전장을 헤쳐온 사람들 아닌가.
이 시간에는 딱히 할 게 없다. 수송기가 어떤 방향으로 날아갈지 모르니 미리 생각할 필요도 없다. 먼저 시험용 무기를 든 이들은 뒤늦게 합류하는 사람들의 몸에 구멍을 내며 놀고 있었고, 제 몸에 불을 붙이는 사람이나 기어서 활주로를 횡단하는 사람 등 온갖 이상한 짓을 볼 수 있었다. 참된 생존자라면 이 틈을 타 WWE 슈퍼스타 로만 레인즈의 슈퍼맨 펀치를 연습하자. 총 든 상대를 일격에 제압할 수 있는 기술이다.
1분의 시간이 짧게 끝나고, 수송기에 몸을 실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작전이 시작된다. 보통 이 시점에서 '도시'로 날아갈 것인지, 혹은 교외로 날아갈 것인지를 정하게 된다. 도시는 건물이 많고, 아이템도 많지만 그만큼 많은 이들이 노린다. 그 도시가 비행경로에 있기라도 하면 원피스를 찾는 해적 떼처럼 무더기로 쏟아지는 생존자들을 볼 수 있을 정도다.
난 비교적 인적이 뜸할 조금은 멀찍이 떨어진 교외를 생각했지만, 팀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바로 떨어지자. 밑에 건물 많네"
"딴 사람들도 엄청 떨어질텐데?"
"이기면 돼"
그래 내가 잠깐 깜빡했다. 이런 사람들이었지. 결정을 내리자 행동은 빨랐다. 목적지는 배틀그라운드에서도 서북쪽에 있는 대도시 'Georgopol'. 엄청나게 많은 건물이 밀집된 곳이기 때문에 그만큼 아이템도 많지만, 섬 외곽인 만큼 첫 안전구역 밖으로 지정될 확률이 높아 빠른 파밍 및 탈출이 요구되는 곳이다.
예상대로 수많은 이들이 우리의 뒤를 따라 뛰어내렸다. 일단 저곳에서 기본적인 아이템 파밍을 마치고, 도시 밖으로 탈출하는 순간까지 네 명이 다 살아 있으면 되는 거다. 마우스를 최대한 밑으로 내려 수직 낙하를 시도했다. 아파트 8동이 예쁘게 모여 있는 곳이 목적지. 무사히 착륙한 팀원들은 각자 아파트를 한 동씩 맡아 아이템 파밍에 들어갔다.
아쉽게도 내가 처음 들어간 아파트는 말 그대로 꽝이다. 그나마 2레벨 경찰 조끼를 얻은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 돌격소총 한 자루 정도는 구해야 싸울만한데, 무장이라고 있는 건 m1911 한 자루 뿐이다. 그래 이거라도 어디냐. 그렇게 신나게 아이템을 찾는 북쪽에서 총소리가 울린다. 생각해보니 북쪽으로 착륙한 생존자들도 꽤 수가 많았다. 그들이 서로 싸움을 시작했다 보다. 그때였다.
"어.. 어어? 야 나 싸운다! 교전 시작! 교전 시작! 헬프!"
"너무 멀어! 그냥 이겨!"
"알았어. 이길게!"
전 판에 아군을 쏜 루빅 팀장이 소심하게 숨어 있다가 적을 아군으로 오인했지만, 적은 오해하지 않았다. 먼저 맞고 시작한 싸움이었기에 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이미 마음속으로는 '세명으로도 우승한 적 있지 음'하며 다음 플랜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무색하게 진짜 이겨버렸다.
우리 팀이 직접 연루된 교전은 거기까지였다. 1인당 3~4동의 아파트를 모두 털 때까지 우린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아이템을 확보했다. 이상할 정도였다. 그저 아파트만 털고 다녔을 뿐인데, 주변에서는 총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생존자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부족한 아이템으로 초반 교전을 하게 될 줄 알았건만, 우리를 제외한 인근 모든 생존자가 알아서 저들끼리 수를 줄여줬다. 이것 참 땡큐한 일이다.
파밍을 마치는 시점에서 생존자의 수는 반으로 줄어든 45명. 우리 팀 네 명은 모두 돌격소총 한 자루와 보조 무기를 챙겼고, 무기 부품까지 알뜰살뜰하게 챙긴 상황이었다. 탄약도 종류별로 100발 이상씩 확보했으니, 사실 이 정도 파밍이면 게임 끝날 때까지 더는 아이템을 노리지 않아도 될 정도다.
운이 엄청 좋은 사례다. 지금까지 수십 판 전장을 전전하면서 이렇게까지 수월하게 파밍을 마친 판이 몇 판 없다. 느낌이 딱 온다. 이거 못해도 5위권은 바라볼 수 있겠다. 안전 구역도 운이 좋게 우리 도시를 감싸고 생성되었지만, 두 번째 안전 구역이 지정되면서 도시를 탈출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이제는 차량을 찾을 시간이다.
■ 오케이! 차 타고 고고! 범의 아가리를 열어라
파밍을 마쳤으니, 이제 본격적인 생존 단계로 들어갈 때다. 적당히 숨거나 좋은 위치를 잡아서 사람들이 더 줄어들 때까지 기다리는 거다. 보통 이 시점에서 선택은 세 가지 정도로 갈리는데, 적당한 위치를 찾아서 자연과 한몸이 되거나 요새로 쓸만한 건물을 점령하는 게 보통 선택하는 두 가지다. 나머지 하나는 숙련자들이 가끔 사용하는 방법인데, 자동차의 기동성을 살려 라인 외곽을 타고 도는 것이다.
일단 우리의 선택은 3번이었다. 쓸만한 4인승 차를 구했고, 빠르게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는 순간엔 차가 거의 필수라 할 수 있다. 수영으로 강을 건너면 오백만 년이 걸리고, 걸어서 다리를 건너면 그저 좋은 먹잇감이다. 차를 타고 빠르게 통과하는 게 제일이다.
안전지대로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였으니까. 우리의 목적지는 안전구역 중앙부의 수풀. 예전에도 고라니 작전으로 꽤 재미를 본 곳이다. 사람을 딱 가려주는 크기의 수풀이 많기 때문에(여기서 수풀은 식생을 최하로 내려도 보이는 덤불을 말한다.) 적당한 자리만 잡아서 기다리다가 가까이 오는 순간 고라니처럼 뛰어나와 털어버리면 된다.
하지만 상황이 꼬였다. 운전을 맡은 코멧이 주변에서 들리는 총소리를 듣고는 마치 불빛에 이끌리는 나방처럼 핸들을 꺾었다. 현장에선 한 그룹이 차를 타고 달리는 다른 그룹을 향해 사격을 가하는 중이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교전의 한복판을 마치 원래 그리하기로 했던 것처럼 가로질렀다는 것이고, 총을 쏘던 그룹이 엉겁결에 우리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코멧은 연달아 "이 정도로 안 죽어요~~ 안죽어~"를 외치며 우리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이미 두세 발 맞고 저승 너머를 흐릿하게 보고 있는 루빅 팀장과 이를 보고 있는 나머지 팀원들이 안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어떻게든 이 현장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총알을 쏟아부으며 더 달리라 외쳤다.
하지만 차는 200미터 가량을 더 간 후 멈춰버렸다. 아직도 뒤에서는 총알이 날아오고 있는 상황. 더 가야 하는데 왜 멈췄느냐고 물어보자 이렇게 대답한다.
"앞에 집 있는데, 털까요?"
그냥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뒤에서 총알이 날아오는데 앞에 있는 집을 털자고 한다. 이 친구는 어떻게 지금까지 기자 일을 해온 걸까. 급기야는 운전하다 말고 먼저 차에서 내려버렸다. 총알이고 자시고 이렇게 있다가는 그냥 앉은 채로 죽게 생겼기에 다른 인원들도 급하게 차에서 내려 엎드렸다. 다 죽어가는 루빅 팀장에게 의료 키트를 써주고 정면을 경계하다 뒤를 보니 혼자 집으로 뛰고 있는 코멧이 보인다. 가다가 그냥 헤드샷 맞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재미라도 있을 테니까.
팀 단위 게임에서 돌발 행동을 두고 볼 수는 없었기에, 결국 우리도 다 뛰기 시작했다. 산 중턱에 덩그러니 세워진 집 한 채. 저곳이 비어 있다면 2번 작전을 쓰기 딱 좋은 곳이다. 2번 작전이 뭐냐고? 건물 하나를 잡고 요새화해 오는 적만 잡아내는 전술. 이른바 '범의 아가리 작전'이다.
"야 여기 창문 다 깨져있다. 한따까리 한 거 같은데 벌써?"
"들어갑시다. 어차피 밖에 있어 봐야 죽으니까 뭐 있으면 진압해"
"브리칭! 브리칭!"(실제 대사입니다.)
그러나 집은 비어 있었고, 진압할 만한 건덕지도 없었다. 잠시 머쓱한 웃음을 지은 우리는 모든 문을 닫고 창문을 하나씩 잡은 채 아가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범의 아가리 작전의 개요는 이렇다. 일단 집 밖으로 통하는 문을 모두 닫은 채 창문 너머로 적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만약 적이 이리로 들어올 기미를 보이면 창문에 노출되지 않는 각도로 몸을 숨긴 채 정문을 조준하면 된다. 그러면 적이 문을 여는 순간 벌집 피자가 완성되는 거다.
■ 안돼 안전구역 신이시여! 그리고 최후가 찾아왔다
느낌이 좋았다. 안전구역 정 가운데 위치한 집인데다, 이미 우리는 무장을 할 만큼 한 상태다. 사주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으니 뒤통수가 뚫릴 일도 없다. 이대로 들어오는 적들만 잡아먹으며 버티면 우승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뒤에서 총소리가 들렸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생존자는 줄어들었고, 어느새 전장에는 24명의 생존자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4분이 더 흘렀다. 우리 예상과는 다르게 안전 구역이 꽤 치우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동이 불가피한 상황. 경계가 멀지는 않았기에 전자기파가 다가옴에 맞춰 뛰기로 했다. 그때, 북쪽에서 엔진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타고 다니던 4인승 승용차에 네 명이 탄 채 집 주변을 돌고 있었다. 딱 보니 경계 주변에서 자동차로 도망 다니겠다는 거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쏠까?, 무시할까?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차피 우리는 이동해야 하는 상황. 한 명이라도 생존자를 줄여 놔야 불필요한 교전도 줄어든다."나 쏜다."라는 짧은 한마디만 한 채 조수석 탑승자의 머리에 조준점을 맞추고 방아쇠를 당겼다. 헬멧을 쓰고 있었지만 7.62mm 탄환을 쏘는 저격 소총의 직격탄을 막을 정도는 아니다. 한 방에 조수석 탑승자가 차 밖으로 사출되었고, 놀란 다른 적들이 차 밖으로 뛰쳐나왔다.
세 명을 기절시키자 그다음부터는 쉬웠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내 속을 그리 썩이던 팀원들이 막상 전투에 돌입하자 솔져 76으로 변했다. 이래서 데려온 거다. 총은 잘 쏘니까. 깔끔하게 네 명의 적을 모두 처리하고 집 밖으로 나섰다. 자기장이 줄어들고 있었다. 더는 꾸물거릴 수가 없다. 정문으로 나와 달리기 시작하는데, 다급한 30세 백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측! 언덕! 적 한명! 뛴다!"
팀원을 모두 잃고 혼자 남은 상대는 다급히 무릎을 꿇고 사격 자세를 취했지만 내가 조금 더 빨랐다. 머리에 한 발을 먼저 맞췄다. 상대는 다급히 엎드렸고, 난 다시 한 발을 발사했다. 차탄은 빗나갔다. 하지만 새로 얻은 8배율 스코프 덕분에 조준은 어렵지 않았고, 세 번째 탄환은 정확히 적을 맞췄다. 그리고 그 순간, 뒤에서 총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응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뒤에서 전자기파가 밀려오는 것도 있었고, 체력이 너무 적었다. 이 상황에서는 엄폐물을 먼저 찾아 치료부터 해야 한다. 가까스로 바위 뒤에 숨을 수 있었고, 구급 상자로 상처를 치료했다. 적은 조금 전 우리가 나온 집에서 우릴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미 전자기파가 휩쓸어버린 지역이라 시한부 인생이다. 그 와중에도 우릴 쏠 생각을 하다니. 어차피 포기한 것 킬 포인트라도 챙기려 했나 보다. 그래도 그들의 노력은 통했다. 가장 뒤에 있던 우리의 운전사 코멧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코멧의 복수는 전자기파가 대신해주었지만, 위기는 끝이 아니었다. 하필 이 지역은 배틀그라운드 내에서 가장 높은 해발고도의 산이 바로 옆에 있는 지역이었는데, 이 부근에 미리 와있던 적들이 고지를 놔둘 리가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 보이지도 않는 먼 거리에서 총알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서쪽! 산 위다! 300미터쯤 된다! 크리크 조절 해라!(실제 대사입니다)"
눈썰미 좋은 루빅 팀장이 먼저 적의 위치를 잡아냈다. 하지만 적의 무장은 일반적인 돌격소총이 아닌, 게임 내 최강의 위력을 갖춘 AWM을 쏘는 적을 상대로 원거리 전에서 우위를 점하기는 힘들었다. 그 와중 용케 주변의 적들을 잡아낸 루빅 팀장과 30세 백수는 재빨리 엄폐를 시도했지만, 난 운이 별로 좋지 못했다. 아껴둔 연막탄을 모조리 쓰며 연막 지대를 만들었지만, 사수는 한 명만이 아니었고, 결국 내가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용기있는 우리 백수 친구가 쏟아지는 총알을 피하며 내 앞으로 기어왔고, 나무를 엄폐물 삼아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이제 생존자는 9명. 그중 세 명이 우리다. 우승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쏟아지는 총탄에서 몸을 숨기느라 아직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다.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 2분이었던 타이머는 이미 제로였고, 전자기파가 우릴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침착하자. 올바른 방향으로 뛰면 되는 거야. 방향을 확인하기 위해 지도를 열었다.
이럴 수가... 하필 안전구역이 현재 위치와 정 반대에 설정되었다. 전자기파는 초반에는 별로 아프지도 않고, 엎치는 속도도 굉장히 느려 그저 뛰기만 해도 살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빠르고, 엄청나게 아파진다. 지금쯤이면 스치는 순간 몸이 타기 시작할 거다. 이젠 총알이 중요할 때가 아니었다. 일단 뛰어야 한다.
결국, 전자기파가 우리를 덮쳤고, 몸이 구워지는 속도는 우리가 달리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아쉽다. 먼저 사망한 코멧이 "구급상자라도 써요!"라고 외치지만, 이미 이쯤 되면 구급상자 쓰다가 죽는다. 그렇게 29분간 이어진 전투가 끝났다. 최종 스코어 3등. 우리가 죽고 난 후 남은 생존자의 수는 고작 5명이었다.
그래도 즐거운 한 판이었다. 이게 배틀그라운드의 매력이 아닐까 싶었다. 몇 판을 하더라도, 매 판이 드라마다. 새로 게임을 할 때마다 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이 게임의 진짜 매력 아니겠는가. "진짜 막판 한번 하죠!"라고 말하는 코멧의 목소리에 "안 돼"라고 쓸쓸히 대답해준 후 헤드셋을 벗었다. 이미 시간은 새벽이다. 미안하다. 내가 한 판 더 해줄 힘이 없다. 넌 내일 놀지만 난 이거 생존기 써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