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에 돌이켜보는 GTA2에 관한 낡은 추억


초등학생 시절에는 주말마다 부모님과 함께 서울에 있는 사촌 형 집에 놀러 가는 것이 정말 반갑고 좋았더랬다. 한컴 타자연습 속 소나기 게임에 즐거워했던 나에게 있어 사촌 형의 PC는 그야말로 최신형 게임들이 총망라되어있는 '게임의 보고'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2, 포트리스2를 처음 마주한 것도 모두 사촌 형의 PC에서였다. 보통은 형이 게임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치 미지와의 조우를 떠올릴 만큼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GTA2를 처음 만난 것도 딱 이때였던 것 같다. 나쁜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초등학생 시절의 나에게, 두려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듯 대담한 행동을 이어나가는 게임 속 주인공의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지금 돌이켜보면 선량한 운전자를 끌어내려 자동차를 훔치고,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는 주인공의 모습은 어린이의 정서발달에 좋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당시엔 '게임 속에서는 이러한 일도 가능하구나'라고 생각했던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그로부터 약 20년 뒤, 스팀에서 그때 그 시절의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신작 '러슬러(Rustler)'를 만났다. 자동차 대신 말을 훔치는 머리숱이 없는 주인공과 특유의 탑다운 뷰까지, 여러모로 추억을 소환하는 게임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에 '얼리억세스' 문구와 한국어 미지원 표시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구매 버튼으로 손이 갔다.

그렇게 만난 러슬러는 과연 초기의 GTA 시리즈를 상기시키는 게임임이 분명했다. 어린 시절의 추억에 잠기기도 잠시, 머릿속에서 2만 6천 원이 단순히 추억을 떠올리는 것으로 그치기에 합당한 가격이었나 하는 심도 있는 고찰이 시작됐지만 말이다.

게임명 : 러슬러 (Rustler)
장르명 : 탑다운 슈터 / 액션
출시일 : 2021. 2. 18.
개발사 : Jutsu Games
서비스 : Modus Games
플랫폼 : PC



자동차 대신 말을 훔치는 중세 말도둑의 일대기, '러슬러'

러슬러는 팝 문화가 널리 퍼진 가상의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법을 무시하고 본인 마음 가는 대로 생활하는 방탕한 '중세 깡패'가 되어볼 수 있는 액션 게임이다. 기본적으로 오픈 월드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특정 미션을 달성하는 것보다 게임 속 넓은 필드를 자유롭게 방랑하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여러 사건을 만나며 본인 스스로 재미를 찾아 나가는 것이 이 게임의 주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말보다 더 빠르고 좋은 말을 갈취해 속도를 만끽하거나, 나쁜 짓을 반복하며 범죄 등급을 높이고, 철퇴를 가하기 위해 쫓아오는 기사들과 격렬한 '호스 체이싱'을 벌이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단순히 문제를 일으키고 돌아다니는 것만이 이 게임의 목적인 것은 아니다. 러슬러에서는 중세라는 시대적 설정에 맞는 다양한 요소들이 등장하여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종교 탄압이나 마녀 사냥, 귀족과 평민의 신분 격차 탓에 발생하는 해프닝은 물론, 아서왕 전설 속 성검 엑스칼리버를 연상케 하는 스토리 까지, 중세 배경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들이 게임 곳곳에 가득하다. 물론, 이 게임이 철저한 고증을 기반으로 하는 역사 게임이 아니라는 점은 명심해둘 필요가 있다.


러슬러를 처음 플레이했을 때 게임 내적으로 아쉽다고 느껴지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는 다소 불편한 조작감이다. 게임 플레이에 필요한 조작키는 몇 개 존재하지 않지만, 탑다운 뷰 시점에 맞춘 캐릭터 이동, 그리고 캐릭터 이동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탈것 조작이 몇몇 유저들에게 있어서는 게임 진입을 막는 하나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인내심을 갖고 20분 정도 플레이하면 그나마 조금씩 익숙해지는 편이지만, 중세 깡패가 되어 마음껏 휘젓고 다니는 게임 플레이를 기대했던 이들에게 초반부터 걸음마를 익히게 하는 것은 쉽사리 감내하기 어려운 요소가 된다.

이동 조작에 조금씩 익숙해질 참이면 곧이어 '전투'라는 새로운 시련이 등장한다. 질서와 제도의 그늘에서 벗어나 안하무인의 삶을 영유하려면 모름지기 홀로 설 수 있는 최소한의 무력을 갖춰야 하는 법. 초반부터 주먹질과 방어, 그리고 상대의 방어를 뚫을 수 있는 강한 공격의 조작법을 튜토리얼을 통해 친절하게 가르쳐주므로 이동 조작에 익숙해지는 것보다는 훨씬 허들이 낮은 편이다.

문제는 맨주먹으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 해도 무방할 정도로 주인공 가이가 약골이라는 점이다. '중세 깡패'라는 폭력적인 어감만 들으면 앞을 가로막는 그 어떤 적이라도 한 방에 보내버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게 되지만, 기대와 달리 갑옷과 검으로 무장한 게임 속 경비병들에게 몇 번 참교육을 당하다 보면 자연스레 법을 지키기 위해 낮은 속도로 말을 몰고 있는 자신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침을 찍찍 뱉는 동네 건달이 상대라 하더라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맨손으로 붙으면 10초도 안 되어 바닥에 눕기 십상이라, 항상 주변의 애꿎은 목책이라도 무너뜨려 나뭇가지라도 손에 들고 있어야만 했다. 이러다보니 아무리 화려한 샌드박스라 할지라도 모래 장난 한번 마음 놓고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 다수의 적과 싸울 때도 기관총으로 쓸어버리는 호쾌한 그림은 기대하기 어렵다

▲ 도시에서는 항상 신호를 준수하고, 자칫 사람이 치이지 않도록 서행하는 것이 좋다



GTA2를 추억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헌사, 곳곳에 삽입된 유머는 '덤'

러슬러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많은 유저들이 이 게임을 '중세판 GTA'라고 부르며 기대를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공개된 게임에서도 자동차가 말과 마차로 바뀌었을 뿐, 불친절한 것으로 악명을 떨친 바 있는 20년 전 액션 게임 GTA2의 조작 방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기의 GTA 시리즈를 플레이해본 적이 없거나, 비슷한 장르의 게임이 익숙치 않은 이들에겐 진입 장벽이되는 요소들도, 당시의 게임을 기억하는 팬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추억을 자극하는 요소'가 되는 셈이다.

러슬러의 개발자들이 GTA2를 정말 인상 깊게 즐겼는지, 게임 곳곳에는 탈것 조작법 이외에도 GTA2를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다양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제는 정말 웬만한 오픈월드 액션 게임들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등장하는 탈것 갈취 모션부터,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흘러나오는 흥겨운 힙합 음악, 그리고 탭 키에 할당된 트림과 방귀 소리 등이 대표적인 예다. 어렸을 때는 탭 키를 눌렀을 때 출력되는 방귀 소리에 참 즐거워하고는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러슬러에서도 여전히 재밌다. 단순히 한 가지 음만 출력되는 것이 아니므로, 심심하면 비트박스처럼 연타하며 놀기에도 제격이다.

▲ 완성도 높은 방귀 소리와 트림 소리가 구현되어 있다.

돈을 모아 상점에서 장비를 구하는 방식 대신 보물찾기처럼 맵 곳곳에서 강력한 무기나 방어구를 주워 사용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러슬러에 등장하는 무기는 기관총이나 샷건 같은 강력한 총기 대신 곡괭이나 도끼 같은 날붙이들이 대부분이지만, 가끔 '큰 낫' 같은 강력한 무기를 주워서 적을 일망타진할 때면 GTA2에서 군인의 탱크를 탈취해 도로 위의 차들을 모조리 깔아뭉개고 다닐 때의 재미가 떠오른다.


이외에도 GTA2의 배경이 되는 도시의 모습을 재현한 듯, 중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기발한 상상들이 마을 곳곳에 배치되어 유저들로 하여금 실소를 머금게 한다. 형형색색의 락카로 그려진 화려한 그래피티나, 마치 신호등처럼 대부분의 길목마다 배치된 안내판, 마구간이나 말뚝 대신 흰색 분필로 신경써서 그려둔 듯한 주차장 표시가 대표적이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GTA 시리즈에서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차량 오디오 시스템의 중세식 재해석이다. 말을 타고 다니는 중세 시대에 오디오 시스템이 있을 리 만무하므로, 러슬러에서는 도시의 음유시인을 오디오 시스템으로 활용했다. 약간의 돈을 주고 고용하면 시인은 주인공이 어딜 이동하든지 뒤를 쫓아오며 감미로운 곡을 연주해준다. 다른 음악이 듣고 싶다면 무기를 주먹으로 바꾸고, 낡은 주크박스를 대하듯 가볍게 시인을 두드려주기만 하면 된다.

이처럼 러들러는 기본적으로 GTA2를 추억하는 이들, 그리고 무겁지 않은 분위기의 오픈월드 샌드박스 게임을 즐기고 싶은 이들에게 어울리는 게임이다. 아직 얼리억세스인 점을 함께 고려하면, 추후에 추가될 더욱 다양한 콘텐츠들을 기대해볼 정도는 된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기대를 한국 유저들에게까지 범위를 넓혀 적용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인 것처럼 보인다.




"이게 최선이었나?" 유저 기대 저버리는 아쉬운 요소들

현재 러슬러의 스팀 상점 페이지를 보면 한국어를 지원한다는 문구를 찾아볼 수 없다. 분명 얼리억세스 버전 출시 전에는 한국어 인터페이스와 자막을 지원할 것이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왜 갑자기 빠지게 된 것인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까지도 근본적인 원인은 모르겠으나, 게임을 플레이해보면 누구나 그 원인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 게임은 한국어 번역이 정말 끔찍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구글 번역기를 돌린 듯한 번역 문구는 기본이고, 출력조차 되지 않아 네모로 표시되는 글자들이 허다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양심상 얼리억세스 출시 전에 한국어 지원 문구를 빼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 정도다.

여러 문제들 탓에 문장이 제대로 읽히지 않으니 스토리를 따라가기 어려웠고, 분명 웃으라고 만들어둔 것이 분명해 보이는 유쾌한 장면에서는 현장의 분위기를 혼자서만 읽지 못하는 눈치 없는 사람이 된 것처럼 정색을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언어를 영어로 바꾸면 게임의 맛을 더 제대로 느낄 수 있겠지만, 한국어를 지원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이들에게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 나는 스토리 이해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 하나뿐인 불알친구가 하루밤 사이에 너무 어색하게 느껴진다

근본이 되는 20년 전의 게임을 계승하려는 의지가 너무 강했는지, 편의성과 직접 관련되는 부분들까지 구시대적인 방식으로 적용한 것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 대표적인 것이 중간에 실패하면 다시 처음부터 반복해야만 하는 방식의 퀘스트 설계다. 서브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여러 임무를 단계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경우가 자주 등장하는데, 중간에 잠깐 실수라도 하면 가장 처음부터 다시 반복해야 하는 경우가 지겹도록 자주 발생한다. 필요할 때 바로바로 수동 세이브를 할 수도 없다 보니, 이때는 대처할 방도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난이도를 '쉬움'으로 낮추고 플레이를 이어가더라도, 퀘스트의 구조적 특징에 멍청한 NPC AI가 더해져 시너지를 일으키니, 본의 아니게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임무들을 계속 마주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다음 스토리를 더 보고 싶어 계속 재도전하게 되지만, 퀘스트 하나하나를 넘기는 게 좀처럼 쉽지 않다 보니 어떤 퀘스트를 플레이하더라도 금방 피로가 누적된다. 시스템에서 편의 기능을 제공하지 않으니, 그나마 스트레스를 덜 받으려면 중요한 퀘스트를 시작하기 전에 무조건 빈민가의 주인공 집에 이동하여 수동으로 세이브를 해두는게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

▲ 내가 죽든, 동료가 죽든, 동료가 멀어지든, 스킵도 안되는 스토리를 처음부터 다시 봐야 한다





러슬러는 출시 전부터 유저들의 기대를 너무 많이 받아 도리어 아쉬움을 산 작품이 아닐까 싶다. 1년 전부터 '중세 GTA'라는 독특한 컨셉으로 공개되어 유저들에게 눈도장을 찍었고, 얼리억세스 출시를 얼마 앞두지 않은 때에는 이달의 기대작으로 꼽히기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공개된 러슬러의 얼리억세스 버전은 아직 개발 중인 티가 역력했고, 스팀 유저들은 이에 '복합적' 평가로 답했다.

러슬러가 출시 초반부터 이어진 혹평 세례를 이겨내고 다시 재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나, 개발진은 근본적인 문제로 꼽히는 부분들을 모두 갈아 엎는 대대적인 게임 플레이 개선 업데이트를 약속하고 나섰다. 개선안에는 퀘스트 난이도 조절과 퀘스트 내 체크 포인트 추가 등 특히 불편을 가중시켰던 부분들에 대한 개선 내용도 포함됐다.

유저들의 피드백을 받아 약속한 내용들처럼 당장의 구조적 문제들을 개선하고, 중세 시대에 기발한 상상을 더해 유쾌함을 창조해낸 '러슬러'만의 매력을 더욱 매끄럽게 다듬어 향후 정식 출시 버전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게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