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는 너무나 행복한 얼굴로 추억속 멜로디를 켠다.
크레딧이 종료되며 그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진다.
그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자리에는 숄만이 덩그러니 자리한다.
혼자 남은 그녀는 연주를 멈춘다.
그의 온기가 남은 숄을 부여잡고 뒤돌아 그와 함께 바라봤던 풍경을 바라본다.
그리고, 끝.
화면이 희게 변한다.
게임명: 웬 더 패스트 워즈 어라운드 | 개발: Mojiken |
---|
웬 더 패스트 워즈 어라운드. 과거가 가까워졌을 무렵.
게임이 끝나고도 한참을 울었다. 분명 하얗게 비어있던 시작 화면이 그와 그녀의 모습으로 가득 찬 것을 보면서, 그들이 함께 연주했던 음악을 들으면서 그렇게 한참을 엉엉 울었다. 리뷰를 쓰겠다고 키보드를 잡고 앉아있는 지금도 자꾸 눈에 눈물이 고인다.
'슬픔'에 대해 다루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까딱 잘못하다간 억지스러운 감동만을 우겨넣는 뻔한 신파가 될 수 있으니까. 지금 여기야, 여기서 울어, 꼭 울어야 해 라며 사람의 감정을 억지로 몰아치는 뻔하디뻔한, 그런 신파.
이 게임은 유저를 몰아세우지 않는다. 약 한 시간 반 가량의 플레이 시간 동안 마치 물이 스며들듯, 감정을 스며들게 한다. 억지스러운 슬픔이 없기에 그만큼 클라이맥스에서 오는 안타까움이 극적으로 느껴진다. 그와 그녀에게 일어났던 일을 천천히 보여주면서 '그'가 얼마나 '그녀'에게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커다란 것이 마음에서 툭 떨어져 나갔을 때 그녀가 얼마나 텅 비어버렸을지를 이해시킨다.
그리고 오로지 '이미지'와 '음악' 만으로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전달한다. 게임은 텍스트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메시지, 감정, 그리고 그녀가 놓인 상황까지 모두 너무나 명확하게 마음에 와 박힌다.
대사나 지문 등 텍스트는 보는 사람에게 상황을 이해시키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이다. 등장인물의 감정과 그가 처한 환경, 생각 등을 플레이하는 이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게임은 그런 쉬운 방법을 버렸다. 대신 큰 이미지와 컷으로 나뉜 이미지를 동적으로 활용했다. 마치 움직이는 '일러스트 책'을 보는 듯하다.
보통 움직이는 일러스트라고 하면 대부분 애니메이션을 떠올린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의 느낌이 아니다. 그렇다고 GIF의 느낌도 아니다. 뭐랄까, 이건 분명 한장 한장 넘기면서 자연스럽게 움직임을 따라가게 되는 '책'의 느낌이다.
그렇기에 유저가 받게 되는 감정의 깊이 또한 분명 디지털 매체임에도 좀 더 아날로그한 종이책에 가깝다. 직접적으로 상황을 묘사하고,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주고, 들려주며, 보는 이가 상상을 통해 '슬픔'이라는 감정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그 과정에서 이미지는 때론 색상을 통해, 때론 움직임을 통해 변화하며 게임을 다채롭게 만든다. 단순히 큼지막한 배경 이미지만 사용하지 않는다. 유저가 배경 속 퍼즐을 풀고 나면, 자그마한 컷으로 나뉘기도 하며, 마치 컷씬처럼 화면 전체를 활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변화를 그냥 단순히 시각적으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유저가 클릭이라는 '참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도록 해뒀다.
여기서 텍스트를 제외한 장점이 확 드러난다. 반드시 읽어야 하는 요소가 없기에 유저는 오롯이 이미지와 사운드의 흘러감, 변화,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집중할 수 있다. 대사가 없으니 굳이 스킵을 할 필요도 없고, 억지로 뭔가를 이해할 필요도 없다. 그저 모니터 속에 그려지는 것을 보고, 그 감정만을 따라가면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게임다운 요소도 들어간다. 바로 퍼즐이다.
난이도는 어렵지 않다. 단지 한 챕터마다 문을 통해 연결된 장소 전체가 하나의 '풀어야 할 문제'가 된다. 해변에서 확인한 아이스크림 막대 속 문구가 다른 구역의 힌트를 통해 첫 번째 방 안의 자물쇠를 푸는 '열쇠'가 되는 식이다.
프롤로그 후 마주치는 스테이지들은 절대 한 구역에서 다 풀어낼 수 없다. 구역들을 이동하며 새로운 힌트를 찾아내고, 다시 돌아와서 이전의 문제를 풀어내고, 또 거기서 얻어낸 것이 마지막의 문제를 풀어내는 '키'가 된다. 모든 구역이 다 연계되기에 일반적인 퍼즐 게임보다 조금 더 어렵게 느낄 수도 있다. 다만 일반 퍼즐 게임들이 그러하듯 고통스러울 정도로 머리를 쓰거나 외워서 풀어내야 하는 문제는 없다.
게임은 어찌됐든 조작이라는 요소가 필요하다. 진행을 위해서는 어떠한 방식이든 고민을 하고, 해결을 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캐릭터가 처한 상황에 감정적으로 오롯이 이입하기란 쉽지 않다. 살짝 감정이 올라올 만 하면 깨져버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웬 더 패스트 워즈 어라운드는 분명 퍼즐이라는 조작 요소를 도입했음에도 감정에서 오는 '몰입감'을 지켜냈다.
이는 퍼즐까지도 그녀의 이야기 속 하나의 장치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해결 그 자체가 목표가 되는 것이 아니기에 퍼즐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통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녀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음악을 따라 '그'를 찾기 위해 커피숍을 나가고, 닫혀있는 철문을 열고, 손을 내미는 것도, 아픈 그에게 숄을 찾아 덮어주고, 약을 찾아 건네는 것도, 모두 '퍼즐'이자 '이야기'다.
이 때문에 퍼즐은 좀 더 서사적인 요소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녀가 갑자기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약을 찾기 위해 온 집을 헤집고 다니는 챕터를 플레이하다 보면 아, 이래서 프롤로그에서 마주한 그녀의 집안이 그렇게도 엉망이었구나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텍스트 하나 없어도, 그리고 굳이 내용 전달을 위해 설명하는 부분 하나 없어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유저는 그와 그녀가 좋아하는 커피를 타고, 쿠키를 굽고, 모닥불을 붙이고, 유리병 편지를 만들며 그들의 행복한 과거를 함께할 수 있다. 게임 속 퍼즐은 단순히 풀기 위한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추억을 함께하는 '수단'이 된다. 이게 바로 웬 더 패스트 워즈 어라운드가 게임임에도 감정을 자연스럽게 전달할 수 있었던 이유다.
개발사에서 직접 제작한 음악과 효과음, 아티스트가 하나하나 그려낸 일러스트, 그리고 그 속에 슬며시 녹아드는 게임 요소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이야기'로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이 모든 것이 게임의 시나리오가 되며 동시에 서사를 전달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
그와 그녀가 만나는 순간, 사랑했던 순간, 행복했던 순간, 그리고 이별해야 했던 순간, 혼자 남은 이가 그 고통을 극복해나가는 순간이 이 게임 하나에 그대로 담겨있다. 하얗게 그려진 시작 화면부터 홀로 남은 그녀의 뒷모습이 서서히 흐려지는 크레딧의 마지막, 그리고 다시 돌아온 시작 화면에 가득 찬 그들의 추억까지 게임 속에 모두 담겨있다.
그녀는 분명 가장 고통스러웠던 그 순간을 버텨냈다. 그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계속해서 맴돌며 끊임없이 과거를 회상하게 하는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텼다. 그리고 그녀의 그 순간을 함께 지나쳐온 나는 그녀가 행복하기를, 그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운 과거를 이제는 서서히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울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읽어내려갈 수 있는 그녀의 일상은 게임과 함께 끝났다. 문이 열렸고, 그녀가 그를 찾았으며, 함께 너무나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그날'이 다가왔고 그들은 이별했다. 그렇지만, 그 이후를 살아갈 그녀의 모습이 크레딧 너머로, 모니터 너머로 그려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