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모습을 한 심리치료 비디오


우리 생활 속에서는 안된다고 부정적인 의견을 내기 어려운 상황들이 많이 벌어지곤 합니다. 싫은 건 싫다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기만 하면 한 번에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은 문제들도 여럿 있지만, 상대방과의 관계나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다 보니 점점 소극적이 되고, 위축되기만 하죠.

이러한 분위기는 유교 사상을 근간에 두고 선후배 문화와 군대 문화가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대한민국에만 국한되는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사람 사는 모습은 전 세계 어디서나 다 똑같은 모양입니다. 저 멀리 독일 베를린에 위치한 작은 인디 게임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이야기하는 독특한 신작을 내놓았거든요.


게임명: 세이 노! 모어 (Say No! More)
장르명: 캐주얼 어드벤처
출시일 : 2021. 4. 9
개발사 : Studio Fizbin
서비스 : Thunderful Publishing
플랫폼 : PC

관련 링크: 'Say No! More' 오픈크리틱 페이지


언제까지 참고만 살거야? '싫어'라고 말해!


'세이 노! 모어'는 어느샌가 사용하기 조심스러워진 그 단어, 'NO'를 사용할 수 있게 된 인턴의 이야기를 담은 캐주얼 어드벤처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모두가 'YES'라고 대답하는 것이 당연시된 세상에서 나만의 분신 캐릭터를 만들고, 'NO'라는 단어에 담긴 긍정의 힘으로 세상을 바꿔나가야 합니다.

새내기 인턴에 불과한 플레이어 앞에는 터무니없고 부당한 요구를 들이미는 상사들이 가득한데요. 이 게임에서만큼은 그 모든 부조리에 'NO!'라고 자신 있게 대꾸해줄 수 있습니다. '세이 노! 모어'라는 게임이 전달하고자 하는 게임의 주요 메시지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플레이어는 화끈하게, 어떨 때는 차갑고 냉정하게, 가끔은 귀찮은 듯이, 때때로 우스꽝스러운 말투로 싫다는 의사를 전할 수 있습니다. 말귀를 알아먹지 못하는 이들에겐 NO 수치를 충전하여 더 강력하게 'NO!'를 쏴줄 수도 있죠.

예의범절, 친구 관계, 회사 규정처럼 논란이 끊이지 않는 현대적인 이슈를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게임은 심각한 분위기 대신 시종일관 밝고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됩니다. 레일 슈터처럼 정해진 루트로 게임이 흘러가기 때문에 별다른 조작도 필요 없으니,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것이 이 게임의 특징입니다.

▲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은 꽤 다양한 옵션을 제공하므로,
나와 닮은 아바타를 만들어 대리만족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 게임 속엔 사회 초년생이 마주할 수 있는 다양한 부조리들이 등장합니다



해학적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준 높은 현지화


게임을 처음 시작하면, 가장 먼저 깔끔하게 구현된 한국어 번역이 눈에 들어옵니다. 챕터 제목으로 쓰인 '나를 알고 노를 알면', '제9 아니구역' 같은 말장난 수준만 봐도 보통 수준의 현지화가 아니란 것을 짐작해볼 수 있죠. 실제로 게임 시작부터 클리어까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번역문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게임 플레이는 전반적으로 영어 음성으로 진행되지만, 게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NO!' 부분에는 16개 언어로 음성 더빙이 적용되었습니다. 각 언어별로 플레이어가 몰입할 수 있도록 남성, 여성의 목소리가 모두 제공되고, 그중에는 물론 한국어도 포함됐습니다.

깔끔한 번역과 언어 더빙이 동시에 제공되니, 플레이어는 세이 노! 모어의 이야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됩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하여 총 10개로 이루어진 챕터를 쉴새 없이 플레이할 수 있고, 게임을 마치고 난 뒤에는 '볼륨이 적어 아쉽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 적어도 '싫다'는 표현을 각 국가에서 어떻게 표기하고, 발음하는지 확실히 배울 수 있습니다

▲ 다소 뻔하다고 느낄 순 있지만, 스토리는 훌륭한 몰입감을 보여줍니다



'NO-플레잉 게임'이라 아쉽다


개발사 스튜디오 피즈빈은 이 게임을 세계 최초의 'NO!-Playing Game'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개발자가 전하려던 뜻은 간단한 조작으로 'NO'를 하며 즐기는 게임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게임은 개발자의 말 그대로 '플레이할 것이 없는 게임'이 되기도 합니다.

플레이어가 이 게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상황에 따라 스페이스 바를 눌러 'NO!'를 외치거나, 아니면 가만히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뿐입니다. 10개의 챕터를 진행하는 동안 과장 하나 안더하고 스페이스 바 하나로 엔딩을 볼 수 있을 정도죠. 도전과제 중에는 적당한 타이밍에 스페이스 바를 누르거나, 누르지 않아야 하는 것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것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게임오버가 되지는 않습니다.

▲ 여러 조작법이 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더욱 아쉽습니다.

초반부 챕터 하나씩을 통째로 할애하여 소개되는 네 가지 '아니요' 모드와 '조롱하기' 시스템도 게임 내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처음 이 시스템을 봤을 땐 네 가지 종류의 '아니오'와 각 내용별 부조리에 빨강, 파랑, 노랑, 초록 같은 색상 개념을 대입하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숫자 키와 시프트 키를 활용하여 순간순간 빠르게 모드를 전환할 수 있는 기능도 있으니, 같은 색상의 부조리에 맞춰 아니오 모드를 빠르게 전환하고, 한 번의 실수 없이 가능한 많은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는 방식의 미니게임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4개의 서로 다른 아니오와 조롱 기능이 하나씩 해금될 때만 하더라도 이러한 기대감은 계속해서 커졌습니다만, 결국 엔딩 이후에도 아니오와 조롱을 추가로 활용하는 시스템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1회차 플레이를 끝내고 나면 '다소 뻔하지만, 긍정적인 메시지가 담긴 영상 한 편 봤다' 정도의 인상만 남고, 도저히 2회차를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게 됩니다. 도전과제 중에는 '싫어!라고 99999번 말하기'도 있는데, 누가 현재의 버전에서 이 도전과제를 달성할 수 있을지 궁금해지더라고요.

▲ 뭔가 획기적인 파훼법이 있을지 기대하게 되지만, 그냥 '아니오'를 길게 누르면 된다.

▲ 1회차를 플레이하는 동안 약 600번의 '싫어'를 연발했다.





'세이 노! 모어'는 게임 플레이 부분에서 합격점을 주기 어려운 작품이지만, 절대 안 좋은 게임은 아닙니다. 90년대 감성의 레트로 그래픽과 신나는 재즈 음악, 여기에 코믹한 연출이 더해져 보고있으면 절로 유쾌해지는 기분 좋은 게임입니다.

매번 스팀에서 게임을 구매해도 좀처럼 플레이 버튼에 손이 가지 않고, 플레이하는 것 자체가 부담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이 있을 텐데요. 가벼운 마음으로 웃을 수 있는 게임을 찾고 있는 분들에게 '세이 노! 모어'는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다회차 콘텐츠를 기대하기 어려우니 가능하다면 할인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을 때 선택하는 것이 더 좋겠죠.

최근 게임을 포함한 디지털 기술을 치료 약물처럼 활용하여 질병을 예방, 관리, 치료하는 '디지털 치료제(DTx)' 개념이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세이 노! 모어'를 플레이하면서도 단순히 재미를 주기 위한 게임이라기보다, 게임의 모습을 한 심리치료 영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또 모르죠. 언젠가 '세이 노! 모어'를 심리 치료 분야에 활용되는 DTx 레퍼런스의 한 형태로 만나볼 수 있을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