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가격대 와인과 가성비를 비교하게 되는 게임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한 번쯤은 자기 와이너리를 꾸려보자는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낯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재수할 때 와인에 빠진 나머지 나중에 돈을 벌어서 칠레나 아르헨티나에 와이너리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그 열정은 군대와 취업전선을 거치면서 사그라들었지만 말이다.

그러다 최근 갑작스레 와인에 빠진 친척의 여파로 와인에 대한 정열은 다시 불타올랐고, 언젠가 츠지모토 켄조처럼 성공해서 와이너리를 만들겠다는 그 꿈도 다시 살아난 상태다. 물론 현실에서는 어지간해서는 어림도 없다. 땅 사랴 포도 사랴 관리하랴 유통망 구축하랴, 거기에 전문가까지 고용해야 할 테니 자금이 얼마나 필요할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랬던 터라 게임에서라도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자기 와인을 만들어볼 수 있는 '헌드레드 데이즈'에 눈길이 쏠렸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걸 간접 체험할 수 있다는 게 게임의 묘미 아니던가. 그렇게 기대감을 안고 구매한 헌드레드 데이즈였지만, 뒷맛이 썼다.

게임명 : 헌드레드 데이즈: 와인메이킹 시뮬레이터(Hundred Days: Winemaking Simulator)
장르명 : 시뮬레이션
출시일 : 2021. 5. 13.
개발사 : Broken Arms Games
서비스 : Broken Arms Games
플랫폼 : PC

관련 링크: '헌드레드 데이즈' 오픈크리틱 페이지



와인 제조 과정은 심플하게 잘 담았다

▲ 품종은 다르긴 하지만, 꿈에 그리던 와인과 비슷하게 만들어보자

뚜껑을 처음 열었을 때 헌드레드 데이즈의 아로마는 꽤 정갈하고 심플했다. 런던에서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고 있던 엠마가 어느 날 할아버지에게 와이너리를 상속받아 와이너리를 운영하게 됐다는 어찌 보면 와인애호가들의 꿈같은 이야기를 아주 간단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와인에 별 관심이 없던 엠마의 첫 행보를 보면 고구마를 먹은 듯 답답해지긴 하지만, 그래도 할아버지 지인들의 능력이 뛰어난 터라 몇 턴 만에 엠마를 잘 이끌어서 그런 답답함은 쉽게 해소된다.

스토리뿐만 아니라 게임 플레이에서도 그렇게 묵은 체증이 빨리 해소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와인 제조 과정을 흔히 볼 수 있는 테트리스 형 퍼즐로 쉽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와인을 만드는 과정은 각 와이너리마다 다르긴 하지만, 큰 틀에 보면 계절마다 제초 및 솎아내기 -> 포도 병충해 관리 및 청소 -> 포도 수확 -> 파쇄 -> 발효 -> 압착 -> 숙성 -> 병입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마다 진행해야 할 업무가 테트리스 블록처럼 각기 다른 모양으로 나오게 되는데, 이를 타일형 그리드에 끼워 맞추고 일정 턴을 넘겨야만 업무가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방식이다.

▲ 계절에 맞춰서 여러 과제들이 퍼즐 형태로 주어지고

▲ 더 원활히 진행하려면 업그레이드는 필수다


▲ 퍼즐로 나온 업무 외에도 와이너리 곳곳을 둘러보면서 각종 업무를 진행한 뒤 턴을 넘기자

이를 잘못 계산해서 퍼즐이 타일형 그리드에 맞출 수 없으면 몇 턴 뒤에 업무가 진행되며, 그게 누적되면 적기에 수확을 못 하거나 와인을 제때 팔지 못해서 자금 부족으로 파산할 수도 있다. 실제 와인 제조 과정에서는 시기를 놓치면 아예 폐기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겠지만, 그나마 몇 턴 뒤로 밀려도 어떻게든 수확하고 와인을 만들어서 팔 수 있게끔 해서 초보들도 점차 적응해나갈 수 있었다.

여타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들이 그렇듯 헌드레드 데이즈 역시도 와이너리를 운영하면서 와인을 팔고, 그 돈으로 와이너리를 키우고 더 좋은 와인을 만들어가는 성장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간혹 병충해라던가 그런 해프닝이 걸리거나, 혹은 장비를 수리하느라고 예기치 않은 지출이 발생한다.

▲ 어떤 업무가 있는지 모르면 우측 상단의 알림을 보거나

▲ 일기, 메모를 통해서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렇게 돈이 갑자기 필요해질 때 융자를 빌리고 와인을 판매하면서 갚아나가는 체계도 잘 갖춰져 있었다. 이자율이 꽤 센 편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적자가 나도 몇 턴은 넘어가주는 터라 살짝 자금을 무리하게 운용해도 아슬아슬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다소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와이너리를 알음알음 키워가면서 고평가받는 와인을 만드는 꿈을 초보 유저도 쉽게 이루도록 난도를 낮춘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매 턴마다 해야 할 일이나 도움말이 오른쪽 위에 메시지로 뜨니, 그것만 참고해서 주문을 처리하고 수리하고 이런저런 잡무를 처리하면서 와이너리를 운영하다 보면 어느 새 수확철이 다가온다. 그 수확한 포도를 파쇄하고 발효하고 압착 숙성을 거쳐 병입한 뒤 "이번엔 어떤 평가를 받을까?" 두근거리는 그 느낌, 확실히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맛이 난다. 이렇게 심플하게 그런 느낌을 전달할 수 있다니, 일견 감탄이 나올 뻔했다.

▲ 하단에 보이는 업무뿐만 아니라 곳곳을 살펴보면서 이것저것 업그레이드하고

▲ 매출 및 지출 관리하고 부족한 돈 대출받아 상환하고...시뮬레이션 요소도 충실하다



적은 볼륨과 레퍼토리로 기약 없는 반복 노동


작중 배경은 이탈리아 피에몬테 주의 랑게 지역이다. 이탈리아 북서부에 있는 이곳은 바르베라, 네비올로, 돌체토, 샤르도네 등 품종이 유명한 곳으로, 작중에 등장하는 포도는 이 품종에 '한정'되어있다. 와인 애호가라면 "그게 뭐 어때서?"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와인을 이제 막 알아가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아쉬울 수밖에 없다.

보통 국내에서 와인 초심자에게 권하는 와인은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쉬라즈, 말벡, 샤르도네, 소비뇽 블랑 등 품종이다. 이 게임에는 그중 샤르도네만 등장하니 몰입감이 다소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할까.

▲ 작중 배경이 배경인 터라 카쇼, 쉬라즈 없이 저 여섯 품종만 있는 게 이해는 가지만 아쉽다

물론 랑게 지역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지역에서 나는 대표적 품종들이 잘 알려지지 않을까 기대감에 찰지 모르겠다. 여기에 나온 품종만 해도 이탈리아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구미가 당길 요소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와인의 왕, 여왕이라고도 불리는 바롤로와 바르바레스코가 네비올로로 만든 대표적인 와인 종류이기도 하고 그 외에 코르테제 품종으로 만든 가비에 약간 생소하지만 특유의 풍미가 있는 아르네이스 등등. 애호가라면 눈이 갈 수밖에 없다.

애석하게도 아직 이 게임은 그 정도의 깊이는 보여주지 못한다. 품종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제조법도 최대한 간소화시켰기 때문이다. 저장 탱크나 효모, 오크통도 기껏해야 세 가지 중 하나 정도 고르는 수준이고, 숙성 기간만 조금 조율하는 정도에 그쳤다. 점점 더 기술을 연구할수록 할 수 있는 게 많아진다고 했지만, 실제 플레이에서 무언가 바뀌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하다못해 기술 연구 중에 블렌딩이라도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지만, 어떤 특정 포도 품종의 특성이 잘 드러나느냐에 따라 점수가 갈리는 시스템이라 이를 구현하기는 쉽지 않아 보이긴 했다.

▲ 해당 포도 품종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느냐 못 살리느냐에 따라

▲ 평가가 갈린다

그나마 도매상에 해당하는 특수 주문을 처리하면 평판 레벨이 오르고, 특수 주문을 처리 못 하면 평판 레벨이 내려가는 방식이라 일정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맛은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평판을 올려서 어느 정도 테크를 올린 뒤 나가는 지출을 메우는 과정은 쉽지도 않고, 보람도 없었다.

와인 평점과 평판을 올려봤자 와인 가격이 20파운드, 한국어 번역에서는 20원을 넘어가는 일이 드물어 수지타산이 맞질 않았다. 지출은 천 단위로 매 턴마다 꼬박꼬박 나가는 상황이니, 어지간히 팔지 않고서는 여력이 날 수 없는 구조랄까. 다행히 평가가 낮아졌다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가격이 다운되지도 않지만, 잘한다고 해서 크게 올라가지도 않으니 초보 티를 벗고 나면 오히려 이런 요소가 마이너스로 작용했다.

▲ 평판과 평점을 올려도 값은 그다지 뛰지도 않고, 지출 처리에만 급급해진다

그나마 대출이 좀 싸게 먹히는 편이니 땡겨와서 이것저것 팔다보면 자금이 축적되고, 전시회와 생산량 테크가 다 차면 주문 단위가 달라져서 여윳돈도 생기긴 한다. 그러나 그 자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있다. 작중 배경이 이탈리아, 거기다가 DOC 등급 생산지인 랑게 지역이니 그 등급 조건을 맞춘 와인을 생산해본다던가 그런 특별한 목표도 주어질 법도 하지만, 그런 건 없다. 그냥 와인 만들다 보면 한 시간만에 갑자기 엔딩이 나오고 그 뒤로는 아무 것도 없다. 단순히 만들고 팔고만 계속하고 어떤 이벤트도 크게 이어지지 않는 구간이 꽤 길게 이어진다.

아마 와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면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여타 시뮬레이션 게임의 요소로 치환하면 공감이 갈 것이다. 매번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변수는 크지 않은데 거기에 뭔가 색다른 시도조차 아예 원천봉쇄되어있고 드라마틱한 돌발 이벤트도 없는 데다가 뭔가 목표도 뚜렷이 없으니, 귀찮은 반복 노동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된다고 할까.



폰트가 깨지고 중국어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심각한 번역 상태


물론 게임이 익숙해지다 못해 고인물이 되면 자연스럽게 반복노동처럼 느껴지고, 현자 타임이 오기 마련이다. 헌드레드 데이즈는 그러기까지 걸리는 시기가 비교적 짧은 것뿐, 그 전까지는 어쨌든 즐길 거리가 있다. 와인에 관심이 하나도 없던 평범한 회사원 엠마가 갑자기 와이너리의 주인공이 돼서 와이너리를 키워나가는 이야기는 짧고 간결한 데다가,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봤을 귀농의 로망이 느껴진다. 앞서 언급했듯 와인을 만드는 과정을 핵심만 간단하게, 그러면서도 순서에 맞게 고려하게끔 퍼즐 식으로 잘 짠 구성도 인상 깊었다.

다만 이런 감상은 앞서 얘기했던 단점을 차마 느끼기도 전에 터져나가기 시작한다. 그것도 한국어로 설정을 바꾸자마자 바로 불길함이 엄습한다. 번역부터가 번역기를 돌린 듯 딱딱하고 어색한 데다가, 인물들의 대사를 살펴보면 받침이 들어간 글자 몇 개가 심심치 않게 깨져있으니 말이다. 그나마 게임을 하면서 옵션이나 설명 같은 건 멀쩡하니 플레이할 때 지장은 없다만, 스토리 모드를 진행할 때 곳곳에 보이는 네모들은 신경이 굉장히 거슬린다.

그것뿐이었으면 모를까 갑자기 폰트가 흔들리는 현상도 보인다. 그렇게 흔들리는 한글들 사이에 <> 안에 영문, 그리고 /까지 있는 걸 봐서는 일부 글자를 의도적으로 흔들리게 한 것 같은데, 문장 전체가 흔들리면서 가독성이 현저히 떨어졌다. 거기다가 갑자기 중국어가 튀어나온다. 놀라서 확인해 보니 한국어로 설정된 게 맞다. 메뉴는 정확히 한국어로 나오는데, 등장인물 대사는 중국어로 나올 때의 그 당혹감과 개발사에 대한 불신감이 이루 말하기 어렵다고 할까. 번역 어색한 거야 번역을 맡긴 곳에서 역량이 부족해서 그렇다 쳐도, 폰트가 깨진 거나 다른 언어가 출력되는 걸 제대로 확인 안 한 건 개발사의 잘못이니 말이다.

▲ 번역은 어색하지만 중요한 부분에서 폰트가 깨지진 않았다

▲ 그런데 갑자기 왜 중국어가 ㄷㄷ





보통 와인 하면 다들 접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곤 한다. 워낙 다양한 품종과 맛, 천차만별인 가격, 나라별로 다른 등급체계, 거기다가 각종 미디어를 타고 나오면서 덧씌워진 우아한 이미지까지. 마음 편히 술 마시고 싶은 사람이면 도통 손을 대기가 어렵다.

헌드레드 데이즈는 와인의 그런 허세 넘치는 요소는 쫙 빼고, 심플하게 와인을 만들고 와이너리를 경영하는 요소를 핵심만 담아내는 시도를 보였다. 퍼즐과 턴제를 와인 제조 과정에 도입해서 업무를 체계적으로 처리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와인을 간단하게 만들어낸다는 게임 방식은 확실히 훌륭했다. 매 턴마다 해야 할 일이 많은 편은 아니라서 단순해 보였지만, 그 업무가 쌓이면서 처리 프로세스가 종종 밀리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렇게 되면 와인 평점에도 영향을 미치니, 은근히 신경 쓰고 긴장감을 유지하는 맛이 있었다.

▲ 쉽다고 하지만 비수기 지출 생각 안 하면 언제라도 금방 망할 수 있으니 주의

그러나 플레이를 하면 할수록 게임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상당히 적었다. 와인을 알면 더욱더 아쉬웠지만, 모른다고 가정해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에 고수익을 노릴 수 있는 수단도 대박의 로망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파산할지도 모르는 위험이 닥치는 것도 아닌 데다가 매번 변수도 거의 동일하다. 그러니 매번 적당히 포도를 키워서 와인을 만들고 파는 행위의 연속이었다. 거기다가 어떤 뚜렷한 목표도 없어서 더욱 더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웠다. 아무리 와인을 연구해서 고평가를 받아도 값을 비싸게 칠 수도 없고 어떤 특별한 등급을 매길 수도 없이 박리다매 일변도만 계속되니 의욕이 꺾인다고 할까.

그나마 짧고 굵게 정해진 턴 내로 목표를 달성하게끔 유도하는 챌린지 모드는 이 게임의 특성에 딱 맞춘 스타일이라서 괜찮았다. 그러나 나머지 모드는 하면 할수록 아쉬움이 짙게 남다 못해 쓴 뒷맛이 남았다. 특히 스토리 모드는 더욱 그랬다. 와이너리 이어받아서 나만의 와이너리로 가꿔볼까 하는데, 말도 이상하게 하다가 갑작스레 폰트가 깨지다 못해 중국어가 튀어나오고 흔들리기까지 하면 흥이 깨지기 일쑤다. 더군다나 이야기도 다 안 끝난 것 같은데 한 시간 정도 지난 뒤 갑자기 엔딩 크레딧이 나올 줄이야. 저가 와인 중 퀄리티가 떨어지는 와인은 종종 끝맛이 오줌처럼 시금털털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딱 그런 느낌이었다.

▲ 왜 갑자기 글씨는 흔들리는 건지

▲ 한 시간 정도밖에 안 했는데 벌써 엔딩 크레딧이 뜰 줄이야

2만 6천 원, 지금은 할인해서 2만 3,400원인 이 게임 가격을 와인에 대입해보면 더욱더 입이 쓰다. 이 돈이면 괜찮은 칠레산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호주산 쉬라즈를 사고도 남는다. 이 게임이 이탈리아 와인을 주로 다루고 있으니 이탈리아 와인으로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신의 물방울에 나오는 요리오라던가, 주로 나오는 품종까지 맞춰서 보면 미켈레 끼아를로 바르베라 다스티를 살 수 있는 가격이다.

물론 그 즐거움은 마시는 순간에 끝나니 아쉽겠지만, 이 게임도 길게 오래도록 여운을 즐기는 유형은 아니다보니 이런 비유를 들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만약 와이너리를 오래도록 운영하면서 최고의 와인을 만들어보는 목표를 더 뚜렷하게 제시했다거나 혹은 이것저것 놀거리를 더 챙겼다면 모를까, 지금은 아직 숙성이 덜 된 상태에서 황급히 내놓은 느낌이다.

▲ 와인을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아쉬움도 더 큰 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