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스포츠 프로게이머 중에는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오는 이들이 있다. 은퇴 후 한동안 공백기가 있었기에 돌아온 이들의 말로는 대부분 아쉬웠다. 아무리 과거에 뛰어나다고 평가받았던 선수라도 돌아와서 제 기량을 찾기 쉽지 않았고, '그러게 왜 성급하게 은퇴했냐'는 반응에 부담을 느끼며 결국 다시 무대를 떠나곤 했다.

그런데 지난 8일 진행한 카트라이더 리그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경기가 연이어 나왔다. 은퇴 후 리그로 복귀한 정승하가 팀전에서 처음으로 결승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뤄냈고, 시즌 휴식기를 가졌던 유창현이 개인전에서 우승을 거둔 것이다. 꾸준히 달려온 선수들을 넘어서기 위해 정승하-유창현이 했을 노력, 그리고 다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식었던 마음가짐의 열기를 끌어올리는 과정을 생각하니 더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좋은 성적을 내기에 앞서 두 선수는 좌절에서 출발했다. 정승하는 "좋은 팀도 가기 힘들고 내가 에이스로 팀을 이끌기도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며 과거 은퇴의 이유를 들었다. 복귀 직후 아프리카 프릭스에서 뛰던 시절 역시 정승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앞서는 선수였다. "팀원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내가 못 했는데, 팀원이 잘해서 승리했다"는 일관된 답변을 남기기도 했다. 정승하 역시 여타 은퇴를 번복한 선수처럼 될 것 같은 느낌을 줄 때도 있었다.

유창현은 리그를 달려오는 과정에서 많이 지쳐있었다. 정규 시즌 1위로 4강에 진출했는데, 코로나-19로 리그 진행이 잠정 중단되면서 연습의 흐름을 잡지 못했다. 유창현은 "연습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며 솔직한 휴식의 이유를 들었다. 게다가, 힘겹게 얻은 개인전 우승의 기회는 카트 '황제' 문호준이라는 벽에 좌절하며 우승 트로피를 코앞에서 놓쳤다. 그렇게 확실한 마무리 없이 리그를 떠났던 두 선수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랬던 두 선수는 자신들의 가치를 알아주는 리더와 함께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정승하는 작년 여름 박인수라는 샌드박스 리더의 러브 콜을 받았고, 유창현은 올해 한화생명e스포츠 문호준 감독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결승 주자가 되기까지 두 선수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감이었다. 박인수는 정승하가 합류했을 당시 "승하가 자존감만 높이면 더 잘할 수 있다. 연습할 때도 자신 있게 하라고 말을 많이 한다. 지금은 자존감을 많이 회복한 상태로 조금만 더 올라오면 충분히 제 기량을 발휘할 것이다"며 긍정적인 기운을 북돋아 주는 리더 역할을 했다. 이에 정승하 역시 "샌드박스에서 연습하면 은퇴 전에 결승전은 꼭 갈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실력으로 화답했다.

▲ 개인전 결승 1:1 상대에서 같은 팀 된 문호준-유창현

유창현 역시 문호준 감독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은 선수다. 유창현은 복귀 후 경기에서 연습과 달리 기본적인 주행에서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문호준은 결승 진출을 앞둔 에이스 결정전에 유창현을 내보내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당시 "너가 다 이길 수 있다"는 문호준의 말에 큰 자신감을 얻었다는 유창현은 해당 경기를 승리로 이끌고, 개인전 우승까지 독보적인 속도로 달려나갔다.

자신감이 붙은 정승하는 결승 진출전, 유창현은 개인전 결승에서 제 기량을 마음껏 뽐냈다. 한동안 팀을 위해 안정적인 주행과 수비적인 플레이를 중점에 뒀던 두 선수였지만, 이 날은 달랐다. 작은 차이로 승부가 결정 나는 무대에서 자신만의 공격적인 스타일을 살리는 모습이었다. 과감한 몸 싸움으로 승부를 벌이는 두 선수의 플레이는 해당 경기를 명경기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카트 리그는 대표 스타인 문호준이 선수 생활을 그만두면서, 리그의 인기가 이어질 수 있을지에 관한 우려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정승하와 유창현과 같은 선수들의 화려한 복귀를 보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봤다. 그 뒤에 이들의 잠재력을 최대로 끌어낼 수 있는 박인수-문호준 같은 리더가 있었다. 이들은 카트 리그와 팀의 발전에 진심이었기에 리그를 떠난 선수들의 가능성마저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카트 리그 2021 시즌1은 박인수-정승하의 샌드박스와 문호준-유창현의 한화생명e스포츠의 15일 팀전 결승전만 남은 상황이다. 정승하와 유창현 모두 복귀 후 이 자리에 오기까지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온 만큼 승리가 절실하다. 개인전에서 아쉽게 준우승을 거둔 박인수, 감독으로 최초 우승 타이틀을 노리는 문호준까지. 피할 수 없는 결승전에서 마주친 두 팀의 대결에서 최고의 명경기가 나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