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어드벤처의 핵심만 간결히 담아 써내려간 소시민의 고뇌



누구나 어렸을 적엔 한 번쯤은 정의와 규율을 지키는 히어로를 꿈꿔봤을 것이다. 물론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금세 허황된 꿈임을 깨닫고 현실에 순응하며 살다보면, 히어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이 쏠리곤 한다. 잘못된 것임을 알지만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선택했다는 조무래기들과 공포에 무력한 이들, 반면에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을 알면서도 정의감에 히어로를 돕거나 악에 저항하는 시민 등등.

버프스튜디오의 신작 '히어로 아닙니다'는 제목만 봐서는 주인공이 히어로가 되서 겸손하게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겠지만, 히어로의 주변에서 고뇌하고 갈등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작품이다. 쉴 새 없이 내리치는 비에 감성에 젖어있던 주말, 한 번 읽어보자는 느낌으로 받아본 이 게임은 간결하게 다듬은 감성으로 가슴 한 켠을 후벼파는 힘이 있었다.


게임명 : 히어로 아닙니다(Not Exactly a Hero)
장르명 : 비주얼 노벨, 어드벤처
출시일 : 2021. 4.13.
개발사 : 버프스튜디오
서비스 : 버프스튜디오.
플랫폼 : 모바일



핵심만 정갈하게 담아낸 텍스트 어드벤처


'히어로 아닙니다'의 주인공 라일리는 불법 약물 중독으로 어머니가 사망한 뒤 히어로를 돕는 메인테이너 B-12 요원으로 일하고 있는 평범한 청년이다. 명색이 요원이라고 하지만 지원받은 물자라고 해봐야 신발, 후줄근한 가방, 통신이 가능한 인이어 오퍼레이팅 디바이스밖에 없다. 주변 인물들도 협조적이지도 않다. 능력은 확실하지만 피해는 생각도 않는 히어로 플레어에 매일 쪼아대는 A팀 치프, 바락바락 대들어대는 명문대 출신 C팀 신입까지 고생길이 훤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도시 곳곳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SMAKS를 저지하기 위해 서포트 업무를 진행해야 한다.

처량한 신세의 평범한 소시민 주인공이 자신이 짊어지기 버거운 일을 두고 갈등하는 내용은 얼핏 보면 특별할 것이 없어보인다. 단순히 소개글로만 봐서는 "뭐가 다른데?"라는 말이 나오기 십상이다. 공감을 얻기도 쉽지만, 리스크도 굉장히 큰 소재다. 조금만 그 처량한 신세에 대한 한탄이 길어져도 너만 그러냐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 뭔가 거창하긴 하지만 그냥 평범한 신발에 가방, 블루투스 이어폰과 다를 게...

심적 갈등에 대한 묘사가 조금만 더 가미되거나 무게를 잡는 시간이 길어져도 비슷한 반응이 터져나온다. 이젠 거의 사어가 되어버린 "센치하다"라는 말이 무덤가에서 기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너무 가볍기만 하면 맛이 살지 않으니 난제일 수밖에 없다.

그런 밸런스를 '히어로 아닙니다'는 비주얼 노벨류에서 흔히 보일 법한 서술과 심리 묘사 파트를 거의 다 쳐내버리고, 인물 간의 대화를 SNS나 메신저 채팅처럼 배치해 바로 눈에 들어오게끔 하면서 잡아나갔다. 이미 버프스튜디오의 전작 '세븐데이즈', '아르고의 선택' 등에서 선보였던 이 방법은 이번에도 효과가 있었다. 메신저에 텍스트가 길어지면 사람들이 안 읽게 되지 않던가. 그걸 의식해서 문장을 최대한 압축하는 한편 대화를 티키타카하는 식으로 구성하면서 사실적인 대화의 느낌을 살렸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술술 넘어가더라도 전체적인 볼륨이나 이야기 흐름이 지리멸렬하다면 문제겠지만, '히어로 아닙니다'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해 총 7개의 챕터에서 각각 하나의 테마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밀도있게 그려냈다. 볼륨도 각 챕터당 10분 안쪽으로 읽을 수 있게끔 배분해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고 몰입하게끔 설계했다.

또한 텍스트 어드벤처인 만큼 유저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가 바뀌는데, 그때마다 앞에 어떤 선택이 이야기 진행에 영향을 미쳤는지 꾸준히 힌트를 주면서 다회차 플레이의 부담감을 줄였다. 그러다가 일부 파트는 유저의 그간 선택의 결과를 종합해 피할 수 없는 결론을 내면서 그간의 이야기 흐름과 선택에 대해 다시금 곱씹어보게 하는 텍스트 어드벤처 특유의 묘미도 살려냈다.

여기에 챕터 중간중간 M.I.P 포인트를 공지하는 것 외에도 하단의 업적 및 앨범, 인물, 타임라인 등을 통해서 플레이하는 와중에도 언제든지 자신이 가지 못했던 루트에 대한 힌트를 얻는 것도 가능했다. 타임라인의 아이콘 해금여부뿐만 아니라 타임라인 아이콘을 터치해보면 그 아이콘이 어떤 파트에서 수집이 됐나 알 수 있었고, 타임라인창의 체크포인트로 넘어가서 반복 구간을 최대한 피하고 다회차 플레이를 진행할 수 있었다.

▲ 하단 메뉴를 통해 루트 선택의 힌트를 언제든지 볼 수 있고

▲ 체크포인트를 타고 언제든 주요 분기점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질질 끌지 않는 이야기


빠르게 읽으면서 넘어가기도 쉽고, 선택이 미치는 결과를 되짚으면서 다회차 플레이의 힌트를 제공하는 등 구성이 잘 갖춰진 것도 좋지만 텍스트 어드벤처의 완성도는 결국 이야기의 힘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텍스트 어드벤처는 그 어떤 장르보다도 호불호가 갈리는 장르다. 스토리 비중에 대한 견해 차이부터 스타일, 장르, 문체 모든 것이 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에 취향 차이라는 그 벽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깊게 이야기하다보면 무의식중에 스포일러까지 터지게 되니, 여간 곤란한 장르가 아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히어로 아닙니다'는 화려한 명언이나 눈을 사로잡을 CG는 없다. 그렇지만 일상적인 톤으로 말하는 대화 사이에, 그간 불편해서 의식적으로 피해왔던 질문들이 계속 던져진다. 이야기를 진행하다보면 메인테이너와 도시의 히어로 '플레어' 외에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려운 와중에도 희망을 갖고 일하는 우버 기사와 외국에서 와서 말도 요리도 다 서툴어서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에만 바쁜 푸드 트럭 사장과 마주치게 된다.

▲ 각기 다른 6명이 자아내는 이야기는 길게 늘어지지 않고 짤막하고 임팩트 있게 진행된다

임무에 휘말리거나 일상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그들과의 대화에서 던져지는 짤막한 선택지와 질문은 이야기 흐름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도 작품의 핵심 주제를 예리하게 찌른다. 그렇다고 매번 주제만 팍팍 던져대는 것이 아니라, 간혹 패러디도 섞으면서 긴장을 푸는 묘도 보여주면서 말이다.

바뀌지 않을 걸 알면서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인가, 나라는 작은 존재가 세상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일상에서 털어놨다간 괜히 폼잡는다고 핀잔 들을 이야기들이 선택지뿐만 아니라 인물의 짤막한 대화가 오가는 사이에 계속 생각해보게 된다고 할까. 그런 것을 느끼지 않더라도, 계속 상단 해금창에서 무언가가 자꾸 해제된다는 문구가 뜨고 M.I.P 포인트가 추가 혹은 차감되는 게 보이는 터라 앞으로의 진행 및 뒷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궁금해진다. 아울러 선택에 따라 이야기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만큼, 이전에 선택하지 못한 분기의 뒷이야기를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게끔 했다.



호불호가 갈릴 티켓 모델


다만 이런 평가에 일각에서는 다소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런 의문이 드는 이유는 풀프라이스 게임이 아닌, 부분유료화 모델에 대한 반감 때문일 것이다. 최근 텍스트 어드벤처라는 장르도 부분유료화로 나오기 시작했지만, 아무래도 아주 오래 전부터 패키지로 접해왔던 대표적인 장르이기 때문일 거다. 머리로는 이해 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히어로 아닙니다'의 과금 모델은 행동력과 비슷하다. 선택지를 고를 때마다 티켓을 소모하고, 그 티켓을 다 쓰면 새로 보충해야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이다. 여기에 인앱 광고 기반 BM이 섞였다. 광고 제거 옵션을 구매하지 않으면 하단에 광고 배너가 계속 붙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도중에 광고가 노출되는 식이다. 혹은 티켓을 유료 결제하지 않아도 광고를 한 번 볼 때마다 40장씩 얻을 수 있게끔 했다.

▲ 이야기가 끊어지면? 티켓이 필요하다

인앱 광고가 있다고는 하나 초반부터 광고가 무작정 붙는 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흘러가고 좀 몰입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점차 광고가 노출되는 만큼 진입 자체는 까다롭지 않았다. 다만 챕터 중간, 페이드 아웃되는 연출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등장해버리는 광고는 좀 섣부른 감이 있었다. 어떻게 될까 두근거리는 감상이 머리로 흘러들어가기도 전에 눈으로 광고를 먼저 접해버리니, 흥이 조금 식어버린다고 할까. 다만 그 단계까지 이야기를 지켜봤으면, 전면 광고와 배너 제거 유료 옵션 정도는 결제할 법하게 이야기를 구성했으니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다만 티켓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매번 선택을 할 때마다 5개씩 나가고 이야기를 한 번 쭉 훑어보려면 티켓이 600, 700개 가량은 소모되는 터라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고 할까. 더군다나 꽝인 선택지를 한 번이라도 고르면 티켓이 더 쭉쭉 빠져나가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스트레스가 찾아오곤 한다. 다회차 플레이를 하면 할수록 체크포인트를 찾아서 쏙쏙 플레이하는 것이 가능하니 지출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그때도 티켓은 계속 소모되니 그간 클리어했던 루트를 다시 보고 싶어하는 유저라면 조금은 아쉽다고 할까.

▲ 광고 제거 옵션을 결제 안 했다면 챕터 넘어갈 때마다 마음의 준비는 해두자





미디어와 콘텐츠의 홍수라는 표현이 진부하게 느껴질 만큼, 지금 시대에는 이야기들이 차고 넘친다. 그런 상황에서도 예전처럼 소설책처럼 진득히 읽어가며 텍스트를 음미하는 텍스트 어드벤처의 묘미를 즐기는 유저들이 있지만, 이젠 이조차도 유튜브를 통해서 핵심만 보거나 혹은 정말 중요하다 싶은 파트만 직접 가서 보는 게 가능해진 시대 아니던가.

버프스튜디오는 그런 흐름에 맞춰 최대한 이야기를 압축하고, 눈에 들어오기 쉽도록 메신저 형태로 UI와 텍스트를 배치해 가독성을 높이는 시도를 꾸준히 이어왔다. 이번 '히어로 아닙니다' 역시도 그런 틀에 맞춰서 평범한 사람들이 특출난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뇌하는 과정을 짧고 굵게 담아냈다.

비록 장르 특성상 부분유료화 모델이 낯설게 느껴지다보니, 손이 잘 안 갈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모바일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받은 뒤, 마음에 들면 풀프라이스 비주얼 노벨 하나 결제할 수 있다는 느낌으로 접근해보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눈에 띄는 화려함이 없어서 한 눈에 들어오진 않더라도, 짧고 압축적으로 담아낸 구성과 기능 그리고 이야기의 삼위일체는 꽤나 사람을 끌어당기는 맛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