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링북'처럼 즐기는 젤다 스타일 어드벤처


매일 집에 계시는 부모님께 소소한 취미거리 삼으시라고 '컬러링북'을 권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비어있는 공간에 마음껏 색을 칠하는 것만으로도 심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고, 여러모로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힐링 활동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거든요.

이왕하는거 제대로 해야겠다 싶어 48색 색연필부터 물을 묻혀 수채화 효과를 줄 수 있는 크레파스, 터치마카, 컬러 사인펜, 전문가용 오일 파스텔까지 두루두루 갖추고, 쉽게 질리지 않으시도록 꽃, 풍경, 음식, 그리고 각종 기하학적 무늬가 그려진 여러 종류의 컬러링북을 구매해서 선물 드렸습니다.

가끔 채색 도구와 책을 꺼내 즐겁게 색칠을 하시는 부모님을 보고, 나도 한번 도전 해볼까 하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전까지는 이미 다 완성된 스케치 위에 색을 칠하는 것만으로 무슨 힐링이 되겠느냐는 생각에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거든요.

당초 예상과는 달리, 유치원 대신 다녔던 미술학원 시절의 옛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르고, 특별한 가이드 없이 내 마음대로 빈 공간을 메꿔나간다는 행위 자체가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페이지를 채워나갈 때마다 더해지는 달성감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구요.

어쩌면 게임과는 관계가 먼 이야기를 서두에 꺼낸 이유는, 바로 오늘 이야기할 신작 '치커리: 컬러풀 테일즈(이하 치커리)'가 마치 컬러링북을 채우는 것 같은 매력을 담은 어드벤처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게임명 : Chicory: A Colorful Tale
장르명 : 어드벤처
출시일 : 2021.06.11.
개발사 : Greg Lobanov
서비스 : Finji
플랫폼 : PC, PS4, PS5

관련 링크: 'Chicory: A Colorful Tale' 오픈크리틱 페이지


"색칠 공부로 힐링하는 게임"


치커리의 첫인상은 '컬러링북처럼 빈 공간에 색을 칠하며 힐링하는 게임'이라는 이미지였습니다. 번거롭게 여러 가지 채색 도구나 종이 책을 구매하지 않더라도, 쉽게 색칠을 해볼 수 있는 시뮬레이터 게임 이미지였죠. 실제로 플레이해본 치커리는 '정말 마음껏 색을 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컬러링 시뮬레이터 같은 게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건 게임의 매력 중 일부에 불과하지만요.

게임은 어떤 이유 탓에 모든 색이 사라져 무채색만 남은 세상에서, 마법의 붓으로 세계를 관장하는 관리자 토끼 '치커리'를 대신하여 세상의 색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플레이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게임 시작부터 끝까지 플레이어가 마주하게 되는 모든 배경은 아무런 색도 없는 무채색의 세상이고, 이 세상에 색을 되돌리는 것은 마법의 붓을 손에 쥔 플레이어의 손길뿐입니다.

어드벤처 게임에서 이야기를 진행하며 강력한 무기나 방어구, 특수한 능력을 지닌 액세서리 같은 것을 획득한다면, 치커리에서는 다양한 '그리기 도구'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윈도우 그림판이나 포토샵에 있는 다양한 도구들처럼요. 그중에는 스프레이 효과를 주는 것이나 점선을 그리기 편한 도구도 있고, 터치 한 번으로 하나의 레이어를 전부 채워버릴 수 있는 '페인트통' 도구도 존재합니다. 게임을 진행하면서 획득할 수 있는 다양한 그리기 도구를 활용해 게임 맵 전체를 나만의 캔버스처럼 활용하며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셈이죠.

그림을 잘 못 그린다고 해서 미리 겁낼 필요도 없습니다. 치커리의 그림 그리기는 입시 미술 같은 딱딱한 그림이 아니거든요. 어떻게 그리고 어떤 조합으로 색을 채우던, 게임 속에 만나게 되는 100종 이상의 동물 NPC들은 플레이어의 터치 하나하나를 존중해주며, 그 자체에 가치가 있다고 호평해줍니다.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쓸 것 없이, 컬러링북을 채워나가듯 게임 속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 이것이 이 게임을 즐기는 방법이자, 치커리라는 게임이 가진 첫 번째 매력입니다.

▲ 색상이 사라진 세계, 모든 맵이 '캔버스'가 됩니다

▲ 강력한 장비 대신, 다양한 '브러쉬 스타일'로 무장할 수 있습니다

▲ '캔버스'가 되는 게임 속 전체 맵은 상상 이상으로 넓고, 다양합니다



"기발한 퍼즐과 액션으로 가득한 어드벤처 게임"

'치커리'는 비어있는 맵에 색만 칠하는, 단순한 컬러링북 게임이 아닙니다. 색을 칠하는 것은 그저 보조적인 것일 뿐, 진짜 매력은 넓은 맵을 돌아보며 만나볼 수 있는 다양한 모험과 퍼즐에 있습니다.

실제로 비어있는 맵을 공백없이 모두 채우며 플레이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토리 진행, 그리고 퍼즐에 활용되는 부분에만 붓으로 짧은 선을 긋거나 점을 찍는 것만으로도 엔딩까지 진행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거든요. 물론, 게임을 하다보면 왠지 모를 '강박 센서'가 발동되어 모든 맵 구석구석을 어떻게든 색으로 채우고 지나가게 되긴 하더라고요. 그 누구도 강요하진 않았지만 말이죠.

▲ 왠지 보고 있으면 불편해지는 이미지 (1)

'치커리'의 게임 플레이는 2D 매트로배니아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세상에 색이 사라지게 된 원인을 찾아 모험을 이어가다 보면, 플레이어는 다양한 탐험 스킬들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물감이 되어 좁은 통로를 이동할 수 있게 되거나, 수영하고, 점프하고, 절벽을 오를 수 있게 되는 식이죠. 이러한 탐험 스킬을 익힌 후에는 전에 지나가지 못하는 영역까지 이동할 수 있게 되고, 탐험할 수 있는 영역은 점점 더 넓어지게 됩니다.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지역을 다시 방문해서 숨겨진 콜렉터블 아이템을 찾고, 새로운 코스튬을 획득해 캐릭터를 꾸밀 때는 마치 2D 액션 어드벤처 장르로 출시된 '젤다의 전설' 시리즈를 플레이하는 것 같은, 각별한 모험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보통 왔던 지역을 다시 방문하라면 짜증이 먼저 밀려오기 마련이지만, 색을 칠하고 그림을 그리며 매번 새로운 느낌으로 맵을 탐험할 수 있다 보니, 이러한 과정조차도 즐겁게 느껴졌습니다.

매 챕터마다 한 번씩 등장하는 보스와의 전투는 자칫 늘어질 수 있는 게임의 템포에 긴장감을 더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한동안 잔잔한 색으로만 채워졌던 게임은 보스전에 들어서며 어둡고 자극적인 색상으로 탈바꿈하는데요. 보스마다 플레이어를 공격하는 기믹과 이에 따른 대처법이 모두 다르므로, 액션과 컨트롤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보스전을 마치고 나면 점프나 수영, 절벽 오르기와 같은 새로운 능력이 보상이 주어지니, 클리어했을 때의 달성감도 높은 편이죠.

결국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마음껏 맵을 꾸미고, 맵 곳곳에 숨어있는 퍼즐을 해결해 코스튬이나 잡동사니 같은 콜렉터블 아이템을 수집하고, 공감할 수 있는 매력적인 스토리를 진행하며 액션의 재미가 담긴 보스전을 플레이하고,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 탐험할 수 있는 범위를 계속해서 넓혀가는 것이 '치커리'라는 게임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재미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새로운 스킬을 획득한 뒤엔 그 스킬을 활용해볼 수 있는 퍼즐이 등장합니다

▲ 수영을 배운 뒤 맵 끝자락의 외딴 섬에도 방문해보고,

▲ 매번 다른 방식의 퍼즐을 푸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 '맛보기' 수준의 초반 이후에는 다양한 기믹의 강력한 보스들이 차례차례 등장합니다



"부담 없이, 누구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캐주얼 게임"


치커리는 다양한 매력의 콘텐츠로 가득한 게임이면서, 동시에 누구나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도록 여러 편의 기능과 재미 요소들로 무장한 '부담 없는 게임'이기도 합니다. 컬러링북에 색을 칠하듯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말이죠.

맵 곳곳에 있는 '전화 부스'는 치커리의 편의 기능이 얼마나 세심하게 갖춰져 있는지 가장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플레이어 캐릭터는 언제나 전화 부스에 들러 부모님께 전화를 걸 수 있고, 주인공의 부모님은 앞으로 플레이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언제든 자세하게 조언해줍니다. 자식 걱정이 남다른 아버지의 경우 "현재 맵에서 아래로 두 번, 오른쪽으로 한번, 위로 한번 가면 다음 목표까지 갈 수 있다"라고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세밀하게 조언해줄 정도죠. 10시간은 가볍게 넘기는 넉넉한 볼륨의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길을 잃고 시간을 낭비한 적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 길을 잃거나 목표 없이 헤맬 걱정은 전혀 없습니다

공들여 색을 칠하고, 그림을 그려 맵을 꾸몄다면, 게임 화면을 GIF 파일로 만들어 평생 소장할 수도 있습니다. 별도의 프로그램을 설치하지 않더라도 게임 내에서 GIF 생성 기능을 제공하거든요. 그림을 완성하기까지의 작업 과정이 모두 담기는 것은 물론, 자신의 작품을 친구들과 공유하기 편하도록 알아서 최적화까지 되니 부담도 덜합니다.

직접 꾸민 GIF 이미지로 친구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면, 게임 내에서 자체적으로 제공되는 '코옵 플레이' 기능을 통해 친구와 함께 퍼즐을 풀고, 게임을 플레이할 수도 있습니다. 스팀으로 한다면 '리모트 플레이 투게더' 기능으로 설치부담 없이 모든 게임 플레이를 친구와 함께할 수 있죠. 친구와 머리를 맞대어 같이 어려운 퍼즐을 풀거나, 아니면 아무런 제약 없이 서로 그림을 그리며 노는 것도 '치커리'를 더욱 재미있게 즐기는 방법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맵 곳곳에 숨어있는 새끼 고양이를 찾아 부모님 품으로 돌려보내거나,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에 버려져 있는 쓰레기를 수거하고, 맵 곳곳에서 획득한 코스튬 아이템으로 나만의 멋진 패션을 만들고, 서브 퀘스트 보상으로 획득한 가구들로 인테리어에 도전해볼 수도 있습니다. 스토리를 진행하는 도중에도, 그리고 모든 스토리를 마무리한 뒤에도 플레이어가 게임 속 세상을 만끽할 수 있도록, 게임 속에 캐주얼하게 즐길 수 있는 미니 게임들을 가득 채워둔 셈이죠. 플레이할 수 있는 콘텐츠들의 볼륨에 비해 2만 원이라는 게임 가격은 너무 저렴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 코스튬 종류도 다양하고, 색상도 내 취향껏 자유자재로~

▲ 퀘스트로 획득한 가구 배치까지, 소소하게 즐길 거리가 가득합니다




'치커리: 컬러풀 테일(Chicory: A Colorful Tale)'은 전체적으로 단점을 짚어내기 어려울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작품입니다. 저렴한 가격 대비 놀라울 정도로 풍부한 게임 볼륨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어드벤처 장르 특성상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퍼즐과 레벨 디자인에서 흠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내러티브와 게임 플레이도 거슬리는 부분 없이 유기적으로 잘 이어져 있다고 느껴졌고요.

어떻게든 흠을 짚어내자면, 퍼즐 풀이에서 두드러지는 다소 아쉬운 가시성 문제와 조작감 정도가 있겠습니다. 맵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유저가 직접 색을 칠해야하는 게임 특성 때문에 지형의 고저차 같은 것이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러한 맵에서 점프 조작을 하다보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버리던가, 가끔 구조물 사이에 캐릭터가 걸쳐지는 경우도 발생했습니다. 물론 완전히 끼어서 게임을 다시 시작해야하는 불상사로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마냥 유쾌한 경험이라고 할 순 없었죠.

약간의 아쉬운 부분을 모두 고려하더라도 2만 원대에 플레이할 수 있는 인디 게임을 모두 추려놓고 봤을 때, '치커리'는 최상단에 배치할 수 있는 수작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셀레스트와 마인크래프트의 곡을 만든 작곡가 Lena Raine의 OST, 보고 있으면 절로 힐링되는 아름다운 비주얼, 여기에 고전 젤다 시리즈에서 느낄 수 있었던 2D 감성의 어드벤처를 맛있게 버무려놓은 작품이니, 그 맛이 궁금하신 분은 꼭 직접 플레이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