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재미, 극한의 손맛, 16세기 중갑옷
게임 좀 했다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게임불감증'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게임이 재미가 없어진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 증상인가. 겪어보지 못한 이들이야 "게임불감증같은 건 폐인들이나 느끼는 것 아닌가?"싶겠지만, 엄연히 많은 게이머들이 느끼는 증상이다. 심해질 경우 컴퓨터를 켜 놓고 게임만 깔았다 지웠다를 반복하거나,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뭐 하지?'하는 고민에 잠기는 경우도 생긴다.
물론, 증상인 만큼 치료법도 있다. 마음을 편하게 하고, 가족과의 시간에 에너지를 집중하고, 게임이 아닌 다른 취미 활동을 찾는 등의 행동은 게임불감증에 긍정적 치료 효과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것도, 언제나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끔은 극약 처방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진짜 '더럽게 재미있는' 게임을 하면 된다.
이 무슨 무협지에나 나오던 '이독제독'도 아니고, 술로 술을 풀어버리는 해장술같은 이야기인가 싶겠지만, 이만큼이나 효과가 좋은 방법도 없다. 게임으로 쌓인 지루함을 다른 게임으로 날려버리는 건 게이머들에게 특화된, 여러모로 효율이 검증된 방법이다. 문제는, 이 방법을 쓰려면 그만큼 재미있는 게임이 필요하다는 거다. 신작이 나오길 기다려야 하고, 신작이 없다면, 모르는 게임 중에서 찾아내는데 성공해야 이 방법을 시도라도 해 볼수 있다.
그래서 좋은 게임 하나 알려줄까 한다. '쉬벌리2'라고 아는가? 완전 갓겜이다. 20년의 게이머 생활로 묵어 온 현직 게임 기자의 푹 썩어버린 게임불감증을 칼질 한 번에 찢었다. 앞서 세 문단이나 할애해가며 게임불감증을 설명한 이유가 뭐겠나. 다 '쉬벌리2' 말하려고 밑밥 깐 거다.
게임명 : 쉬벌리2(Chivalry2) | 개발사 : 톤 배너 스튜디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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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링크: '쉬벌리2' 오픈크리틱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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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의 결정체
매번 리뷰의 첫 파트를 장식하는 그래픽 같은 자잘한 건 리뷰쓸 건덕지가 없을 때나 꺼내는 주제니 넣어 두자. 그래픽은 충분히 좋으니 따로 쓸 말이 없다. 1교시는 철학 시간이다. 게임불감증을 느껴본 이들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보았을 주제이니 별로 어렵지는 않다.
'재미'란 무엇일까? 굉장히 본질적이면서도, 언듯 하찮아 보이는 이 의문은 오랫동안 업계 관계자들과 학자들을 괴롭힌 주제이며, 은근 체계적인 연구도 이뤄지고 있는 분야다. 게임업계 종사자라면 라프 코스터의 '재미 이론'은 한 번쯤 들어본 책일 것이다.
다 설명하긴 너무 복잡하니 중요한 내용만 찝어 말하면, 게임 내에서 대부분의 재미는 '성취감'에서 온다. 실력을 갈고 닦아 적을 이겨냈을 때의 재미, 고난 끝에 희귀한 아이템을 얻었을 때의 재미, 지독하게 꼬인 스토리의 결말을 알아냈을 때의 재미 등, 게임에서 추구하는 재미의 기본 골조는 행동 수행과 보상을 통한 성취감에서 온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곡선과 깊이는 게임에 따라 다르다. 어떤 게임은 수행 단계를 무지막지하게 어렵게 만들고, 그만큼 보상을 엄청나게 만들어 두기도 하며, 또 어떤 게임은 중간 중간 보상을 던져주며 게임의 끝으로 게이머를 유인하기도 한다. 뭐가 됐든, 수행 과정 없이 바로 보상을 내놓는 게임들은 쉬워 보이지만 쉽게 질리고, 수행만 있을 뿐 보상이 없는 게임은 '재미없다'라는 평을 듣는다.
'쉬벌리2'는 이 게임 속 재미의 기본 구조를 초 고밀도로 압축해두었다.
"적에게 달려가서 칼을 휘두른다 - 쌓이는 점수와 쪼개지는 적을 보며 미소짓는다"
▲ 달려간다, 휘두른다, 적을 쪼갠다. 쉬벌리2의 재미 공식
이게 쉬벌리2의 핵심이며, 알파이자 오메가다. 쉬벌리2는 최대 64인의 멀티 플레이를 지원하며, 게임에 참여하면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다. 31명의 아군과 32명의 적군이 서로를 향해 돌진하고, 각종 무기를 휘둘러대며, 전장 이곳 저곳에서 다양한 구도의 국지전이 열린다. 1:1에 정신이 팔린 적의 뒤통수를 후려줄 것인지, 치열하게 라인배틀을 하고 있는 전장의 중심에서 창을 찌를 지는 온전히 게이머의 선택이다.
그게 전부다. 게임을 끝내고 모인 골드로 새 갑옷 스킨을 산다거나, 무기를 삐까번쩍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차원의 성취감도 분명 있긴 하지만, 결국 이 게임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여러 사람이 맞물려 싸우는 정신없는 중세 전장에서 상대의 공격을 막고 적을 쪼개버리는 그 맛이다.
게임 내에서도, 이 '손맛'을 강조하기 위한 여러 장치가 드러난다. 무기의 종류와 피격 부위에 따라 팔다리가 날아다니는가 하면, 빠른 공격과 방어 전환을 중시하는 게이머, 그리고 일격필살을 원하는 게이머의 기대에 모두 부응하기 위해 엄청나게 다양한 무기를 준비해 두었다. 예시를 들면, '양손 도끼'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속한 무기만 해도 '데인 액스', '전투 도끼', '전쟁 도끼', '처형인 도끼', '폴액스'까지 다섯 종이 준비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게이머의 '재미'획득 과정을 막는 건 아무것도 없다. 상대가 너무 강하면 돌아서 다른 상대를 찾으면 되고, 공격에 실패하고 일방적으로 당해도 금방 다시 스폰되어 전장에 뛰어들게 된다. 타격음과 이펙트로 갈음되는 이른바 '타격감'은 현존 게임 중 최고 수준. 오죽하면, PvP게임만 하면 이기든 지든 욕을 하던 친구가 한 판 내내 허허롭게 웃으며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볼 정도였다.
지릴 수는 있어도 질릴 수는 없는 게임
그런가 하면, 수행과 보상이라는 게임적 재미 외 다른 형태의 재미 요소도 수준급이다. 코미디 게임에서나 볼 수 있는 얼척없는 재미와, '변수'를 통한 재미도 '쉬벌리2'내에서 부족함 없이 찾아볼 수 있다.
'쉬벌리2'의 게임 규칙은 매우 간단하다. 심플하게 상대를 박살내면서 티켓을 모두 소모하는 측이 패배하는 '데스매치'가 있고, 공격측과 방어측으로 나뉘어 제한 시간 안에 몇 단계로 이뤄진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목표 지향형 전장이 있는데, 규칙은 딱 이 정도이며 그 외에 전장에 놓인 물건이나 오브젝트는 무엇이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게임 내엔 온갖 변수가 요동을 친다. 상대가 던진 말똥에 맞고 철퍼덕 쓰러지는 아군이라던지, 싸우다 질 것 같으니 냅다 무기를 집어던지고 도망치는 적, 교회의 대형 촛대를 들고 서로 영혼의 승부를 겨루는 이들이나 수레바퀴, 통나무 조각, 하다못해 잘린 상대의 머리를 집어던지는 기괴한 플레이까지 하나의 전장에서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하나의 싸움에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쉬벌리는 하나의 전장에서 수십의 싸움이 벌어지고, 그 중에는 상식의 틀을 깨는 기이한 싸움도 꼭 하나씩은 껴 있기 마련이다. 강인한 중세 전사가 되어 쾌도난마로 적의 중앙을 관통하는 활약을 생각하며 게임을 시작했다가도, 중반쯤 이르면 구석에서 말똥을 그러모아 상대의 얼굴에 던지는 기괴한 플레이를 보게 된다. 아마 이런 걸 보고 '더럽게 재밌다'라는 표현을 하게 되는 걸까?
▲ 진짜 별별 일이 다 생긴다
제한 시간 1초를 남겨 두고 가까스로 적의 방어선을 돌파한다거나, 아군의 투석기에 맞아 성공 직전의 공격이 물거품으로 날아가 버린다거나,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아군 챔피언이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면서 어이없게 패배하는 그림은 '쉬벌리2'를 플레이하다 보면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 와중, 앞서 길게 설명한 치열한 칼질의 스릴은 그대로다. 이 게임, 지릴 수는 있어도 질릴 수는 없다.
엥? 쉬벌리 그거 완전 고인물 게임 아니냐?
이쯤 되면, 게임을 해보지 않았지만 여기저기서 풍문을 들어본 이들이 이런 질문을 한다. 납득은 가는 질문이다. 전작인 '쉬벌리'의 경우 오랜 기간 게이머층이 농축되어 액기스화가 진행되면서, 게이머 수준이 밑도 끝도 없이 치솟았고, 흔히 말하는 '고인물게임'이 되어 버렸다. 단검 하나만 들고 온갖 스텝을 밟으며 상대를 농락하는 전국구 칼잡이나 돌팔매로 게임을 지배하는 투석 고수가 존재하는게 전작인 '쉬벌리'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일단 걱정은 접고 시작해도 무방하다. '쉬벌리2'는 전작의 시스템을 여럿 가져왔지만, 전작보다는 훨씬 쉽게 만들어진 게임이다. 상대의 공격에 빡빡한 타이밍을 맞춰야 했던 방어도 누르기만 하면 유지되는 형태로 바뀌었고, 워낙 다대다 전투가 빈번히 벌어지다 보니 한 명한테 우르르 썰리는 충격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싸우다 죽어도 '내가 못해서 죽은게 아니라 상대가 많았다'는 형태의 정신 승리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게다가, 게임이 신작이니 만큼 유저 실력 평균도 그리 높지 않아 부담 없이 게임을 시작해도 얼마든지 1인분을 할 수 있다.
그럼 또 이런 생각이 들 거다. "말대로라면, 내가 잘 해봐야 별로 활약할 여지가 없는 게임 아닌가?" 그렇지 않다. 게임이 전체적으로 쉬워지긴 했지만, 이는 비교적 실력이 모자라는 이들도 어떻게든 고수들과 비빌 정도의 게임이 되었을 뿐, 고수들의 플레이는 또 확실히 다르다. 타격 지점을 정확히 캐치해 상대보다 빠르게 공격을 적중시키는 드래깅이나, 쭈그려 앉아 상대의 상단 공격을 회피하는 테크닉, 발차기와 방어, 공격의 심리 싸움은 고수들이 왜 고수인지를 확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그 몇 명의 고수들이 막힌 게임을 풀 정도는 아니다. 앞서 말했듯 '쉬벌리2'는 32:32의 대난투가 벌어지는 게임이기 때문에, 한 게임에 고수부터 초보까지 골고루 존재할 뿐, 고수들이 '쉬린이'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구도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숫자엔 장사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지고 나서 팀 탓을 하는 플레이어가 아예 없진 않다. 하지만 많지도 않다. '쉬벌리2'의 재미는 승리보다 앞서 말했듯 싸움 그 자체에서 대부분 우러나기 때문이다.
▲ 고수고 나발이고 뒤통수엔 답이 없다
물론, 간혹 합이 잘 맞아 혼자 십수명을 쓰러트리는 영웅적 플레이가 나올 때도 있고, 그 주인공이 본인일 때도 있다. 방어 후 즉시 공격을 하면 짧은 시간 무적이 되는 '대응 공격'의 메커니즘 덕분에 여러 상대의 일격을 쳐내며 반격으로 하나씩 처치하는 그림이 드물지 않게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쉬벌리2'의 또 다른 재미 하나를 찾은 것이니 축하할 일이다. 숨막히는 1:1 전투도, 다대일의 영웅적 전투도, 다대다의 난장판도 '쉬벌리2'안에는 모두 있다. 하던 얘기를 계속하면, 그렇기 때문에 '쉬벌리2'는 고인물 위주의 게임이 될 수 없다. 초보도 합이 잘 맞으면 고수의 플레이를 하고, 고수들도 사방에서 들어오는 공격에는 무력하게 당할 뿐이며, 애초에 수십명이 얽혀 싸우는 난장판에서 혼자 강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학살을 벌일까. 그냥 남들보다 더 잘 싸우는 한 명의 플레이어가 될 뿐이다.
나 중세 기사, 더 많은 전장 원한다.
지금껏 좋은 얘기만 했으니 아쉬운 점도 몇 가지 읊어 보자. 일단, 출시 초기임에도 전장의 수가 퍽 부족하다. 좁은 규모의 데스매치 맵을 제외하면 5~6종. 뭐 적다고 볼 수는 없지만, 계속 플레이하다 보면 했던 맵만 계속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공식 홈페이지에 게시된 업데이트 로드맵에서 새로운 전장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PC 플랫폼이 에픽스토어 독점이라는 것 정도? 물론, 게임 플랫폼의 선정에는 여러가지 어른의 사정이 들어가기 마련이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아니다. 그냥 조금 아쉬운 것 뿐이다. 지금도 정상적으로 게임을 플레이하기에 게이머의 수가 적지는 않지만, 이왕이면 보다 많은 게이머가 활용하는 플랫폼도 지원한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그 외에는, 솔직히 말해 아쉬운 점은 없다. 간혹 리스폰 타이밍에 제대로 스폰이 되지 않는다거나, 게임 내 플레이어 차단 기능이 없어 몇몇 플레이어들이 서로의 부모와 심지어 국가의 안부를 묻는 꼴을 그냥 지켜봐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긴 하지만, 앞서 말한 콘텐츠 문제를 포함해 모두 업데이트로 해결 가능한 부분이다. 구조적으로 게임의 재미를 해치거나, 모순되는 부분은 전혀 없다. '쉬벌리2'의 목표는 웃기면서도 격렬한 중세 전장을 게임 내에 구현하는 것이고, 이 자체는 전혀 부족함 없이 해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망설이는 분들이라면, 일단 한 번 해보고 생각하길 바란다. 가격도 싸다. 에픽스토어 기준 정가 41,000 원. 얼마 전까진 프로모션이 있어 3만 원에 구매할 수 있었는데, 지금도 하는 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대다수의 AAA급 게임에 비하면 절반 정도의 가격임에도, 웬만한 AAA급 게임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수준의 밀도 높은 재미를 주는 게임이 '쉬벌리2'다.
한 가지, 고백할 것도 있다. 이전에 가끔, 도무지 제정신으로 할 수 없는 게임들을 '같이 죽자'는 심정으로 친구들에게 영업했던 적이 있는데, 이 게임은 진짜 너무 재미있어서 영업을 했다. 물론, 아무도 같이 해주지 않는다. 양치기 소년의 기분이 이럴까? 이 리뷰를 쓰는 이유도 결국은 그거다. 과거의 죄를 참회할 테니 같이 게임 좀 해주면 안되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