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있는 베테랑들이 완성한 또 하나의 로그라이크 덱 빌딩


지난 2017년에 얼리억세스로 공개된 '슬레이 더 스파이어'의 흥행 이후, PC 플랫폼을 통해 출시되는 대부분의 카드 게임들은 로그라이크와 덱 빌딩 요소를 채용하기 시작했다. 이 장르는 계속해서 반복해도 쉽게 질리지 않는 장르 특유의 무작위성 덕분에 기본적인 것들만 제대로 갖춘다면 비교적 적은 리소스로도 수십 시간에 이르는 플레이 타임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로그라이크 덱 빌딩 게임은 핵심이 되는 몇 가지 기본 공식에 '차별화 요소'를 하나씩 가미하는 식으로 장르적 규모를 키워나갔고, 카드 게임 팬들은 물론 수많은 개발자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으며 어느새 PC 카드 게임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주류 장르가 되었다.

굴러질 대로 굴러지며 더는 신선함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흔한 장르가 되어버렸다지만, 카드 게임을 정말로 좋아하는 팬들은 조금이라도 더 신선한 자극을 찾으며 지금도 끊임없이 목말라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운 재미를 찾지 못하고 똑같은 게임만 수백, 수천 시간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이러한 부류의 게이머들이기 때문이다.

이때, 매직 더 개더링의 창시자이자 모든 TCG의 아버지인 '리처드 가필드'의 손길이 닿은 신작 게임이 나왔다는 단비와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개발사는 전략 카드 게임 '페어리아(Faeria)'를 만든 아브라캄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카드 게임의 대부, 그리고 수년간의 서비스로 카드 게임 노하우를 가득 보유한 베테랑 개발사가 힘을 합쳐 만든 로그라이크 덱 빌딩 게임은 어떤 모습일지, 스팀을 통해 출시된 신작 '로그북(Roguebook)'을 직접 체험해보았다.

게임명 : Roguebook
장르명 : 로그라이크 덱 빌딩
출시일 : 2021.06.17.
개발사 : Abrakam Entertainment SA
서비스 : Nacon
플랫폼 : PC

관련 링크: 'Roguebook' 오픈크리틱 페이지


두 명의 영웅과 타일 맵에서 즐기는 새로운 덱 빌딩 로그라이크


'로그북'의 가장 큰 차별화 포인트는 유저가 조작하는 영웅이 두 명이라는 점이다. 보통 로그라이크 덱 빌딩 장르의 게임은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여러 종류의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하나를 선택하고, 그 캐릭터를 위해 갖춰진 카드 스타일대로 덱과 유물을 갖춰나가는 방식을 기본 구조로 가진다. 어떤 캐릭터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는 진행 방식을 재미 요소로 내세운 것이다.

로그북에서는 이때 발생하는 덱 빌딩의 재미가 말그대로 두 배가 된다. 총 네 개의 캐릭터 중 2개의 캐릭터를 골라 파티를 구성하고, 새로운 카드를 획득할 때도 두 명의 캐릭터 카드를 동시에 갖춰나가야하기 때문이다. 어떤 캐릭터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총 6쌍의 영웅 조합이 가능한데다가 매 게임마다 획득할 수 있는 카드의 구성이 계속해서 바뀌니, 매번 새로운 조합과 구성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조작할 수 있는 캐릭터가 둘이라는 것은 단순히 덱에 포함하는 카드 컬러가 둘이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돌진이나 방어 카드를 냈을 때 발동하는 '캐릭터 자리 이동'을 통해 적의 공격을 받아낼 대상을 직접 특정할 수도 있고, 자리에 따라 코스트 감소 효과가 있는 '원거리'와 '근접' 키워드, 그리고 다른 캐릭터의 행동에 이어서 발동했을 때 이득이 생기는 '콤보' 등, 캐릭터가 둘이기에 가능한 여러 기믹들이 로그라이크의 재미를 더해준다.

▲ 캐릭터 하나가 죽더라도 게임 오버가 아니다.

▲ 죽음에 대한 패널티가 존재하므로, 영웅을 '고기방패'처럼 소모하는 단순한 전략은 통용되지 않는다

로그북의 두 번째 차별점은 개발사의 전작인 '페어리아'를 떠올리게 하는 타일 방식의 맵 구조다.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때 맵의 대부분은 '전장의 안개'로 가려져 있고, 안갯속에 숨겨져 있는 타일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은 물론, 이동할 수도 없다.

이때 맵의 안개를 지우고, 나만의 모험 경로를 만드는 것이 바로 '붓'과 '잉크'다. 맵의 특정 부위를 제한적으로 밝힐 수 있는 붓과 잉크로 최적의 경로를 만들며 숨겨져 있는 보물을 찾고, 그 과정에서 덱을 강화해나가는 것이 로그북의 핵심 메커니즘이다.

보스전으로 가는 길을 단순히 꼬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접해보면 이 안개를 해금하는 과정 자체가 오히려 전투보다 더 재미있게 느껴질 때도 많다. 맵을 탐험하면서 획득할 수 있는 젬이나 보물 중에는 전투의 양상을 한번에 뒤엎어버릴 만한 강력한 성능을 가진 것들도 존재하고, 플레이어의 보물을 훔쳐 도망가는 도적이나 던전 앞을 지키고 있는 드래곤 등, 판타지 소설에서나 볼법한 다양한 랜덤 이벤트가 등장하여 모험의 재미를 더해준다.

결국, 전장의 안개로 가려진 타일 방식의 맵으로 로그라이크 장르 특유의 무작위성을 확립하고, 두 명의 영웅을 동시에 조작하여 기존의 덱 빌딩 카드 게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의 전투를 구현한 것이 '로그북'이라는 게임의 차별점이자, 매력인 셈이다.

▲ 맵을 밝히는 도구를 최대한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전략도 재미 요소가 된다

▲ 어떤 선택지를 고르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지는 여러 랜덤 이벤트를 만나볼 수 있다


재밌기에 더 두드러지는 아쉬운 디테일

로그북은 덱 빌딩 로그라이크 게임이 갖춰야 하는 기본 공식에 자신들만의 요소를 곁들여 성공적인 차별화를 이룬 작품이다. 응당 '명작 덱 빌딩 로그라이크 게임' 리스트에 넣을 수 있을 만한 다양한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뒷맛이 씁쓸하게 하는 몇 가지 아쉬운 디테일들이 발목을 잡는다.

우선 배속이나 연출 스킵 기능을 제공하지 않아 답답하게 느껴지는 게임의 템포가 첫 번째 걸림돌이다.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때 매번 마주하게 되는 철문이 열리는 연출, 특정 오브젝트를 획득했을 때 맵의 일부가 밝혀지는 연출 등, 반복했을 때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에 대한 스킵 기능이 일절 지원되지 않는다. 손패에 중첩해서 쌓아둘 수 있는 '단검' 아이템을 사용할 때도 한장씩 차근차근 적을 클릭해야하다보니, 일정 수준의 스킵이나 배속 기능이 절실해졌다.

▲ 다음엔 절대 단검 세팅을 사용하지 말자고 다짐하게 되는 순간

플레이할 때 다소 불편한 키 배정이 두 번째 걸림돌이다. 게임 플레이의 대부분은 마우스 조작이 기본이 되는데, 실시간 전략 게임을 연상케 하는 맵 구성을 하고 있으면서도 맵 전체를 둘러볼 땐 마우스를 사용할 수 없게 되어있다.

이 기능은 대신 키보드에 할당되어있는데, WASD가 아닌 방향키에 배정됐다. 키 설정을 입맛에 맞게 바꿀 수 있는 설정 기능도 지원하지 않으므로, 익숙하지 않다면 매번 불편한 키 세팅을 감수하고 게임을 플레이해야만 한다. 개인 성향차가 있을 수 있는 조작키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다른 메뉴 항목은 전부 ESC로 뒤로가기를 지원하지만 일람표에선 지원하지 않는 등 자잘한 조작 키 관련 문제들이 남아있는 상황이다.

이외에도 특정 카드가 크게 강조되어 눌러야하는 버튼을 가려버리거나, 번역문이 적용되지 않아 영문이 그대로 노출되고, 타일 위로 올라가도 반응을 하지 않는 오브젝트가 있는 등, 개선이 시급한 버그들도 존재한다. 로그북은 얼리억세스가 아닌 정식 출시 버전의 게임이므로, 단순히 '앞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 화면 하나에 전부 담기지 않는 맵을 둘러보는 것은 꽤 중요한 조작이지만, 편의성이 아쉽다




'로그북'은 시급한 버그 픽스가 필요해보일 정도로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 존재하나, 이러한 불편함을 모두 감수하고도 충분히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는 신작이다. 카드 게임, 그중에서도 로그라이크 덱 빌딩 장르를 선호하는 유저들에게는 마치 깜짝 선물같은 작품이 되지 않을까. 더 우려낼 것도 없을 정도로 반복해서 플레이한 '슬더스'를 잠시 쉬게 해줘도 될 정도로 말이다.

영 찜찜하게 느껴지는 스팀의 '대체로 긍정적' 평가는 게임 출시와 동시에 보스 DLC를 유료로 판매하려했던 개발사의 만행 덕분에 빚어진 참사다. 이후 개발자는 당시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었으며, 당초 계획처럼 꾸미기 아이템 정도만 유료 DLC로 판매하겠다고 공지했고, 기존의 유료 DLC를 기본 게임 내에 모두 포함시켰다. 현재는 디럭스 에디션을 구매하더라도 영웅 스킨과 사운드트랙, 아트북처럼 부가적인 부분만 더해지므로, 게임이 궁금하다면 본편만 구입해도 충분하다.

여담으로 스토리나 세계관 설정 부분에서도 개발사의 전작 '페어리아'와 어느 정도 연결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게임 속에 등장하는 NPC나 보스 디자인을 자세히 보면, 페어리아의 카드 디자인에 등장했던 캐릭터들을 발견할 수 있다. 다소 한정적이나, 어찌되었건 전작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반가운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전작을 한 번도 플레이해보지 않았더라도 로그북을 플레이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 로그라이크 덱 빌딩 장르를 좋아한다면 꼭 한번 직접 플레이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