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화끈하게 다 때려 부수는 재미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때도 있고 내가 처한 슬픔과 트라우마를 게임 속 인물의 비극에 공감하고 승화시키는 카타르시스도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농장을 경영하거나 귀여운 캐릭터들을 보며 감정을 치유하는 힐링 게임이 뭇 게이머의 사랑을 받는다.


그런데 이 힐링이라는 게 참 묘하다. 언론이, 게이머들이 입 모아 '힐링 게임'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정말로 치유의 힘이 있는지 스스로도 혼란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귀여운 동물들과 함께 조용한 마을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동물의 숲은 힐링이라는 말과는 너무나 멀어진 시리즈다. 게임 시작부터 사채를 끌어다 썼으니 이거 먼저 갚으려고 돈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해댄다.

스타듀 밸리 같은 목장이야기류 게임은 소소한 자연과 함께하는 귀농 체험을 해보려고 시작한다. 정겨운 시골 풍경도 잠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마을 사람들 호감도도 채우고 작물 관리에 광산도 좀 돌려고 하면 체력과 시간 모두 칼같이 분배해야 만족스러운 달성도를 얻을 수 있다. 현실에선 아침 잠에 제때 눈 뜨기도 어려운 내가 이세계에서는 15분 단위로 스케쥴을 짜서 움직여야 한다니.

모바일 기기에 켜두고 그저 가만히 지켜보면 된다는 방치형 힐링 게임도 결국은 더 많은 캐릭터, 동물을 수집하기 위해선 결제와 뽑기 버튼을 눌러야만 한다.

물론 굳이 이 모든 걸 달성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수많은 도감 목록과 돈벌이, 그리고 완수해야 하는 도전과제가 목을 옥여 죄며 좀더 빠르게 뛰도록 만든다. 재밌기야 무지하게 재밌지. 그러니까 하는 거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 바쁜 세상에서, 정말 힐링할 수 있긴 한 걸까?


그렇게 힐링이라는 허황한 꿈에 빠져 있던 차 어느 한 게임은 '치유'가 뭔지 제대로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짱구는 못말려(크레용 신짱) 나와 박사의 여름방학 -끝나지 않는 7일 간의 여행-'은 굉장히 정적이면서도 극적이다.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수식어 둘이 이 게임을 정확히 설명하는 데는 '어린 꼬마 아이의 짱구'와 '짱구는 못말려의 주인공 짱구'라는 두 가지 개념을 동시에 담아낸 의도적인 게임 구성에 있다.

엄마 봉미선(미사에)의 소꿉친구 요요코가 사는 시골 마을 아소에서의 일주일 동안 플레이어는 짱구가 되어 그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그런데 제한된 기간 시골에서의 삶을 사는 짱구가 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5살 어린 아이가 할 수 있는 선에 그친다.

잠자리채로 곤충을 잡고 나무 낚싯대로 작은 물고기를 잡거나 어른들의 심부름을 해 약간의 용돈을 버는 정도다. 심부름이라고 해서 세계의 핵심을 건드리는 퀘스트나 임무 등 거창한 건 아니다. 작은 사진기로 가족들의 일상을 담아 마을 신문사에 전달하거나 가게에 채소 몇 개를 사다 전달해주는 등 말 그대로 심부름 수준이다.

그렇다고 물고기 도감을 채우는 데 열의를 올릴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곤충을 잡아다가 잔뜩 파는 식의 돈벌이가 구현된 것도 아니다. 정확한 시간이 표기되는 것도 아니라 빡빡한 일정에 고통받을 필요 없이, 그저 5살 어린이가 그렇듯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고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또 또래 친구들과 놀거나 소소한 미니 게임을 즐기는 데 그친다. 저녁에는 다 같이 모여 밥을 먹고 아빠와 함께 목욕물에 들어가 하루 피로를 날려버리면 그만이다.

가끔 뭘 할지 모르겠다면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배경음악을 대신해 울리는 바람 소리, 서로 부딪히는 풀잎 소리, 적막을 깨는 매미 소리가 내가 컨트롤러에서 손을 떼고 귀를 기울이는 게 잘못된 게 아니라고 토닥여줄 뿐이다.

▲ 중요한 이벤트는 이렇게 그림일기로 그려지고

▲ 옆집 아주머니는 저녁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동화를 읽어준다

▲ 밤에도 놀 수 있지만, 저녁 시간이 되면 흰둥이가 집으로 데리러 온다

▲ 같이 모여 밥 먹기 힘든 시기라 왠지 더 뭉클해지는 식사 시간

물론 '어린아이로서의 짱구'가 플레이어를 대신해 여유를 가져다준다면 '짱구는 못말려의 짱구'는 플레이어가 아니라 이 여름방학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만화 속 주인공으로 활약한다.

'끝나지 않는 7일간의 여행'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짱구는 주요 인물인 아쿠노 박사와 끊임없이 반복되는 7일의 여름 방학을 되풀이한다. 물론 단순히 회차 개념으로 1회차에 모든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 빠르게 달려야 하는 건 아니다.

다시 시작된 7일의 이야기는 이전 7일의 내용과 단절되지 않는다. 1회차에서 아쿠노 박사가 공룡을 복원해 마을 한가운데 공룡이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2회차에서는 시작부터 그 공룡이 돌아다니는 식이다. '공룡이 돌아다니는 시골마을'이라는 비일상은 마치 로봇이 등장하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짱구 극장판의 모습을 닮았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모양 역시 그렇고 말이다.

이런 메인 스토리 역시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장소를 찾아가야 하는 식의 타임 테이블 따라 돌아가는 구조는 아니라 천천히 그 여정을 즐겨도 된다. 억지로 이벤트를 쫓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어차피 이번 7일이 끝나면 또 다른 7일이 또 있고 새롭게 만날 인연 역시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플레이스테이션1에서 시작된 '나의 여름방학' 시리즈의 개발자이자 이번 작품의 디자인과 각본 등을 맡은 아야베 카즈. 그는 '짱구는 못말려 나와 박사의 여름방학' 출시에 앞서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 하는 요소를 넣지 않으려 했다고 이야기했다. 거대한 건물이나 복작복작한 NPC도 없고 퀘스트 마크 하나 없는 세계에서의 자유로움과 여유로움. 게임은 여기서 출발했다.

▲ 기차 소리, 바람에 부대끼는 풀 소리가 BGM을 대신한다

▲ 공룡이라는 비상식적인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짱구 극장판이 그렇듯 큰일 아닌 것처럼 돼버린다

▲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는 거 보면 짱구 맞다

힐링이라는 말의 울림은 너무나 빠르게 돌아가는 일과와 학업의 시계에서 마치 나를 구원해주는 절대자의 음성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남용되는 말이 대개 그렇듯, 그 단어가 주는 고유의 의미보다는 전달의 용이성이 우선되는 경우가 많다. 힐링은 마땅히 게임을 설명할 방법이 없을 때, 독자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혹은 유사한 장르적 특성을 축약하기 위해 남발됐다.

그래서 탄탄한 볼륨을 가진 것도 아니고 닌텐도 스위치 공식 e숍에 따르면 1기가도 안 되는 용량에 이것저것 달성하는 게 목표인 사람들의 발을 붙잡기 어려운 콘텐츠까지. 이 게임이 주는 여백과 정적은 그동안 잊었던 힐링의 진짜 뜻이 무엇인지를 되살피게 한다. 겉만 그럴듯한 시골풍이 아니고 지갑에서 나오는 여유가 아니라, 손 가는 대로 느끼고 작은 것에 웃음 짓게 하는 소소함. 힐링은 여기에 있었다.

만약 게임이 한국어화까지 제대로 거쳤다면. 학창시절 배운 한자로 뜻풀이해가며 겨우 이해하는 일본어 실력이 아니었다면 아마 힐링이 아니라 과다치유에 팔이 네 개가 되고 이마에 눈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팔 4개, 천진반 눈을 가져도 좋으니 더빙과 함께 한국어화는 해줬으면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