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게임 ESD를 소유한 '밸브'가 자체 개발한 휴대용 게이밍 하드웨어 '스팀 덱'이 공개됐습니다. 오는 12월 출시를 앞두고 이미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예약 구매를 받고 있는 상태지요.

딱히 엄청 놀라운 일까지는 아닙니다. 밸브는 이미 6년 전, '스팀 컨트롤러'를 출시하면서 하드웨어 개발 및 제작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으니까요. 물론 스팀 컨트롤러 자체에 대한 평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소식이 전해지면서, 게임업계, 특히 서구권 시장은 '스팀 덱'의 출시에 온갖 의미를 부여하며 추정과 예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업계 내에서도 스팀 덱의 성패를 두고 예측이 꽤나 갈리고 있는 상황이죠.

몇몇 매체는 스팀 덱이 기존 휴대용 콘솔의 강자인 닌텐도 스위치의 위치를 위협할 중대한 라이벌이라 말하며, 스팀 덱이 나오는 순간부터 스위치의 존재감과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 예견했습니다. 반면, 애초에 스위치와 스팀 덱은 추구하는 바나 지원하는 독점작 목록이 매우 다르기에, 유의미한 수준의 영향은 없을 것이라 주장하는 매체도 있죠.

그 외에도 기존 콘솔 시장 3대장이 긴장을 해야 한다거나, 모바일 시장으로 나아가기 위한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할거라는 등 '스팀 덱'을 향한 업계 관계자들의 해석은 무수히 많은 형태로 가공되어 게이머들에게 번지고 있습니다.

확실한 건, '스팀 덱'의 출시를 향한 저 수많은 추측의 눈길이 모두 '이해할만한' 수준이라는 겁니다. 그만큼 '스팀 덱'의 출시 소식이 꽤 생각할 만한 요소가 많은 이슈라는 뜻이죠. 단순히 '새로운 게이밍 하드웨어가 등장한다'라는 것 이상으로 말입니다.

▲ 같은 개념이었지만 개발사 파산으로 개발 중단되어버린 'SMACH Z'



1. 스스로 'PC'라 주장하는 콘솔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스팀 덱'의 포지션입니다. 아시다시피, 밸브는 PC 중심의 ESD를 거느린 기업이며, 밸브가 개발해온 몇 안되는 하드웨어들이 다들 그러하듯 PC 중심의 게이밍 생태계를 표방합니다. '스팀 덱'또한 콘솔이 아닌, 휴대용 소형 PC(UMPC, 울트라 모바일 PC)로 소개되고 있죠.

실제로도 '스팀 덱'은 그냥 PC로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아치 리눅스 기반의 스팀OS를 기본으로 사용하지만, 원한다면 윈도우로 OS를 바꿀 수 있으며, 덱에 거치해 키보드와 마우스를 연결하면 일반적인 PC와 비슷한 형태로도 사용 가능합니다. 그냥 게임 패드가 달린 휴대용 소형 PC정도로 생각해도 큰 문제가 없다는 거죠. 이쯤 되면, 그냥 노트북에 게임 패드 하나 단 정도인데, 왜들 저리 호들갑일까 싶기도 합니다.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이미 밸브는 과거 이렇듯 PC와 콘솔 사이의 어중간한 무언가를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2015년에 발표된 '스팀 머신'이 그것이죠. 콘솔처럼 가정용 TV에 설치해 스팀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는 하드웨어가 '스팀 머신'의 포지션이었는데, 하드웨어 제조업체마다 다른 외형과 사양, 폭넓은 커스터마이징 등의 특장점을 내세웠지만, 결국 그래봐야 그냥 게임용 PC와 별다를 바가 없어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비운의 하드웨어입니다.

'스팀 머신'의 실패 사례에서, 우리는 '콘솔'로 분류될 만한 기기와 그렇지 않은 기기를 구분짓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대가 지나면서 의미도 많이 변했지만, 오늘날 '콘솔'이라 불리는 기기들은 기기와 게임이 모두 완벽하게 통제됩니다.

▲ 가격도, 성능도 제각각이었기에 주목을 끌었지만, 그래서 망한 스팀 머신

모든 게임은 기기에서 문제 없이 플레이가 가능해야 하고, 모든 기계는 규격화된 성능을 보여야 합니다. 같은 콘솔을 사용하는 게이머들이 모두 같은 환경에서 게임을 즐길 수 있어야 함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PS와 XBOX, 닌텐도 스위치는 모두 이를 완벽하게 해내고 있습니다.

'스팀 덱'이 이슈가 되는 이유도 이러한 콘솔의 특징과 연관해볼 수 있습니다. '스팀 덱'은 규격화된 성능(타 콘솔에서도 변경 가능한 저장 공간 제외)을 보이며, 밸브는 스팀 내 모든 게임을 1280x800 해상도, 30fps의 환경에서 플레이 가능하게끔 함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스팀 덱'은 휴대용 스팀 머신 따위가 아닌 콘솔의 정도를 걷는 기기입니다. 하지만 밸브는 굳이 '콘솔'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보다는 'UMPC'라는, 모르는 이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개념을 끌고 와 스팀 덱을 설명하고 있죠. 오늘날, 대부분의 게임은 PC와 콘솔로 모두 출시되지만, 그럼에도 PC와 콘솔은 엮이는 점이 많을 뿐 엄연히 분리된 영역입니다.

그런 와중, 밸브가 "이건 콘솔이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누가 봐도 콘솔인 제품을 선보인 겁니다. 엄밀히 말하면 아니긴 하죠. UMPC니까요. 심지어 가격도 콘솔 시장에 맞췄습니다. 비슷한 급의 UMPC들은 일반적으로 두세 배의 가격이 책정되어있는 와중에 혼자 쌉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일단 보급을 해놓고 보겠다는 전략이겠죠. 이런 모습들을 보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UMPC라고 말하면서 콘솔 가격에 판매하고, OS는 PC지만 사양은 고정되어 있으며 콘솔이 아니라 하면서 콘솔식 서비스 전략을 수립하는 꼴이니까요.

▲ 어떤 게임이든 최소 1280x800 해상도에 30fps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2. '고사양' 게임 시대의 황혼

보다 구체적으로 나아가 봅시다. 앞서 말했듯, 밸브는 '스팀 덱'을 스팀 내 모든 게임들을 실행할 수 있는 기기로서 설계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AAA급 게임 산업의 미래를 약간이나마 점쳐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제 스팀에서 서비스되는 모든 게임의 사양에 제한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스팀 덱'의 존재 의미는 스팀의 게임을 휴대하면서 할 수 있다는 것에서 오기 때문에, 실행 불가능한 게임이 생기는 순간 '스팀 덱'은 결점을 품은 기기가 되어버립니다. 결국, 밸브 입장에서는 지속적으로 스팀 덱의 후속 모델을 내놓든, 게임사들을 대상으로 압박을 가하든 해서 최고 사양을 제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신규 스팀 덱 모델을 줄줄이 발표할 수는 없습니다. 콘솔 시장처럼 2~3년의 텀을 두고 후속 모델이 등장하거나 5~8년의 텀으로 세대 교체를 하는 것이 현실적이죠. 개발비도 개발비지만, 게이머들의 심리적 구매 장벽 때문에라도 잦은 후속 모델 발표는 독이 될 뿐입니다. 결국, 개발사를 쥐어짜 요구 사양을 최대한 낮출 수밖에 없다는 거죠. PC 게임을 개발하는 개발사 치고 밸브의 눈치를 보지 않을 곳이 과연 있긴 할까요?

▲ PS4를 기절시켰던 이 녀석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지금도 AAA급 게임들은 콘솔 사양에 맞춰 개발을 하고 있는데 큰 차이가 없지 않냐?"라고 말이죠.

차이가 없지 않습니다. PS와 XBOX 등의 게임 콘솔은 오로지 게임 실행 자체에 최적화된 기기이며, 쓰이는 부품들의 성능을 100% 끌어내기 위한 고수준의 설계 기술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콘솔 개발용 SDK의 존재나 퍼스트 파티들의 기술 교류가 이를 최적화하기 위한 방안들이죠.

하지만 '스팀 덱'은 어쨌거나 PC를 표방합니다. 기기가 추구하는 방향은 콘솔의 그것에 가까우나, 정작 밸브는 기기를 PC로 바라보는 만큼, 콘솔 서비스 주체들이 지니고 있는 공유 가능한 개발 노하우나 최적화 솔루션 등은 미비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스팀 덱'에 맞춘 개발 환경이 만들어지고 성숙해지기까지의 몇 년간은, 개발사들이 이 사양에 게임을 충족하기 위해 골머리를 싸매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기대할 만한 긍정적 효과도 있습니다. 엄청난 사양의 PC로 괴물같은 옵션을 덕지덕지 켜놓고 '저는 잘 되는데요?'라고 말하는 스노비즘 게이머들이나 플레이했던 '망한 최적화의 게임들'은 어떻게든 최적화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밸브 님이 스팀 덱에서 원활히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데 어떤 간 큰 개발사가 이를 무시하겠습니까.

▲ '발적화'가 줄어들 것이란 전망은 반가운 소식



3. 단단한 땅을 디뎠지만, 무기는 없는 그대여

또 하나,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소니와 XBOX는 콘솔의 흥행을 위해 퍼스트 파티를 모집하고, 개발 스튜디오를 인수하는 한편 자체적인 게임 판매망인 ESD를 만들어냈습니다. 반면, 밸브는 '스팀'이라는 세계 최대 규모의 게임 ESD를 이미 가지고 시작하는 형태죠.

덕분에, '스팀 덱'은 기존의 콘솔들 이상의 영역을 구축할 잠재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실수를 줄이면서 무게감을 쌓아나가야 한다는 과정 상의 어려움은 있지만, 꾸준한 수량 보급만 이뤄진다면 '창작 마당'의 넓은 확장성과 간편한 원터치 결제 시스템, 클라우드 저장과 커뮤니티 기능 등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콘솔이 될 수 있다는 뜻이죠.

'스팀 덱'이 출시되고 판매량이 늘어난다고 '닌텐도 스위치'의 아성을 위협한다거나, 콘솔 삼국지에 느닷없이 끼어든 제4의 세력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의 '스팀'에는 타 메이저 콘솔 업체가 모두 지닌 차별화된 강력한 무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 강력한 독점작이나 차별화된 강점이 필요

현 시점에서 '스팀 덱'의 차별화되는 강점을 꼽자면 'PC 게임을 휴대하면서 사용할 수 있다' 뿐입니다. PS는 굉장히 강력한 독점작을 지녔고, XBOX는 MS가 구축해둔 강력한 IT 인프라를 활용하면서 대형 스튜디오를 고래처럼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닌텐도 스위치는 강력한 독점작에 휴대용이라는 편의성까지 무기로 쥐고 있죠.

하지만 스팀의 현존 게임 대부분은 타 콘솔로도 플레이 가능하며, 스팀 자체가 애초에 PC 게임 ESD였던 만큼 스팀의 이용 고객들은 '휴대용 게임 기기' 자체에 그다지 큰 니즈를 느끼지 않습니다. 경쟁력이라 할 수 있는 타 콘솔들과 차별화되는 특장점이 사실 그리 강하진 않다는 거죠.

앞서 말씀드린 '닌텐도 스위치'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거란 일부 외신의 추측을 별로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럴싸한 게임이 있어야 경쟁을 하든가 말든가 하는 상황인데다 닌텐도의 독점작들이 지닌 파괴력을 이기는 건 단기간엔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보편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먹히는 무기는 바로 '강력한 독점작'입니다. 밸브가 바보가 아닌 이상 '스팀 덱'을 사야 할 메리트를 어떻게든 만들어야 할 테고, 가장 쉬우면서 효과적인 방법도 바로 '독점작'이죠. 그리고 독점작의 공급을 위해서는 꼭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퍼스트 파티' 개발사입니다.

다만, 밸브가 현재 내세울 수 있는 타이틀은 매우 한정적입니다. 지금까지 숱하게 우려먹은 '카운터 스트라이크'와 '하프 라이프' 시리즈, '포탈 시리즈', '도타2' 정도죠. 그리고 이 중, 휴대용 콘솔에서 즐기면 더 재밌을 타이틀은 하나도 없습니다. 감히 소니와 XBOX의 문을 두들기지 못하고 PC 출시만을 결정한 몇몇 게임을 제외하면, 사실상 독점작은 이 정도라는 거죠. 솔직히 이거 하겠다고 누가 삽니까?

▲ 어쩌면 '계정 연동'이야 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일지도...

그렇다고, 넋놓고 있지도 않을 겁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하드웨어를 손해보면서 팔려는 와중인데, 가만히 냅두다가 이도저도 못 하면 그런 바보짓이 어디 있을까요. 밸브 또한 무언가 전략을 세우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네 가지 정도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이미 새로운 독점작이 될 타이틀을 기획 중이거나, 양질의 스튜디오를 흡수하여 퍼스트 파티를 늘릴 예정이다.

2. 기존의 콘솔 업체, 혹은 대형 퍼블리셔들과 파트너십을 맺어 콘텐츠 확보를 노린다.

3. 추후 발매될 대형 게임의 기간 독점권을 확보해 승부수로 삼는다(에픽 게임즈의 사례처럼)

4. '스팀' 전용이 아닌 그냥 휴대용 게이밍 컴퓨터 정도로 여겨져 뜬금없이 휴대형 게임 라이프의 필수요소가 되어버린다(...)


일단 4번은 논외로 칩시다. OS 바꾸고 와이파이만 터지면 온라인 게임도 할 수 있기에 개인적으로 꽤 가능성이 높다 생각되는 미래지만, 밸브의 의사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미래니까요.

▲ 솔직히 키보드 마우스 들고 다니면서 OS 바꾸고 독 모드로 롤이나 하는 것도 생각해봤습니다...

게이브 뉴웰의 대전략이 무엇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지금의 '스팀 덱'은 휴대용 게임 PC라는 강력한 명분과 '스팀'이라는 빵빵한 배경 외에는 이렇다 할 경쟁 요소가 미비한 상황입니다. 반면, '스팀 덱'이 성공적으로 자리잡고 퍼스트 파티를 늘려 양질의 독점작을 쏟아낼 수 있다면, 콘솔 업계는 그야말로 대격변의 시대를 맞이할 겁니다.

당사자는 아니라지만 무엇보다 콘솔 같은 형태를 띄고, 세상 어느 업체도 범접할 수 없는 대규모 게임 ESD를 등에 업은 상황에서 도무지 안 하고는 못 배길 매력적인 독점작들을 확보하는 게임 기기를 누가 말릴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런 장밋빛 미래만을 그리기엔 그간 밸브가 해 온 하드웨어의 실패가 또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스팀 덱'은 산업의 폭탄이 될까요? 아니면 그저 제2의 '스팀 머신'으로 흩어질까요? 모든 것은 '스팀 덱'이 출시되는 12월 이후, 2022년이 되어야 알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