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비어슬리 온 라스트 스탑”


드라마의 문구가 아니다. 게임의 문구다. 두 남자의 일상 코미디, 한 여자의 막장 드라마, 그리고 10대 세 명이 겪는 미스터리 스릴러와 은하계로 떠나는 SF까지 다 있는 게임 ‘라스트 스탑’의 문구다.

뭐랄까, 게임을 한다기보다는 정말 그냥 유쾌..하지만은 않지만 여튼 흥미로운 미드 한 편을 ‘보는’ 느낌으로 플레이하면 딱인 게임이다. 분명히 게임은 맞는데, 영상물에 가깝다. 분명히 패드는 잡고 있는데, 카메라워크부터 에피소드의 흐름까지 드라마 한 편을 보는듯한 그런 ‘게임’이다.


※ 스토리 스포일러가 일부 있습니다.

게임명 : 라스트 스탑(Last Stop)
장르명 : 어드벤쳐
출시일 : 2021.07.22.
개발사 : Variable State
서비스 : Annapurna Interactive
플랫폼 : PC / NSW / PS / XBOX

관련 링크: '라스트 스탑' 오픈크리틱 페이지


세 가지 장르의 세 가지 이야기

라스트 스탑의 이야기 흐름은 크게 세 가지다. 하지만 이 세 갈래의 이야기는 모두 같은 시간에 진행되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재밌는 건, 세명의 인물이 중심이 되어 벌어지는 세 가지의 이야기가 아주 자연스레 하나의 줄기로 합쳐진다는 점이다. 각각의 인물이 각각의 이야기를 진행하는 듯하지만, 그 이야기 속 등장 인물들은 이곳저곳에서 발견되며 이를 통해 이 모든 이야기가 ‘같은 도시’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굳이 장황한 설명 없이도 배경이나 인물만으로도 세 가지 이야기가 결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 미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존의 모습

▲ 돈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미나의 남편 댄

▲ 그리고 존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미나의 외도 상대 펠릭스

라스트 스탑의 내러티브가 가지는 진정한 즐거움은 너무나 다른 각각의 이야기로부터 온다. 이야기 자체가 잘 짜인 것도 한몫하지만, 세 가지의 이야기가 모두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기에 마지막 챕터까지 아주 흥미롭게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

평소 우편물이 자주 바뀌는 걸 제외하면 접점이라곤 없던 두 이웃의 몸이 바뀌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일상 코미디 하나, 한 때는 레전드였으나 지금은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불안정하기에 외도라는 선택을 한 퇴역 군인의 이야기를 담은 막장 드라마 하나, 친구들과 함께 어딘가 수상한 남자를 쫓는 학생의 이야기를 담은 미스터리 스릴러 하나.

세 가지 이야기는 너무나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각각 다르게 풀어나간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극적인 장르의 구분이 생기며, 조작이랄 것이 크게 없는 게임임에도 진행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다.



▲ 한 번에 구별할 수 있는 각 이야기의 장르

이렇게 서사 흐름이 주가 되는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정말 당연하게도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는가다. 조작에서 오는 재미가 거의 없기에 플레이어가 게임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흡입력 있는 스토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재미없는 드라마를 아무도 안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라스트 스탑은 이동 동선을 비롯해 대부분의 조작이 이미 정해져 있는 시야 내에서 진행되기에 게임 내의 이야기에 집중하기가 한층 더 쉽다. 다만 이는 마치 영상물을 보는 듯한 카메라 워크가 강제되기에 자유롭게 움직이는 게임 시야에 익숙하다면 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세 가지 이야기는 각자의 에피소드를 병렬 구조로 진행한 후 다음 챕터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같은 시간대에 3명의 이야기를 확인한 후, 다음 챕터, 즉 다음 시간대의 이야기를 확인하는 식이다.

매회 다른 이야기를 지닌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커다란 주제 안에 세 명의 이야기가 따로 펼쳐지기에 어느 정도 옴니버스식 구성을 띄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하나의 프롤로그에서 시작되어 모든 인물이 등장하는 하나의 챕터로 마무리된다.

결국 세 인물의 이야기는 모두 따로 진행되는 듯 보이지만, 그 시작과 끝은 하나로 종결된다. 그리고 라스트 스탑은 이를 프롤로그에서부터 등장하는 의문의 녹색 포탈,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 풀어낸다. 흔히 말하는 ‘떡밥’ 회수를 나쁘지 않게 해낸 것이다.

재미있는 건, 매번 새로운 챕터의 시작마다 이전의 이야기를 압축해서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미드에서 흔히 사용하는 “Previously On Last Stop”이라는 문구를 활용, 배경음과 함께 지난 이야기를 설명함으로써 마치 매 편 새로운 드라마 회차를 보는 듯한 느낌을 살렸다.

▲ “Previously On Last Stop”



선택인듯 선택아닌 선택같은 선택지

어드벤처 게임을 표방하고 있으나 라스트 스탑은 인터랙티브 장르에 가깝다. 조작의 거의 대부분은 선택지를 고르는 방식이며, 엔딩 역시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또 인터랙티브 게임이라고 보기에는 ‘선택’이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매우 적다.

엔딩 선택지를 제외하면 그 수많은 선택의 분기들은 게임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대부분의 선택지는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동일한 진행을 가져온다. 실수에 대해 사과를 해도, 짜증을 내도 상대가 화를 내는 건 막을 수 없다.

커다란 드라마의 뼈대는 이미 다 정해져 있고, 대본만 직접 쓰는 그런 느낌이다. 아무리 내가 다른 전개를 보고싶어도 그럴만한 권력이 없달까. 대신 그만큼 어떤 말을 내뱉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기에 ‘말’을 고민하면서 선택할 필요가 없다.

▲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재키는 클라이브의 호감을 얻는다

단점처럼 느껴지지만 이는 라스트 스탑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 보통 인터랙티브 게임들은 선택지가 엔딩에 미치는 영향을 고민하게 된다. 물론 그 자체가 인터랙티브 게임의 재미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라스트 스탑의 경우, 훨씬 편하게 정말 그때그때 캐릭터의 대사를 원하는 방향으로 써내려가는 느낌이기에 좀 더 서사적 측면에 집중할 수 있다.

선택지를 고르느라 멈출 필요 없이, 물 흐르듯 장면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굳이 착해지기 위해, 굳이 긍정적이기 위해, 굳이 해피 엔딩이나 배드 엔딩을 보기 위해 억지로 캐릭터의 모습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그냥 매 장면마다 그저 원하는 말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

다만 여기서 아쉽게 느껴지는 건 선택지의 지나친 압축성이다. 모 사이트의 번역기를 돌린 듯한 어색한 번역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선택지들이 모두 지나치게 단순화 되어있거나 압축되어있어 도대체 이 선택지에서 왜 저런 답변이 나오는 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는 위에서도 언급한 선택지의 낮은 영향력에서 오는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이미 답변이 정해져 있기에 주인공들의 대사 역시 어쨌든 그 동일한 답변을 낼 수 있도록 맞춰져야 하기 때문이다.

▲ 참고로 말하는 것도 돈나, 선택지 역시 돈나의 다음 말을 고르는 것이다

문제는 이게 번역의 부족함과 합쳐져 역시너지 효과를 냈다는 것이다. 게임 조작 콘텐츠의 90%가 선택지 고르기인 게임에서, 그리고 콘텐츠의 메인이 서사인 게임에서 도대체 내가 고르는 이 선택이 뭘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건 사실 어떻게 해도 변명할 수 없는 단점이다.

심지어 초반과 후반에 비해 번역 퀄리티가 심하게 떨어지는 중반부의 경우, 지금 도대체 무슨 선택을 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 그나마 대사 부분은 영문으로 된 성우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덜 하지만, 선택지 부분은 어정쩡하게 번역된 문장과 단어만 제공되어 이런 단점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특히나 번역의 부족함은 게임의 전체적인 서사가 잘 짜여 있기에 더욱 큰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쫀쫀하게 이어지는 스토리들을 감상하는 가운데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번역기 말투라니.



게임에서 풍기는 드라마의 향기

라스트 스탑의 그래픽은 분명 실사와는 거리가 멀다. 옴니버스식 구성을 띈 것도 그렇고, 어딘가 각이진 투박한 듯한 그래픽도 그렇고 확실히 첫인상은 미국식 애니메이션의 느낌이 많이 나는 편이다.

하지만 플레이 도중 확인할 수 있는 섬세하게 움직이는 캐릭터들의 얼굴이나 묘사 방식, 영상물을 보는 듯한 카메라 워크 등이 합쳐지며 애니메이션보다는 드라마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렇다고해서 라스트 스탑이 완전히 감상에 치우쳐진 게임인가 하면 그건 아니다. ‘감상’이 분명 게임 진행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건 맞다. 하지만 감상의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선택지가 등장하고, 크진 않지만 그 선택이 아주 약간 진행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또한 게임 조작이 많이 들어갔다고 볼 순 없지만, 이런 류의 인터랙티브 게임이 그러하듯 미니게임 요소도 빠지지 않고 삽입되어 있다. 몸이 바뀌어 버린 두 사람은 피아노를 치며 마음을 열고, 퇴역 군인인 미나는 아주 뛰어난 눈썰미를 통해 중요한 순간마다 상대의 위협 수치를 확인하기도 한다.

라스트 스탑은 독특한 스토리, 결과에 영향을 주는 선택지, 중간중간 조작을 통한 쌍방향 전개까지 인터랙티브 게임이 가져야 할 필수적 요소는 모두 보유하고 있다.

▲ 중간중간 등장하는 미니게임

그리고 이야기 전개 역시 하나의 에피소드가 길게 이어지기보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짧게 짧게 이어 붙여 서사의 늘어짐을 방지했다. 심지어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에서 에피소드가 끊어지는 것과 이전 이야기를 빠르게 보여주는 것처럼 영상물이 가지는 특징도 게임 속에 잘 녹여냈다.

분명 게임을 하고는 있는데 왠지 드라마를 보는듯하달까. 분명히 패드를 들고 조작은 하고 있는데, 확실히 영상물을 감상하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편이다.

이는 굳이 조작과 감상 사이에 경계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상 중에도 계속해서 선택지가 등장하고, 캐릭터를 이동시킬 때도 대사는 이어지며, 심지어 이동시키던 캐릭터가 컷신으로 넘어가는 것 조차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조작과 감상의 경계가 흐리다.

즉, 이야기 흐름이 에피소드 내내 끊기지 않는다. 굳이 조작을 위해 흘러가던 스토리를 칼로 베어내듯 뚝 끊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그 아래에 조작을 끼워 넣었다.

▲ 자연스럽게 미나의 이야기에서 이어지는 조작

다만 그런 식으로 스토리의 흐름을 끊지 않으려다보니 조작의 영향이 너무나 적어졌고, 굳이 이 장면에서 이런 조작이 들어가야 하나 싶을 정도로 억지스러운 부분 역시 없잖아 있다.

또한 어쩔 수 없이 ‘게임’의 측면에서 보기에는 지루한 부분이 많으며, 스토리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인터랙티브 게임이라는 장르적 측면에서 보기에도 크게 독특하거나 흥미로운 점을 찾기 어렵다.



라스트 스탑의 스토리 자체는 흥미롭고 프롤로그부터 엔딩까지 이어지는 흐름과 떡밥의 회수 역시 잘 된 편이다. 옴니버스 형식인 듯하면서도 각 이야기의 긴 흐름은 하나로 이어지고 있기에 단편과 장편의 장점을 모두 적절하게 잘 적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스토리가 중심이 되는 인터랙티브 게임의 한 가지 특성은 나쁘지 않게 잘 풀어낸 것이다.

재미있는 건 게임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주인공들이 아주 평범하다는 점이다. 심장이 좋지 않고 머리도 거의 벗겨졌으며 배도 나왔지만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는 남자, 겉에서 보기에는 누구보다 완벽한 듯 하지만 사실은 일도 가족도 엉망진창인 여자, 사춘기를 겪으며 우정과 사랑 등으로 고민하는 10대 학생까지 세 명의 주인공은 고개를 돌리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겪는 이야기는 어디 하나 평범하지 않다. 그리고 누군가의 이야기는 가볍게, 누군가의 이야기는 어딘가 불안하게, 또 누군가의 이야기는 긴장감 있게 진행된다. 하나의 게임에서 하나의 엔딩을 향해가지만 정작 그 과정은 모두 다른 장르적 특성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다만 선택이 주는 임팩트는 최종 엔딩을 제외하면 매우 적고, 서사가 중심이 됨에도 번역의 퀄리티는 부족하며, 선택지의 압축성 역시 너무 과한 측면이 있다. 뭐랄까, 이게 분명 인터랙티브 게임인 것 같은데 정작 가장 중요한 ‘선택에 따라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가는 이야기’라는 부분이 약하다 보니 게임의 장르가 모호해지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분명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방식과 흐름, 거기에 스토리 자체의 흥미성은 나쁘지 않기에 가볍게 영상을 보는 듯한 마음으로 플레이하기에는 꽤 괜찮은 편이다. 당장 이번 주말, 뭔가 보고는 싶은데 드라마나 영화는 부담스러울 때,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특히 평소 이런 방식의 스토리 전개형 게임을 즐겼다면 더더욱 괜찮다.

아참, Xbox 게임 패스를 사용하고 있다면 무료로 플레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