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한다. 중학교 2학년 때 엄마한테 거짓말까지 해가며 PC방에서 밤새 디아블로2만 했던 기자가 보기에도 이번 '디아블로2: 레저렉션(이하 레저렉션)'은 훌륭하다. 몇 달 전 가격 듣고 "뭔 20년 전 게임을 그래픽 좀 바꿨다고 4만 원 넘게 받어?"라며 극대노했던 기자인데, 해보니 이해가 간다. 잘 만들었다.

레저렉션은 리마스터와 리메이크의 중간 즈음에 있다. 편의성 개선했다고는 하나, 현세대 게이머들이 본다면 '뭐 이리 손 많이 가냐'고 할 게 분명하다. 반면, 그래픽은 단순히 해상도만 올린 정도가 아니었다. 노말 바알까지 깨면서 그래픽으로 총 3번 놀랐다. 액트3 쿠라스트 진입할 때, 액트3 마지막 증오의 사원, 그리고 액트4 불길의 강.

▲ 그냥 나무 많은 맵 정도였던 액트3가 쿠라스트의 축축한 냄새까지 느껴질 만큼 정밀하게 구현됐다. 레저렉션의 디테일이 어느 정도인지 단번에 볼 수 있는 장소.


▲ 커피와 TOP의 차이. 레저렉션의 증오의 사원은 정상인이라면 절대로 가고 싶지 않은 디자인을 보여준다.


▲ 원작에서도 뛰어난 분위기와 디테일을 보여줬던 불길의 강. 레저렉션에서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래픽의 발전으로 헬 메피를 5,000번도 넘게 잡은 기자 또한 새로운 경험을 했다. 원작의 부족한 해상도 탓에 뭐가 뭔지 잘 구분도 안 됐던 오브젝트와 맵들을 하나 하나 구경하게 됐다. 랜덤 맵 구조인데 이 정도로 정교한 그래픽을 보여주는 게임은 지금도 흔하지 않다. 외형만 놓고 봐도 레저렉션이 현세대 게임들과 충분히 경쟁 가능한 이유다. 덕분에 기자도 심봉사 눈 뜬 기분으로 맵 구석구석 탐색하며 한참을 보냈다. 참고로 원작은 처음 하든 오래 하든, 맵 구경하는 게임은 아니었다.

게임의 첫인상을 그래픽이 좌우한다지만, 실질적으로 플레이어를 오랜 시간 잡아두기 위해선 탄탄한 시스템이 받쳐줘야 한다. 디아블로2가 20년 전 전세계 게이머의 밤을 앗아간 만큼 몰입도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게 현세대에서도 통할까? 유저들은 그 이후로도 수많은 게임을 접했는데. 지금 기준에서 본다면 그저 귀찮고 손 많이 가는, 구식 게임에 불과하지 않을까?

개발진은 출시 전 인터뷰에서 '디아블로2의 큰 틀은 바꾸지 않았다'라고 강조했다. 20년 만의 귀환임에도 새로운 시스템, 콘텐츠와 관련한 질문엔 모두 '그런 거 없다'고 답했다. 개발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면 이유는 하나다. 디아블로2 특유의 '맛'이 현세대 유저들에게도 통할 거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기자는 그들의 생각이 적중했다는 데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최소한 디아블로2에 대한 추억을 가진 기자에게 레저렉션은 충분한 재미를 줬다. 룬 파밍하는 재미는 타 게임의 최상급 아이템 구하는 재미 못지않았고, 맵핵 없는 레저렉션의 세상이 다소 귀찮을진 몰라도 탐색의 맛이 진해졌다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이런 자잘한 이유 다 제쳐두고 일단 몰입감이 근래 했던 게임과는 궤를 달리했다. 20년 넘은 시스템인데.



칭찬만 죽 늘어놨지만, 레저렉션이 과거의 영광을 그대로 재현해 새로운 '국민 게임'이 될 것이란 말은 아니다. 재밌는 건 재밌는 건데, 마찬가지로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다. 차암 전용 인벤토리는 개발진의 이해할 수 없는 고집 덕에 결국 구현되지 못했고, 대균열 같은 PvE 엔드 콘텐츠가 나오지 않는 이상 플레이를 지속할 명분도 부족하다. 액트1 앞마당 귀 교환식을 모든 유저가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2000년 출시 당시를 그대로 옮겨 온 서버 수준, 1시간 단위로 몰입과 생존을 동시에 방해하는 안내 문구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다. 잘 만든 게임임에도 메타크리틱 점수 80점대 초반에 머무는 건 이러한 이유에서다.

근데 왜 계속해요? 라고 묻는다면... 디아블로2가 기자의 삶을 바꾼 '게임 그 이상의 무언가'이기 때문이라 답하고 싶다. 요즘 게임 적응 못하는 아재가 오랜만에 옛날 게임 하면서 향수 킁킁거린다 비웃어도 부정하지 않겠다. 적어도 기자와 비슷한 세대 30대 게이머들에게 레저렉션은 충분한 매력을 가졌다고 믿고 싶다.

블리자드가 휘청인다는 이야기 나온 지 벌써 꽤 됐다. 다들 알고 있듯 미국 본사에 적지 않은 이슈가 터졌고,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워크래프트3: 리포지드'가 원작 팬들을 기만하는 걸 넘어 게임 자체로도 수준 미달이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 때문에 디아블로4가 출시되기 전, '디아블로 임모탈'과 레저렉션이 팬들의 분노를 잠재워야만 했고, 다행히 블리자드 산하 비케리어스 비전스가 개발한 레저렉션은 험악해진 분위기를 약간이나마 반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레저렉션의 장기간 흥행 여부는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어쨌든 블리자드는 최소한 팬들이 '디아블로4', '오버워치2'까지 한 번 더 참고 기다려줄 시간을 벌었다. 이제 다음 넘버링 타이틀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사실을 그들이 잊지 않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