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틀필드 2042'는 개인적으로 올해 가장 기대한 타이틀 중 하나였습니다. 하필 지스타 2021 기간 도중 출시되는 바람에 부산에 내려가 있는 동안에도 매일 밤 배틀필드 꿈을 꿨어요. 원거리 출장에다 빡빡한 일정까지 겹쳐 피곤이 쌓인 채 5시간을 운전해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도 집에 가면 배틀필드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피곤을 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이미 게임을 한 사람들은 어떤 평을 내렸을까?' 그 때 핸드폰을 열지 말았어야 했는데, 중부내륙고속도로의 한 휴게소에서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관련 커뮤니티들을 돌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 알았습니다. 저쪽에서 집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구경을 하러 갔다가 그게 본인 집이라는걸 깨달은 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를요.

어찌어찌 집에 돌아와 게임을 켰습니다. 남들이 재앙이니 똥이니 하던 '배틀필드V'도 속으로 가끔 욕은 했지만 나름 즐겁게 즐겼으니 이번 작품도 그래도 괜찮은 구석이 있을거라 믿었습니다. 원래 커뮤니티에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좀 튀어 보이기 마련이니까요. 배틀필드든 배틀프론트든 다이스의 작품이라면 뭐든 찍어먹어본 똥믈리에가 그렇게 2042년의 전장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짧게 말하자면 상상 그 이상이었습니다.


게임명: 배틀필드 2042
장르명: 슈터, 대규모 멀티플레이
출시일: 2021. 11. 19.
개발사: EA 다이스
서비스: EA
플랫폼: PC / XBOX / PS



일단 사람 많은건 좋긴 하네

욕부터 하고 시작할 수는 없으니 일단 어떻게든 좋은 점을 먼저 얘기해봅시다. 먼저, 출시에 앞서 개발진이 자신했던 '128인 전장'은 확실히 대단한 부분입니다. 굉장히 위태롭긴 하지만 어쨌거나 한 세션에 128인이 접속할 수 있고, 예상했던 대로 전장의 격렬도는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올라갔습니다.

'배틀필드V'까지만 해도 전선이 고착되면 힘의 차이에 따라 천천히 전선이 밀고 당겨지는 수준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전선 자체가 너무 넓고 격렬해서 변화가 극심하게 일어납니다. 병력이 작정하고 몰리게 되면 전력 불균형이 순식간에 발생하기 때문에 직선으로 펼쳐졌던 전선이 순식간에 태극 모양으로 꼬이거나, 울퉁불퉁해지고 와해되기 일쑤죠.

▲ 병력 상황, 전술, 차량 배치, 혹은 날씨 때문에도 전선은 끊임없이 꿈틀댄다

때문에, 배틀필드만의 느낌은 아직도 나름대로 살아 있습니다. 수십 명이 맞부딪혀 시종일관 치고박는 그 전장의 분위기는 다른 어떤 슈터 게임에서도 느끼기 어려운 감성이니까요. 그마저도 없었다면 배틀필드라는 프렌차이즈의 절대적 위기이며 동시에 완전히 망한 시리즈라는 뜻이니 아예 리뷰를 포기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거나 그 느낌 자체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걸맞는 전장의 환경 비주얼도 매우 훌륭합니다. 설원, 경작지, 사막, 산악 지형과 도심에 이르기까지 다이스 특유의 지형 디테일을 살려 훌륭하게 구현해놓았죠. 쉽게 말씀드리자면, 그래픽에 국한해서 보면 진짜 전장 같다는 느낌이 들긴 합니다. 시종일관 화약이 터지고 예광탄이 귀밑을 스치는 그 감성을 줄 정도로 말이죠.

▲ 광활함과 디테일의 조화는 오로지 배틀필드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성

한가지 더 꼽을수 있는 장점은 게임 모드인 '포탈' 모드입니다. 1942, 배드 컴퍼니2, 배틀필드3에서 각각 두 개의 전장과 장비들을 가져와 이리저리 짬뽕한 게임 모드인데, 전문가 수준의 규칙 에디터를 지원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원하는 형태의 전장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블리자드 전략 시뮬레이션의 유즈맵 세팅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죠.

포탈 모드에서도 경험치 획득을 통해 레벨업이 가능한데다 게이머 입맛에 맞는 게임을 선택해 들어갈 수 있다는 장점, 그리고 포탈에 쓰인 작품들이 하나하나 프렌차이즈 내에서는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이라는 점이 뒤섞여 포탈 모드 하나만큼은 꽤 훌륭한 퀄리티를 자랑합니다. 1942의 고전 맵들이 최신 엔진에 맞춰 다시 만들어진 것도 재미있는 포인트죠.

▲ 솔직히 좀 재밌긴 한 포탈 모드

결과적으로 '배틀필드 2042'의 장점을 정리하자하면 '분위기는 그래도 살렸다'라고 평할 수 있습니다. 후술할 게임 디자인이 장점의 대부분을 잡아먹어 버리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장 분위기만큼은 지켜냈습니다. 집도 절도 없이 차마저 어디서 폐차해버린 상황입니다만 그래도 목숨은 건졌다는 뜻이죠.

'그럼 망한거나 진배없는거 아닌가?' 싶으실 겁니다만, 사실 이 '핵심을 지켰는가?'는 게임의 수명을 논할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게임의 개발 과정은 모든 부분이 다 중요하지만, 결국 핵심이 되는 컨셉이 존재하고, 여기에 뼈대와 살을 붙여가며 만들어집니다.

핵심 컨셉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든 사후 관리를 통해 회생할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훼손되어 버렸다면 그 게임의 생명은 끝입니다. 지금의 배틀필드 2042는 매우 비참한 상황이지만, 다이스가 회생을 위해 전력투구한다면 어떻게든 살릴 가능성 자체는 남아 있다는 뜻이죠.

▲ 곧 죽겠지만 그래도 이 때는 재밌다



모든 장점을 잡아먹는 게임 디자인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배틀필드 2042는 분명 회생 가능한 게임입니다만, 그게 쉽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게임은 구조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물론, 배틀필드라는 프렌차이즈의 유지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이 디자인이긴 합니다. 수십 명, 이제는 백 명 이상의 플레이어가 한 세션에서 얽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이 불쾌하거나 불합리한 경험을 하지 않고 전장을 즐기게 만들기 위해선 심도 깊은 논의와 높은 수준의 게임 디자인이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해도 이번 작품의 게임 디자인은 너무 대충 이뤄졌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건 '맵 디자인'입니다. 128인이 투입되는 전장인 만큼 전작 대비 넓은 전장이 필요한 건 맞고, 넓은 전장이 매력적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만, 무조건 넓은게 능사는 아닙니다. 전장이 넓다는 건 그만큼 이동에 많은 시간이 소모된다는 것이고, 슈터 게임에서 이동에 많은 시간이 소모된다는 건 게임의 텐션 자체가 크게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 가장 가까운 곳이 270미터 밖인 상황. 땀나게 뛰어야 한다

그리고 배틀필드 2042는 정확히 그렇습니다. 전작만큼 단순 이동에 쓸 탈것이 여기저기 널려 있지도 않고, 전장 지원을 통해 부르는 탈것은 솔직히 투하를 기다리기 귀찮은데다 혼자 타기엔 지나치게 큽니다. 게다가 산악지나 절벽 등 차량 이동이 사실상 제한되는 지형도 상당수 존재하는데, 거점 간 거리는 또 엄청나게 멉니다. 최소 200미터, 길게는 300~400미터 밖에 거점이 있는 경우가 매우 흔하죠.

결국, 전장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알보병들은 그저 하염없이 뛰어야 합니다. 2042년이니 경량형 킥보드나 달리기 강화 외골격 등 개인용 이동 보조 장구가 하나 쯤은 있을 법도 한데, 그런 것 없습니다. 재수없게 스폰 지점이 멀기라도 하면 전선에 이르기까지 그저 죽도록 달려가야 합니다. 그 후엔 배틀필드 시리즈 보병들의 최후가 으레 그렇듯 짧은 교전 끝에 사망해 다시 또 뛰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전장의 구조가 여러 병과가 활약할 정도로 복합적인 것도 아닙니다. 기존의 현대전 배경 시리즈였던 3, 4편의 경우 장비전이 주를 이루던 지상 외에도 보병들만이 진입 가능했던 지하나 건물 내부 등 하나의 맵에서 다양한 전장 환경을 보여주었습니다. 최근 작품인 '배틀필드V'도 '팬저스톰'처럼 뻥 뚫긴 개활지뿐인 전장도 있었지만, 반면 '뒤틀린 강철'처럼 기보합동전이 필요한 전장이나 '로테르담'처럼 보병전 위주의 전장이 분명 존재했습니다.

▲ 몇 개의 특징적 건물만 존재할 뿐, 전장 대부분은 그냥 뻥 뚫린 개활지

반면, 배틀필드 2042는 대부분의 전장 구조가 그냥 넓직한 개활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보병들끼리 치고박을 수밖에 없는 폐쇄된 환경이나 입체적인 전장 없이 그저 뻥 뚫린 공간과 단순한 고저차만이 존재합니다. 안그래도 넓어서 오지게 뛰어야 하는 상황인데, 대부분의 보병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헬기와 호버크래프트가 보병들을 학살하는 주 전장을 향해 뛰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회 루트가 딱히 많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사람이 너무 많아 후방 침투도 여의치 않으니 그냥 전선에서 로켓 몇 발이라도 쏘는게 낫거든요.

이 단순하기 짝이 없는 레벨 디자인에 기름을 붓는게 장비 대 보병 밸런스입니다. 이쪽 또한 굉장히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죠. 확실한 사실부터 말하자면, 이번 작품의 장비들은 내구성이 굉장히 약합니다. 아니, 내구성이 약하다기보단 스페셜리스트인 캐스퍼가 드론에 C4를 세 개 달아서 터뜨리면 모든 장비가 한큐에 날아갑니다. 드론이 딱히 빠르지 않고 폭발 범위도 다소 애매하긴 하지만 캐스퍼를 고르는 이들이 한두명이 아니니 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전차는 대부분 1분 내로 폭파된다고 보면 됩니다.

▲ 의무병들도 흔히 들고 다니는 무반동총

게다가 대전차 장비가 공용 장비가 되면서 대부분의 보병들이 대전차 무반동총을 들고 다니기 때문에 보병의 눈에 띄는 느릿한 전차들은 대부분 얼마 못 가 터져버립니다. 이 때문에 전차를 모는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전선에 나서 적의 공격을 받아내기보단 멀찍이 떨어져서 주포로 저격을 하기 시작합니다. 전작부터 전선 고착의 주범이 되어 수많은 게이머들을 괴롭혔던 소위 '저격 똥싸개'들이 이제 전차를 타기 시작한 겁니다. 너무 쉽게 터져나가니 이해는 갑니다만, 보병이 앞서서 갈려나가고 전차가 저격을 하는게 맞는 겁니까?

그런가하면, 헬기와 진정한 언터처블이 되었습니다. 배틀필드V의 비행 장비들은 고수가 타면 지옥이 따로 없긴 했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놓인 대공포를 각잡고 쏘거나 숙련된 돌격병 유저의 플리거파우스트면 일격에 저승으로 보내버릴 수 있었건만, 이번 작품의 헬기, 특히 공격 헬기들은 아예 대처 자체가 불가능할 때가 있습니다.


▲ 공중장비의 분노 유발은 배필 유저들이라면 다들 공감하는 바

물론, 대부분의 경우엔 대처가 가능하긴 합니다. 플레어가 교란 기만체 사출에서 8초 간 지속되는 무적 판정으로 시스템이 바뀌긴 했지만, 플레어 쿨다운 동안 맨패즈(개인용 대공 장비) 두세 발만 맞추면 떨어지는게 헬기이고, 심지어 이 맨패즈는 공용 장비라 꽤 많은 보병들이 들고 다니긴 합니다. 문제는, 대처가 불가능한 일부 상황입니다.

저도 직접 당해본 사례입니다만, 아파치 워치프와 같은 공격 헬기가 직사 화기론 맞추기도 어렵고 맨패즈는 락온 자체가 안되는 400미터 이상의 고고도에 떠서 기관포를 쏘기 시작하면 정말로 답이 없습니다. 광역 피해를 주는 기관포가 연사로 날아오니 지상은 보병이고 장비고 펑펑 터져나가는데 이를 제지할 방법은 전투기를 뽑아서 격추에 나서는 방법 뿐입니다.

▲ 왜 안닿냐고...

문제는 공격 헬기와 전투기가 TO를 같이 먹는다는 겁니다. 상대 공격 헬기가 떴으면 아군 전투기가 날아서 이를 떨궈 줘야 제공권을 가져오는데, 대다수의 경우엔 똑같이 공격 헬기를 뽑아 똑같이 상대 보병들을 갈구기(...) 시작합니다. 이게 점수를 더 잘 먹거든요. 128명이 들어오는 전장에서 4명은 헬기에 올라 '핫하! 죽어라!'를 외치며 재미를 보고, 나머지 124명은 쏟아지는 기관포 세례를 견디면서 불합리한 게임을 이어가야 합니다. 아니 뭐라도 닿아야 맞추기라도 하는데 말이죠.

장비 밸런스가 망해버렸으니 이제 남은 희망은 보병전 뿐입니다. 그래서 보병전은 괜찮냐고요? 아닙니다. 여기도 망했습니다. 구해주러 왔는데 같이 갇혀버린 독수리 오형제처럼 여기도 똑같이 망했어요. 꼬여버린 총기 밸런스와 왜 도입했는지 모를 요상한 탄착점 분포가 건플레이를 완전히 망쳐놓았기 때문입니다.

일단 총기 밸런스는 버그 수준입니다. 아니, 버그가 확실합니다. 밀리터리 슈터 게이머들이라면 다들 머릿속에 총기의 종류에 따른 스탠다드가 있습니다. DPS와 연사속도가 높지만 정확도와 거리별 피해량 감소가 심한 기관단총, 모나지 않았지만 특별한 구석도 없는 돌격소총, 지속 화력 투사와 장탄량이 좋지만 기동성과 재장전 속도가 단점인 기관총, 그리고 강하고 정확하지만 근접전 상황에서 한없이 약한 저격총까지 말이죠.

▲ 총기 밸런스는 심하게 불균형한 상태라 금방 고쳐지긴 할 것 같다

배틀필드 2042는 이 기본 구조 자체가 깨졌습니다. 현재 본작 최강의 무기는 두 종으로 압축됩니다. 기관단총인 PP-29는 반동이 적고 장탄량도 월등한데다, 거리에 따른 피해량 감폭이 매우 낮아 원거리에서도 돌격소총이고 기관총이고 다 씹어먹습니다. 원래 그러라고 나온 총기가 아닐진데, 현실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DMR인 SVK는 거리 불문 두 방이면 방탄복도 씹고 적을 침묵시키는 똥파워에 개조에 따라 피해를 소폭 희생하고 장탄량을 15발까지 늘려 모든 상황에 대처 가능한 총기가 되버렸습니다. 뛰어가다 저격총에 맞고 죽는 경우는 참 드문데, 이 총에 맞아 죽는 일은 너무나 빈번합니다. 너도 나도 이걸 쓰거든요. 게임을 하다 보면, 이 두 총기를 해금하지 못하는 레벨이거나 일부 고인물들을 제외하곤 모두 이 두 가지 총만 들고 다닙니다. 여러모로 좋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 압도적으로 좋아서요.

과거로 다시 회귀해 버린 탄퍼짐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건플레이를 망쳐놓았습니다. 배틀필드V는 총기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반동은 있을지언정, 적어도 쏘는 순간의 조준점에 정확히 탄이 꽂히는 형태였는데, 이번 작품은 정조준을 하고 쏴도 연사를 하면 기도를 해야 맞습니다. DMR이나 저격총, PP-29(...)가 아닌 이상, 원거리전은 운 좋은 사람이 이기거나 싸움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겁니다.

▲ 난 잘 쐈는데 아무튼 탄퍼짐 때문임

※ 탄 분산도 문제는 11월 26일 현재 패치를 통해 고쳐졌습니다.

때문에 보병들이 주를 이루는 지형의 전장은 마치 거대한 사회 실험의 장이 되었습니다. 애초에 총이 맞질 않으니 이기든 지든 재미나 보겠다는 똥쟁이들, 그리고 어떻게든 거리를 좁혀 목표를 탈환하겠다는 일념으로 죽든 살든 뛰어가 근접전을 펼치려는 전장의 영웅들이 한 눈에 구별될 정도죠. 원거리 제압사격이나 전술적 침투 이딴 건 다 소용없이 2차 대전 수준의 돌격만이 쓸모 없는 총기들을 어떻게든 써먹을 방법이거든요.

정리하면, 배틀필드 2042의 게임 디자인은 솔직하게 말해 완전히 망했습니다. 한 판의 게임을 하면서 겪는 즐거운 순간들보다 열받고 황당하고 짜증나는 순간들이 훨씬 많아요. 게임의 가치는 참 여러가지아 있지만, 모든 게임사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게 훌륭한 '게임 경험'입니다. 게임을 하는 순간들이 행복하고 즐거워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게 안 돼요.

바로 지난 리뷰에서, '콜오브듀티 뱅가드'를 리뷰하면서도 저는 혹평을 했던 바 있습니다. 그 뱅가드가 배틀필드 2042에 비하면 선녀입니다. 뱅가드의 경우 크리스피 치킨을 시켰는데 탄두리 치킨을 들고 온 격이었습니다. 원하던 맛이 아니어서 혹평은 했지만, 어쨌거나 취향만 맞는다면 꽤 좋은 먹을거리긴 했어요.

▲ 너네가 선녀였다. 내가 미안하다...

그에 비하면 배틀필드 2042는 그냥 닭을 조각내서 던져준 느낌입니다. 재료는 참 좋아요. 그래픽도 좋고, 128인이라는 멀티플레이 인원도 좋고 무기 종류가 너무 적은 감은 있지만 어쨌거나 게임을 이루는 필요한 조각들은 다 있습니다. 문제는 그걸 조리를 안 하고 대충 쌓은 상태로 내놨다는 거죠. 일단 출시하고 고쳐나가겠다는 안일한 생각이었다면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해주고 싶습니다.



이것이... 게임...?

한 가지 더 말해야 하는 점이 있다면, 바로 '버그'입니다. 배틀필드 시리즈는 역대 모든 시리즈가 버그로 굉장히 유명했고, 온갖 버그들이 움짤로 만들어져 밈을 이루는 등 애초에 문제가 많긴 했습니다. 그럼에도 게임이 꾸준히 사랑을 받아온 건 버그가 있을지언정 치명적이기보단 우스꽝스러운 버그가 대부분이었고, 버그 만큼의 만족감도 동시에 주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이건 좀 다릅니다. 버그가 너무 많아요. 그것도 굉장히 치명적인 버그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건물을 타고 오르는 호버크래프트는 딱히 설명이 필요 없이 유명합니다. 칼레이도스코프 맵에서 '브레이크 스루' 모드를 플레이하면 고층빌딩 옥상의 거점을 점령해야 하는데, 옥상에 올라가자마자 호버크래프트가 기관포를 겨누는 걸 보고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어설픈 공군력으로는 옥상 드글대는 적군을 해결할 수가 없어 난감했는데 이를 돌파하기 위해 아군도 호버크래프트를 벽에 붙이더군요.

▲ 어디든 기어올라가는 기적의 호버크래프트

빨판상어마냥 빌딩을 타고 올라가 거점을 돌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버그로 버그를 카운터치니 이이제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그 때 '이게 게임이냐?'라는 표현이 국내 한정이 아닌 글로벌 스탠다드임을 알았습니다. 아군 중 한 명이 채팅으로 'Is this a game? seriously?'라고 말하는 걸 보고 말이죠.

그리고, 이 호버크래프트 버그는 그냥 애교 수준입니다. 적을 쐈는데 적이 그 위치에 없는 버그, 피아식별 인디케이터가 제대로 작동을 안 해 적군이 아군을 부활시키고 다니는(것으로 보이는) 버그, 유탄에 맞아 죽은 줄 알았는데 실제론 저격총에 맞아 죽은 버그(아직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엘리베이터를 탔다가 맵 밖으로 추락하는 버그, 줌을 땡겼는데 가늠좌만 변하고 배율 적용이 안되는 버그 등 게임 한 판을 하면 무조건 한 번 이상은 버그를 경험할 정도로 다채로운 버그들이 존재합니다.

▲ 위아래로 한 칸씩 더 있는데 화면이 잘려 못 고르는 이런 버그는 너무 사소한 것

여기서 화가 나는 부분은 버그가 있다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자고로 버그라는 건 존재는 하되 만나기 어려워야 정상입니다. 툭하면 보이는 버그라면 으레 QA 과정에서 수정될 테니, 정식 출시 버전까지 남아있는 버그는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이 겹쳐져야 나오는 버그여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냥 너무 많이, 너무 자주, 너무 쉽게 버그들이 보입니다. QA팀이 단 한 판이라도 게임을 했다면 당연히 볼 만한 버그들이 게임 내에 여기저기 널려 있어요. 이 게임이 무료 게임입니까? 아닙니다. 무려 66,000원이라는 가격을 주고 사야 되는 풀프라이스 게임이에요. 그런데 마무리 과정을 이렇게 밖에 안했다는 건 그냥 할 의사가 없었던 것 아닐까요?



내 배틀필드 돌려내라

생각해보니 정말 해야 하는 얘기들은 오늘 꺼내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배틀필드 2042는 여러 면에서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 게임입니다. 병과 시스템이 완전히 변하고 모든 장비가 공용이 되면서 병과 구분의 기준이 되어 버린 스페셜리스트 시스템, 봇 시스템의 부활, 분대 시스템의 악화와 반면 강화된 탈것의 승무원 기능, 분명 존재는 하는데 이야기할 타이밍이 참 안 나오는 게임모드 '해저드 존'에 이르기까지, 사실 더 해야 할 말들이 많습니다. 게임이 정상적이라면 말이죠.

원래같으면 저런 주제들을 가지고 글을 끌어 오고 있었을 겁니다. 그게 제대로 된 리뷰고 맞는 리뷰겠죠. 하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대다수의 게이머들은 게임의 핵심 콘텐츠에 닿기도 전에 게임의 불합리와 저급한 완성도를 겪습니다. 온갖 버그와 대처 불가능한 불균형 사이에서 두어 판 게임을 진행하고 나면 게임의 달라진 점이나 재미를 느끼기보다는 불쾌함과 후회가 먼저 느껴집니다.

▲ 미묘하게 인종차별같았던 이 녀석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는데

서구권 개발자들이 인터뷰에 나오면 늘 입에 발린 듯 말하던 '훌륭한 게임 경험'이 없다는 뜻입니다. 비싼 돈 주고 게임을 샀는데, 이게 재미는 커녕 불쾌함을 준다면 엄청난 문제입니다. 차라리 재미만 없다면 취향이 안 맞는다는 정도로 설명이 가능한데, 그걸 뛰어넘어 분노를 느끼게 한다는 건 게임으로서 완전한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거든요. 배틀필드 2042가 지금 그렇습니다.

한 가지 어이없는 점은, 미디어를 대상으로 진행되었던 선행 플레이때는 또 괜찮았다는 겁니다. 버그가 없진 않았지만 자주 보이지는 않았고, 총기 밸런스도 그럭저럭 괜찮게 느껴졌어요. 당시만 해도 '갓겜'까진 아니어도 체면치레는 하겠다 싶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름 믿고 있었더니 본편이 이 모양으로 나와버렸습니다. 서양 게임사들은 이렇게 사전 체험 빌드는 좋고 본편이 엉망인 경우가 적지 않은데,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전 작들에서 다이스가 끝까지 잡지 못했던 '핵 유저'는 안티 치트 프로그램의 변경 덕분에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배틀필드V에 워낙 핵 유저가 많다 보니 게이머들은 늘 다른 건 됐고 핵이나 좀 어떻게 해 보라는 스탠스였고, 이는 배틀필드 2042 출시 전까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솔직히 대다수의 게이머들은 여전히 핵 유저가 있으리라 생각했죠. 그랬던 핵 유저를 정말 티가 날 정도로 확 줄였습니다. 그건 잘 했어요. 그것만 잘 했으니 문제죠.

▲ 핵이 줄은 건 알겠는데 사실 점수판이 요상하게 변해서 핵을 써도 티가 잘 안난다.

문득 수 년 전 배틀필드V 관련 취재를 위해 스웨덴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다이스 본사에서 당시 개발 중이었던 '퍼시픽 스톰'을 최초 체험할 때, 개발자가 했던 얘기가 기억나요. 아직 정식 릴리즈 버전이 아니라 버그가 있을 수 있는데, 심각한 건 아닐 테니 걱정 말고 즐기라는 말이었죠. 그래서 진짜 즐겼습니다. 그리고 정식 릴리즈 때도 확실히 큰 문제는 없었어요.

그 시절의 다이스와 지금의 다이스가 과연 같은 다이스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아니겠죠. 멀쩡한 개발사들도 내부 개발자들은 계속해서 바뀌고, 이 때문에 개발력이 요동치는 경우가 많은데 멀쩡히 잘 하던 부분들까지 죽을 쑤고 있는 걸 보니 이미 예전의 다이스와는 다를 거란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 그 시절도 전성기에 비하면 폼이 많이 떨어졌다고 혹평받던 시기였는데, 이젠 그마저도 그리울 지경입니다.

▲ 이 때도 꽤 힘들어 보였는데 이때가 그리워진다

무엇보다도, '배틀필드'라는 프랜차이즈가 계속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란 새로운 걱정이 생겨버렸습니다. 푸시를 받는 대형 개발사도, AAA급 게임을 연속 두 번 말아먹으면 존폐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다이스는 아마 잘 알 겁니다. EA라는 같은 우산 아래 있던 바이오웨어가 앤섬과 매스 이펙트 안드로메다를 내놓은 이후 어떻게 됐는지 봤을 테니까요.

그리고, 다이스의 힘이 다해 버리면 배틀필드 시리즈도 그것으로 끝일 겁니다. 좋았을 때도, 미웠을 때도 있었고 가끔은 크게 똥볼도 차곤 해서 곱게만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정말 사랑하는 시리즈가 배틀필드입니다. 어떻게든 이번 작품을 회생시키지 못한다면, 다음 타이틀은 굉장히 어려운 환경에서 개발을 이어가야 할 테고 그러다 한번 더 미끄러지면 그대로 배틀필드 시리즈의 종말이 찾아오는 거겠죠.

다이스에겐 이제 정말 하나의 길 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게임이 기본은 그래도 갖추고 있다는 거예요. 이 기본들을 어떻게든 살려 열기가 식기 전에 게임을 정상화시키는것만이 다이스가 소생하고 프랜차이즈가 살아날 유일한 길일 겁니다. 진심으로 그러하길 빕니다. 개발진 본인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 난장판에도 여전히 게임을 플레이하는 우직한 팬 층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