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규모의 IT 관련 전시회인 CES(국제전자제품박람회)에서도 올해 IT 제품 팬들에게 큰 기쁨을 선사했습니다. 업계를 좌지우지하는 브랜드들의 독자적인 기술 혹은 신제품 발표를 필두로 다소 엉뚱하지만 특정한 측면으로 보면 정말 기발하다고 생각이 드는 물건까지. 물론 전 세계, 전 분야가 코로나19로 인해 굳어있는 상태지만 "그래도 세상은 멈추지 않는다"의 느낌이 짙었던 한 주였습니다.

다만 오늘은 아쉬운 얘기를 하려 합니다. 바로 '업계 표준'과 관련된 얘기입니다.

표준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이것만 얘기해도 지루하게 몇 문단을 작성할 수 있을 것 같아 짧게 요약해 보겠습니다. 우리 게이머 입장에서 느낄 수 있는 업계 표준이라 하면 접하는 제품의 품질을 일정 수준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과 내가 원하는 기술, 또 그에 따른 가격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겁니다. "주사율 표기는 144Hz처럼 1초 동안에 몇 장의 화면을 보여줄 수 있는지로 한다"라는 명확한 표현 없이 "이거 1초에 100여 컷 보여줌"이라고 명시하여 판매하면 소비자 입장에선 난해할 수밖에 없으니 표준 표기법이란 참 고마운 존재죠.

다만 업계의 사정이라거나 사용하는 용어에 따라 소비자를 정말 난감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장 좋은 예시는 USB일겁니다. USB 3.0과 USB 3.1 Gen 1 / USB 3.2 Gen 1x1의 차이를 아시나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관련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저도 일일이 찾아봐야 확신하곤 합니다. 놀랍게도 저 3개의 명칭은 같은 규격입니다.

USB 3.0과 USB 3.1, USB 3.2. 눈이 부신 기술의 발전 덕택에 전송속도는 단계를 거듭할수록 대역폭이 2배씩 차이가 나는데에도 불구하고 현재 업계 표준 명칭은 각각 3.2 Gen 1x1 / 3.2 Gen 2x1 /3.2 Gen 2x2 입니다. 2008년에 발표한 규격과 2017년에 발표한 최신 규격의 차이가 숫자 하나의 차이라는 것이죠. 뭐 여기서 "스마트폰도 뒤에 숫자만 달라!"라고 하신다면 할말이 없겠습니다.

이렇게 줄 세워놓고 보면 좋은 성능을 내는 제품을 사기 위해서는 3.2 Gen 2x2 호환 제품을 사면 되겠습니다만, 글쎄요. 이렇게 봐놓고도 저는 헷갈리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속된 말로 "말장난 한다"의 느낌이라는 겁니다. 좀 더 공격적으로 비유하자면 내가 사려는 제품에 'USB 3.2 호환함'이라고 써져있으면 이게 어떤 USB 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얘기죠. 갤럭시Z플립3 출시에 맞춰 이전 제품인 갤럭시Z플립2를 플립3 Gen1로, 갤럭시Z플립3를 플립3 Gen2로 명명한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시대로라면 유통사에서 "플립3 초특가!"라고 해놓고 막상 보니 이전의 갤럭시Z플립2를 취급하는 악용 사례도 생각해 볼 수 있겠네요.

▲ 명칭도, 로고도 너무 헷갈립니다

가장 큰 문제는 HDMI 표준도 이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나마 USB의 경우, 작게는 마우스 혹은 키보드를 연결하고 넓게 가봤자 외장 하드 혹은 SSD를 통해 포터블 형식의 스토리지 공간으로서만 활용하는 우리 게이머 입장에서는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만 HDMI는 아닙니다. 게이머와 직결되어 있는 디스플레이 부문을 일체 담당하고 있는 파트기 때문이죠.

이번 CES 2022를 통해 HDMI의 최신 규격, 'HDMI 2.1a'가 공개됐습니다. 용어가 헷갈리지만 어쨌건 신기술입니다. 이 규격의 특징은 HDR 기능을 더 잘 활용하고 호환할 수 있는, SBTM(Source-Based Tone Mapping)을 지원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해당 기술은 PC 및 게임, 더 나아가 다중 화면을 띄워놓는 콘텐츠 크리에이터의 실사용 사례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는 내용이라 더 기대가 되는 부분입니다.

근데 뭐가 문제냐고요? 신기술이 도입되면서 HDMI 2.1에 대한 표준이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를 HDMI 2.1a가 차지했고요. 이 부분은 HDMI 2.1의 정착 사례를 돌이켜본다면 총체적 난국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HDMI 2.1은 2017년 당시, 4K@144, 4K@240 등의 게이머 입장에서 군침 도는 기능들을 지원한다며 공개됐습니다. 1440p@240의 경우, 이전 버전인 HDMI 2.0에서는 대역폭 문제로 인해 4:2:0 서브 샘플링으로만 지원됐었는데 HDMI 2.1을 통해 4:4:4로 지원할 수 있게 된 거죠. 그 밖에 VRR(가변 주사율) 등도 지원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다만 표준 개편을 통해 이전 버전까지 모두 HDMI 2.1이 되어버렸습니다. 게이머 입장에서 와닿는 부분만을 설명하자면 출시 당시, HDMI 2.0은 최대 주사율(240Hz)을 위해 FHD 혹은 최대 해상도(2160p, 4K)를 위해 60Hz를 선택하는 등 더 원하는 요소를 위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규격이었으며, HDMI 2.1은 4K에서도 240Hz를, 그 상위 해상도도 지원하는 규격입니다. 또렷한 차이가 있는 데에도 불구, 이 모두를 HDMI 2.1이라고 부르기로 표준을 갱신 했다는 얘깁니다.

그럼 어떻게 구분하냐고요? 판매사에서 제공하는 제품 상세 정보를 참고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혁신적인 기술이 표준 개편으로 인해 옵션, 즉 부가기능이 되어버렸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해서 표준 개편 이후로 4K 240Hz를 지원하지 않아도, 지싱크가 없어도 HDMI 2.1을 지원한다고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얘깁니다. 4K 240Hz는 HDMI 2.1에서 지원해야 할 기술이 아닌 지원할 수 있게 된, 일종의 옵션이 되어버린 셈이죠. 이는 소비자 기준에서는 혼란을 야기하고 격하게는 알 권리를 침해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 HDMI 2.1a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SBTM를 지원하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미지 출처: hdmi.org)

더욱 재밌는 부분은 케이블 부문입니다. 18Gbit/s 대역폭을 지원하던 기존 HDMI 2.0 케이블도 라벨만 바꾼다면 HDMI 2.1 케이블로 판매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소비자는 이 케이블의 지원 대역폭이 18Gbit/s(HDMI 2.0)인지 48Gbit/s(HDMI 2.1)인지 반드시 확인을 하고 구매를 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개편된 표준 덕택에 전부 HDMI 2.1 전용 케이블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할 수 있으니까요. 각각 Premium High Speed, Ultra High Speed라는 명칭으로 구분은 했습니다만, 이렇게만 봤을 땐 헷갈리기 쉽겠습니다.

이는 얼마 전인 21년 12월 말, HDMI 2.1a로 표준이 개편됨에 따라 다시 반복될 것이 우려됩니다. HDMI 2.0에서 2.1이 되던 과정에, 어느 외신에서는 해외 글로벌 기업에서 버젓이 "이 제품 HDMI 2.1!"라고 표기하여 판매하고 있는 것을 꼬집었습니다. 실제는 HDMI 2.0에 불과한 사양을 갖추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업체에서 제공하는 상세 사양 정보를 보고 제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단순히 'HDMI 2.1a 지원'이라는 부분에서는 이게 2013년의 HDMI 2.0 인지, 2017년의 HDMI 2.1 인지, 2021년의 HDMI 2.1a 인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소비자가 SBTM을 지원하는지 아닌지를 명확히 파악하고 구매해야 된다는 부분이죠.

국내산 소고기를 한국을 표현하는 나라 한 자에 소 우자를 사용하여 한우(韓牛)로 통칭합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어쨌건 여긴 한국이잖아? 앞으로 한국에서 유통하는 소고기를 전부 한우라고 불러야 해"라는 개정이 이루어진다면 우습게도 국내산 한우와 수입산 한우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잘 모르는 소비자들은 한우라서 샀는데 수입산이라니 말이 되느냐라고 하겠지만 이에 대해 "소고기가 소고기지. 뭐가 문젠데"라면 할 말이 없는 부분인 겁니다.

모든 소비자들이 제품의 세부 정보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구매하지는 않습니다. 특히나 해당 분야의 지식이 없거나 구분이 쉽지 않은 제품들은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하죠. 업계 표준은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들에게 혼돈을 피할 수 있는, 일종의 이정표가 되어야 하기에 더욱 중요합니다. 이런 면에 비추어보자면 이번 HDMI의 용어 개편은 충분한 시간이 흐르기 전까지 상당한 혼란을 야기할 것으로 보여 아쉽습니다. 조만간 구매할 계획이 있다면 꼼꼼한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