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좋아하는 스트리머의 인터넷 방송을 보던 중, '붉은 여왕 가설(Red Queen's Hypothesis)'이라는 생물학 관련 용어를 새롭게 배우게 됐다. 계속해서 발전하는 경쟁 상대에 맞서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발전하지 못하는 주체는 결국 도태된다는 내용으로, 동화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붉은 여왕이 자신이 사는 거울 나라의 특성을 앨리스에게 소개하는 장면에서 나온 이야기가 생물학 가설로 활용된 것이었다.

처음 붉은 여왕 가설이 제시된 것은 미국의 생물학자인 밴 베일런이 '도도새'의 예를 들며 생물의 진화 법칙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을 때였지만, 이 가설은 경영학에서 시장 경제를 설명할 때도 자주 활용되곤 한다. 적자생존의 환경에서 다른 이들보다 진화가 더딘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고, 결국 이를 피하고자 계속되는 경쟁이 시장 전체를 강하게 만들어간다는 개념이다.

방송에서 처음 이 붉은 여왕 가설에 대해 들었을 때, 나는 최근의 VR 시장, 그리고 '메타(Meta)'가 당면하고 있는 상황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스탠드얼론 VR HMD인 '메타 퀘스트2(이하 퀘스트2)'의 흥행으로 VR 시장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선점했으나, 최근 들어 별다른 혁신을 보여주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모습만 보여주는 메타의 모습과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앨리스의 모습이 그대로 겹쳐 보였다.

▲ “여기서는 힘껏 달려야 제자리야. 나무를 벗어나려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해.”
- 루이스캐럴 作 '거울 나라의 앨리스' 中

메타를 상대적으로 뒤처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첫 번째 요소는 '밸브 인덱스' 헤드셋을 전면에 내세운 밸브와 'PS VR2'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전개 중인 있는 소니의 약진에 있다. 밸브 인덱스는 지난 3월, 퀘스트2보다 더 높은 스팀 하드웨어 이용량 성장세를 기록하며 퀘스트2의 독주를 저지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음을 수치로 보여주었다. 추후 물량 수급 문제를 해결하고 국내를 포함하여 더 많은 국가에 출시된다면, 지금의 일방적인 시장 체계 역시 충분히 바뀔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상황이다.

소니 역시 올해 들어 PS VR2 관련 신규 소식을 계속 공개하며 '다음 세대의 VR'을 보여주려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PS VR2는 전작인 PS VR 이후 약 6년 만에 공개된 최신 VR HMD인 만큼, 4K HDR의 시각적 충실도와 최첨단 그래픽 렌더링, 인사이드-아웃 카메라 트래킹 등 향상된 성능을 갖춘 하이엔드 헤드셋이 될 예정이다. PS5라는 우월한 성능의 대응 제품군과의 시너지가 보장되어 있기에, 지금보다 더 향상된 수준의 VR 게임 경험을 기다리고 있던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는 기업들의 노력에 반해, VR 시장 자체에 대한 게이머들의 기대가 점차 감소하고 있는 것 역시 메타를 압박하는 요소 중 하나다. '하프라이프 알릭스'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시장 전체에 큰 영향을 주고 VR 시장에 대한 기대와 관심을 환기할 수 있는 킬러 타이틀 하나 없이, 공백의 기간이 너무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다. 퀘스트2가 제아무리 가격과 성능을 동시에 잡은 명기로 불릴지언정,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가 계속 공급되지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골방 한쪽에서 먼지만 뒤집어쓰는 신세를 면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그나마 퀘스트2 플랫폼으로 공개된 '바이오하자드4 VR'이 숨통을 틔워준 모양새이지만, 이것 역시 벌써 반년도 더 된 이야기고, 2022년 들어서는 유저들의 이목을 확 잡아끄는 신작이 하나도 없었다. PC와 콘솔 플랫폼을 통해 호라이즌 포비든 웨스트나 엘든링 등 AAA급 타이틀이 연이어 공개됐던 것과 비교해보면 더 확실히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 PC, 콘솔 플랫폼에서는 대작이 쏟아져나올 때도, VR 기대작 소식은 듣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메타는 매년 연례 행사처럼 개최해왔던 'F8 개발자 컨퍼런스'를 취소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지난 몇 년과 마찬가지로 현재는 프로그래밍을 잠시 쉬고 있으며, 회사의 다음 파트에 맞춤화된 메타버스 관련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메타의 설명이다. 메타가 F8 컨퍼런스를 취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만, 혁신을 담은 기술과 새로운 정보를 기대하고 있던 여러 VR 유저들에게 있어서는 아쉽게 느껴지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메타는 VR 시장에서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다른 기업들과의 끝나지 않는 경쟁에서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거울나라의 붉은 여왕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야 한다. 사람들이 계속 퀘스트2를 구매하도록 경쟁력 있는 신작 정보와 분명한 실체를 소개해야하고, 자신들의 헤드셋이 소니의 PS VR2나 밸브의 밸브 인덱스 등 다른 VR HMD보다 더 괜찮은 선택지라는 것을 끊임없이 입증해야만 한다. 지금의 행보를 유지하면 현상 유지는 커녕, 멸종되어버린 '도도새'처럼 계속 도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물론 메타에게도 역전의 기회는 남아있다. 바로 오는 21일에 개최될 예정인 '메타 게이밍 쇼케이스'가 바로 그 시작이다. 메타는 올해로 2회째를 맞이하게 된 이번 행사를 통해 퀘스트2에서 실행할 수 있는 다양한 신작 소식은 물론, 지금껏 공개되지 않았던 '깜짝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다. 2020년 이전에 완전히 사장되어버릴 것만 같았던 VR 시장에 퀘스트2로 생기를 불어넣어준 메타가, 이번 발표회에서 그간 쌓여온 VR 유저들의 걱정들을 한순간에 녹여버릴 수 있는 '혁신'이 담긴 소식들을 전해줄 수 있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