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두 스피드런 할 수 있어



완성도 높은 인디 게임을 서비스하기로 소문난 안나푸르나 인터랙티브가 또 한 건 해냈습니다. 지난 6월 17일 혜성처럼 등장한 '네온 화이트'가 스팀 평가에서도 '압도적으로 긍정적'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주요 평점 사이트의 고평가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네온 화이트'는 지난해 초 쇼케이스를 통해 등장했을 때부터 내세운 하이퍼 스피드 플레이스타일과 특유의 감성으로 해외 인디 팬들에게 눈도장을 찍었습니다. 다만, 등장인물들이 쓰고 있는 가면 탓인지, 전체적인 아트 스타일이 잘 맞지 않아서인지 국내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죠. 게다가 1인칭 시점으로 진행하는 하이 스피드 파쿠르 액션이라니, 듣기만 해도 매니악하기 그지 없는 장르라 생각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출시 이후 직접 확인해 본 '네온 화이트'는 고인물의 전유물이라고 생각되는 '스피드런'을 보다 접근하기 쉬운 방식으로 재해석한 면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팀 포트리스' 시절에는 하던 사람만 할 수 있던 로켓 점프를 그저 이동 수단 중 하나로 사용하고, 그러면서도 전반적인 난이도가 너무 오르지 않게 적절히 안배한 레벨 디자인은 네온 화이트가 고평가를 받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게임명: 네온 화이트(Neon White)
장르명: 액션
출시일: 2022.06.17
리뷰판: 출시 버전
개발사: Angel Matrix
서비스: Annapurna Interactive
플랫폼: PC, NSW
플레이: PC

관련 링크: 메타크리틱 페이지 / 오픈크리틱 페이지


간단한 규칙으로 만들어낸 초스피드 게임플레이


먼저, '네온 화이트'의 세계관은 게임을 시작하자 마자 플레이되는 컷신을 통해 간단히 설명됩니다. 네온은 천국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지옥의 죄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며, 이렇게 선택된 이들은 약 10일동안 진행되는 대회를 통해 천국에 존재하는 악마들을 퇴치하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가장 많은 악마를 퇴치한 네온에게는 상으로 기계로 만든 후광(Halo)이 주어지며, 계속 천국에 남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죠.

게임 속 주요 등장인물(주로 네온들)은 모두 특정한 색상으로 대변되는데, 네온 화이트는 게임의 제목이자 동시에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플레이어는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채 천국의 대회에 참가한 '네온 화이트'가 되어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 천국을 종횡무진 달리게 됩니다.

▲ 게임의 목표는 악마를 모두 처치하며 목적지까지 달리는 것

이러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네온 화이트'의 기본적인 게임플레이는 매 스테이지마다 위치하는 목표 지점(골)까지 빠르게 도달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냥 빠르게만 도착해서는 안 되고, 맵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악마를 처치하고 나서 목표 지점에 도착해야 합니다. 스테이지 별로 도착한 시간에 따라 메달(브론즈, 실버, 골드, 에이스)을 획득할 수 있고, 천사로부터 다음 임무를 수락하기 위해서는 골드 이상의 메달을 얻어 '네온 랭크'를 높여야 합니다.

게임 속의 공격과 이동 보조 수단은 모두 '소울 카드'라는 요소가 도맡고 있습니다. '네온 화이트'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기도 하죠. 주인공은 기본적으로 '카타나'라는 소울 카드를 가지고 시작하며, 이름 그대로 이를 사용해 적들에게 근접 공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투사체의 경우 튕겨내서 적에게 반격을 가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카타나는 아주 기본적인 공격 수단일 뿐 빠른 클리어를 위해서는 크게 사용할 일이 없습니다. 특정 악마들을 처치하거나 맵에 놓여있는 다른 소울 카드들이 더욱 중요하죠. 이들은 대부분 권총이나 기관총, 샷것 등 다른 총기의 역할을 하며, 맵에 존재하는 적들을 (카타나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없애는 데 도움이 됩니다. 또, 모든 종류의 소울 카드는 저마다 사용 횟수가 정해져 있으며, 너무 총알을 낭비할 경우 카드가 사라지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 '소울 카드'를 총으로 쓰거나, 버리면서 적재 적소에 사용해야 합니다

물론 총기의 형태로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울 카드'의 꽃은 바로 목적지까지 향하는 이동 보조 수단으로 사용할 때입니다. 기본으로 제공되는 카타나를 제외한 모든 소울 카드는 카드 한 장을 그냥 버림으로써 다른 효과를 냅니다. 예를 들어, 권총 형태의 노란색 소울 카드는 카드 한 장을 버리면서 더블 점프를 가능하게 하고, 기관총 형태의 보라색 소울카드는 버리면 범위를 공격하거나 자신을 높이 띄울 수 있는 폭탄으로 활용할 수 있죠. 그밖에도 대시, 급강하, 로프 등 다양한 이동기를 사용해서 목적지까지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을 개척하는 것이 '네온 화이트'의 핵심입니다.

이처럼, 게임은 소울 카드라는 하나의 요소를 통해 FPS 스타일 전투와 스피디한 플랫포머를 한 자리에 녹여냈습니다. 소울 카드를 어떤 식으로 사용하든 사용 횟수에 제한이 있고, 그렇기에 한 번의 실수로 목적지까지 갈 수 없는 상황이 자주 발생합니다. 하지만, 모든 스테이지는 키보드 기준 F키를 눌러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더 높은 메달을 받기까지 수도 없이 F를 누르는 자신을 마주하게 됩니다.

게임을 진행할수록 여러 종류의 소울 카드와 적들이 등장하고, 그에 따라 맵 디자인도 상당히 난해해지기 때문에 한 번의 도전으로 금메달 이상을 획득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온 화이트'가 일반적인 게이머는 클리어하지 못하는 피지컬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도전적인 요소는 있지만, 불합리한 정도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수준의 맵 디자인은 게임의 난이도를 완만하게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간 클리어해 온 스테이지를 돌아보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는 구간들이 대부분이죠.

▲ 로켓 점프! 이런거 꼭 해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가장 높은 등급의 메달인 '에이스'를 획득하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스테이지 별로 난도의 차이는 있지만, 금메달과 에이스 메달을 가르는 시간의 간격은 일반적으로 주어진 루트를 진행해서는 좁힐 수 없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스피드런을 즐기는 고인물 게이머들처럼, 독창적인 진행 루트를 찾아야 하죠. 다음 임무를 위한 랭크 올리기는 금메달로도 충분하지만, 그 이상의 경지를 원하는 이들을 위한 '이지 투 런, 하드 투 마스터'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밖에도 '네온 화이트'는 보기에는 어려워 보이지만, 막상 게임을 플레이해보면 할만한 느낌이 들도록 여러 장치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가령, 첫 플레이에서 브론즈나 실버 메달을 받았다고 상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종류의 메달이든 해당 스테이지의 통찰력(Insight)이라는 요소를 올리는 데 도움을 주는데, 이 통찰력이 높아지면 더 빠른 시간을 달성하기 위한 힌트나, 이전에 자신이 달렸던 구간의 고스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반복적으로 플레이를 하다 보면, 어느 새 에이스 메달을 모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분위기 연애 시뮬레이션, 그래서 더 아쉬운 어색한 번역


'네온 화이트'는 그저 스피드런과 플랫포머를 즐기기 위한 게임은 아닙니다. 심판의 대회가 진행되는 열흘 동안, 주인공은 다양한 등장인물들과 상호작용하며 잃어버린 자신의 기억에 대한 단서를 채워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력을 좀 더 기울인다면 연애 비슷한 것(?)도 할 수 있고요.

대회에 참가한 여러 명의 네온들 중, 주요 캐릭터로 등장하는 네온들은 모두 주인공과 같이 저마다 특정 색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나 유쾌한 성격을 가진 네온 옐로우와 섹시를 담당하는 누님 네온 레드, 귀여운 듯 살벌한 사차원 성격의 네온 바이올렛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메인 스토리만으로도 어느 정도 이들과 주인공의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더욱 깊은 상호작용을 위해서는 이들의 호감도를 높이는 것이 필요하죠. 그리고 이 호감도는 다른 연애 시뮬레이션과 마찬가지로 선물을 통해 높일 수 있습니다.

▲ 진엔딩을 위해선 스테이지마다 숨겨진 선물을 찾아 호감도를 높여야 합니다

캐릭터들에게 줄 선물은 미션 진행을 통해 획득이 가능한데, 처음 진행하는 스테이지에서는 선물의 위치가 드러나지 않아 반복 플레이가 강제됩니다. 일정 이상의 통찰력 포인트가 오르면 선물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게 되고, 목적지 대신 선물의 위치를 향해 소울 카드를 사용해야 하죠.

어차피 높은 등급의 메달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같은 스테이지를 반복적으로 플레이해야 하지만, 첫 시도에는 선물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은 메인 스토리를 빠르게 진행하고 싶은 게이머들에게는 불편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물이 없으면 캐릭터들과의 관계 레벨을 올릴 수 없고, 관계 레벨을 올리지 않으면 주인공이 잃어버린 기억을 찾을 수 없으며, 그러면 모든 기억을 되찾아야 볼 수 있는 진 엔딩을 보지 못합니다. 진 엔딩을 위해서든 높은 메달을 위해서든, 반복 플레이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 어딘가 이상하지만 귀여운 네온 바이올렛, 귀여우니까 선물을 마구 갖다줍시다

대회에 참가하는 네온들, 그리고 대회를 주관하는 신도(Believers)들, 이상하게도 만화 속 고양이의 모습을 한 천사들까지, '네온 화이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과 나누는 대화에서도 유머러스한 부분이 많이 드러나는 편입니다. 특히, 여성 주인공인 네온 레드와 바이올렛과 나누는 대화에서는 다소 성적인(?) 특유의 서양식 조크도 확인할 수 있고요. 하지만, 완성도가 떨어지는 한국어 현지화 퀄리티 탓에 스토리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의도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네온 화이트'의 한국어 번역에는 명사를 영문 그대로 활용하는 모습이 무척 많이 보입니다. 게다가 어떤 문장은 제대로 번역된 한편 다음 문장은 번역투가 너무 남아 있는 등 번역의 완성도도 들쭉날쭉합니다. 전반적인 내용 전개를 한국어로 볼 수 있다는 점은 좋지만, 한 번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면 내용보다 번역을 어떻게 했는지가 먼저 눈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네온 화이트'의 시뮬레이션적인 측면에서는 아쉽지만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웠습니다. 일단 네온들이 얼굴에 쓰고 다니는 오니 가면이 국내 게이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지 미지수이며, 낮은 번역 퀄리티 탓인지 아니면 서양 서브컬쳐의 특징인지는 알 수 없지만 등장인물 간 상호작용에 깊이 몰입하기 힘든 측면이 있습니다.

▲ 이해가 안 되는건 아닌데, 왜 어색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 들어올림이 뭐야 들어올림이

하지만, 이들과 친밀도를 형성하며 해금되는 사이드 퀘스트의 완성도는 훌륭합니다. 사이드 퀘스트는 메인 미션과는 다른 맵 디자인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만드는데, 이를 달성해야 해당 캐릭터와의 친밀도를 더욱 깊게 쌓을 수 있는 형태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사이드퀘스트는 해당 캐릭터들의 성격이 아주 잘 반영되어 있죠. 가령 주인공을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맵 전체에 함정을 매설해 놓는 네온 바이올렛의 사이드 퀘스트의 경우 말 그대로 함정의 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몰입도에 대한 문제를 제외하면, '네온 화이트'의 메인 스토리텔링 자체는 마지막까지 흥미를 잃지 않도록 짜여 있습니다. 주인공 화이트는 어쩌다 모든 기억을 잃었는지, 다른 네온들은 어떻게 그를 기억하고 있는지 등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천국에 있는 악마를 퇴치하는 대회가 도대체 왜 필요한지 같은 보다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이야기도 재미있는 편입니다.

▲ 낯설었던 가면도 계속 보면 익숙해지긴 하는데..



스피드런? 겁먹지 말고 도전하세요

▲ 주인공 화이트와 천국 최강의 네온 그린, 이 둘의 이야기는 스토리 전개에 따라 차츰 풀려갑니다

'네온 화이트'의 전체 임무는 12개이며, 총 스테이지는 각 임무별로 10개 내외로 97여 종이 존재합니다. 모든 스테이지의 에이스 메달을 목표로 하는 반복 플레이를 고려하면 꽤나 괜찮은 볼륨이라고 할 수 있죠. 게다가 등장인물들의 호감도를 올려 해금하는 각종 사이드 퀘스트까지 생각하면 3만원 이하의 가격에서는 충분한 플레이타임을 보여줍니다.

특히, 앞서 이야기했듯 피지컬에 대한 큰 걱정 없이도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된 레벨 디자인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스테이지 하나를 클리어하는 데 대부분 1분 미만으로 걸려 부담이 적고, 스테이지 대부분은 획득한 소울 카드를 바로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 플레이어의 고민을 덜어줍니다. 또 스피드런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게이머라면, '네온 화이트'가 제공하는 편의 기능을 통해 어느 정도 대리 만족을 경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표지 아트에 등장하는 이들의 무시무시한 마스크에 거부감만 없다면, '네온 화이트'는 몇 시간이고 반복해서 즐길 수 있는 빠른 템포의 스피드런 게임플레이를 선사합니다. 피지컬이 아예 필요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어느 정도 FPS에 대한 경험이 있고, 목적지까지 빠르게 도달하기 위한 위치, 방향 감각만 있으면 누구나 스피드런 선수가 된 듯한 경험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이죠.

몇 번의 클릭과 짧은 집중력만으로 고인물의 게임플레이를 따라해 보고 싶은 게이머라면, 겁 먹지 말고 '네온 화이트'를 한번 도전해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